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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롬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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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롬 8:5~9)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영국에서 포도주를 실은 컨테이너 운반선이 스코틀랜드의 항구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하역했는데 한 선원이 짐이 다 내려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냉동 컨테이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안에 있던 것을 몰랐던 또 다른 선원이  냉동실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냉동실 안에 갇힌 선원은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냉동실 안에는 충분한 식량이 있었지만 선원은 낮은 온도 때문에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바닥을 더듬어 벽에 박는 못 하나를 주워 들고 냉동실을 열어 보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시간부터 냉동실 벽에다 날짜별로 자신이 겪는 고통을 낱낱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찬 공기로 인해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과정, 언 부위가 견딜 수 없이 따끔거리는 상처로 변해가는 과정, 자신의 몸이 얼음 덩어리로 변해가는 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을 때, 선장은 냉동 컨테이너에서 죽어있는 선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벽에 쓰여진 선원의 글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컨테이너 안의 온도가 섭씨 19도였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오는 동안은 컨테이너의 냉동장치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선원은 죽었습니다. 산소가 부족해 죽은 것도 아니고 냉동 컨테이너이기에 자기는 몇시간 지나지 않아 얼어 죽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다가 그 생각 때문에 죽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그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각 속에서 삽니다. “이 생각 없는 사람아” 라고 사람을 질책할 때가 있지만 사실은 그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누구나 다 생각은 합니다. 다만 그 생각이 어떤 생각이냐의 차이 일뿐입니다.
깊은 생각이냐 아니면 무심코 하는 생각이냐 차이일 뿐이고 영양가 있는 생각이냐 아니면 무가치 한 생각이냐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혹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어~ 내가 생각한대로 되네” 아마도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지난 여름에 어느날 “아~ 수박이 먹고 싶다” 했는데 5분도 안되어 어느 성도님이 수박을 들고 찾아  오신 것입니다. 내가 놀랐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최고의 능력은 “생각의 능력”입니다. 생각이 곧 입을 통해 말이 되고 말이 곧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만 하면 이미 일은 절반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을 보세요.
오늘 하나님 말씀을 보면 우리 성도는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을 보세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하나는 “영의 생각”이고 하나는 “육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란 말입니다
6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만들어 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의 생각”이 무엇이며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복을 누리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생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네마” 라고 표기하는데 이것은 심장을 말하는 “프렌”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 프로네마(phronema)는 인격의 세가지 요소인 知情意(지정의), 즉 지식, 감정 의지 세가지 요소를 다 가진 것으로 생각은 “인격의 중심을 지배하고 있는 것” 이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이 생각이 올바르면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과 성품과 행동은 잘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생 방향과 행동은 어그러진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한 노인의 잘못된 생각으로 숭례문이 불타고 국민들의 마음에 슬픔과 상처를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노인 한사람의 잘못된 생각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은 어디서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항상 “생각의 기능”은 우리의 육신의 일부분인 腦(뇌)가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 한가지를 깨우쳐 줍니다. 그것은 사람은 뇌가 없어도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靈(영)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생각하시고, 천사도 영이지만 생각합니다. 사람의 영도 뇌가 없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 볼까요?
누가복음 16장의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지옥에 있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내가 뜨겁고 목말라죽겠으니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만 손가락에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씀하십니다.
“너와 나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이 있어서 건너가거나 건너 올 수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자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살려서 우리 집에 보내어 우리 집 가족들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이 말씀에 보면 죽은 자가 말을 합니다. 죽은 자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뇌는 벌써 썩어서 없어졌는데, 육신도 없고, 뇌도 없는 죽은 자가 생각을 하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생각이란 것이 단순히 뇌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도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 가면 주님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자유롭게 영의 생각을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2) 육신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육신을 쫒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결국 그 생각은 사망을 만들어 낸다고 5절과 6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생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따라서 합시다.“육신의 요구를 /삶의 동기와 목적으로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 이것을 육신의 생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육체가 원하는 그것, 배를 채우는 것, 성적인 본능, 쾌락추구 본능을 삶의 동기와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집착하고 힘쓰는 것이 육신을 좇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것을 위해 일생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 것이냐? 7절을 보세요.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이런 육신의 요구를 삶의 동기로 삼고 육신의 요구를 목적으로만 여기며 살면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왜요? 그런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싫어하실까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3) 영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5절 하반절에 보면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고 6절에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의 생각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따라서 합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사는 것/이것을  말합니다.
영에 속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영의 속한 생각이라 하나님의 영이 이끌어 주는 생각으로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세요.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내 속에 거하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이 거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이 함께 하는 우리 성도들 중에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 받은 성도인데, 성령이 함께하는 거룩한 백성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육신의 생각을 가지면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데 알면서도 자꾸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영의 생각으로 바꾸려면

1.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은 성도는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요한복음1:12~13절에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 자녀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확신치 못하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앞절인 로마서 8장 1~2절도 보세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죄로 인해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왜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명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이 보증하신 약속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영에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위해 살게 되기에 육신의 생각은 다 벗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사람이 세상의 것에 걱정염려가 충만하다 보니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분명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할 때 실상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은 겉으로 보면 내가 믿은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 하나님이 내속에 들어와 내게 믿음을 주시고 믿게 하시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입니다.
11절을 보세요.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기에 내가 받은 구원은 내가 얻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누구도 내 구원을 취소하거나 빼앗아 갈 자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영의 생각을 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롬8:31~34도 보세요.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 갈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받아 탐심을 벗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생각, 육신의 생각은 그 밑바닥에 탐심이라는 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탐심은 마귀의 선물로 우리 인간이 타락할 때 우리 속에 들어온 무서운 놈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고행을 해도 안됩니다. 금식을 하면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것 같으나 다시 살아나 나를 휘잡는 놈입니다.
이 탐심이 나를 붙들면 온갖 근심 걱정 염려를 다 하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탐심이란 놈을 벗어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방도로 노력하고 힘을 씁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온갖 고행을 합니다. 단식을 합니다, 쉬지 않고 잠자지 않는 고행을 하기도 하고 비바람을 맞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고행을 해 봅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 열심이 강물로 죄를 씻어 보고 이슬람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피를 흘려 고통을 겪으면 탐심에서 해방될 것이라 하여 그렇게 해 보기도 합니다. 그래도 육체의 탐심과 탐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 어찌해야합니까? 
롬8:12을 보세요.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빚진 자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고 영의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전인격을 지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내가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영에 속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4. 현재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육신의 생각만을 하게 될까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현 세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롬8:18을 보세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기에 현재를 보면 육신의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주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보면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의 현재만을 바라보면 온갖 것이 걱정 투성이 입니다. 건강 걱정, 자식 걱정, 입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하나 해결되면 걱정 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매일 걱정입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안된다, 못한다, 하는 부정적인 말밖에 안나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열왕기하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시절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장기간 포위되자 사마리아성에 식량이 바닥이 났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된 엘리사는 왕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고 비웃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사 선지자는 말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다음날 아침 하나님이 아람군대를 두렵게 함으로 아람군대는 모든 군수물자를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양식 값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장관은 그것을 감독하다가 군중에게 떠밀려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마리아가 구원받아 모든 사람이 양식을 풍족하게 먹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한 장관은 현실만을 보고 그런 일은 하나님이라도 일으키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 장관은 그 생각대로 하나님이 주신 기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또 이스라엘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가나안 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을 하자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인의 후손인 아낙자손이 사는데 우리는 그들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다는 것이고, 그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생각을 백성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결과는 다른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들의 모습과 전력만을 보고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생각대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그들의 우리의 밥이다. 결국 그 생각대로 가나안 당에 들어갔습니다. 할렐루야 

생각이 문제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벗어버리고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가까이 하시고 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에 속한 내 생각이 내 인생을 움직입니다.
영에 속한 내 생각이 내 가정을 움직이고 내 주변 사람들을 움직입니다. 
나 한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벗고 영의 생각을 하면 우리 삶은 놀랍게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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