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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어의 은사(2) (고전 1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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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은사(2) (고전 12:4-11)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을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은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 즉 달란트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엡 4: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를 섬겨 온전하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신비한 요소가 있습니다. 성경에 신비한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말 같다고 말하지만 그러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고 상식적인 내용만 있으면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윤리종교요 도덕종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기독교에는 영적 요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그 영적 요소를 부여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감과 영혼과 영의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 영적재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영적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영적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언어의 은사”가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 영적 은사들 중에서 그 언어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신앙생활에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사역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언어의 은사인데 그 은사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예언의 은사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나 메시지 그리고 계시를 받아서 개인이나 교회나 그 시대에 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그런 많은 예언자들이 나옵니다. 그 예언자들은 모두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오늘의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받아서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 예언들은 대부분 이미 이루어졌거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예언도 이미 이루어진 것이 있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언자들이 급감합니다. 예언은 성경이 없던 시대에 왕성했습니다. 성경이 주어진 후에는 대부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하십니다. 있다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시므온이라든지 안나라는 여선지자 정도입니다. 그들은 태어난 예수를 보고 장차 고난 받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천년 동안은 예언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부분적으로 이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지만 아주 미미합니다. 이 예언의 능력은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시는 사역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선언하는 신성한 능력입니다. 이 예언에는 즉각적인 예언이 있고 미래적인 예언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있는데 이것이 즉각적인 예언입니다. 그런가 하면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언한 경우가 장차를 위해서 주어진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분별력, 결단력, 솔직함을 지닌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 예언은 진리를 거스름에 대하여, 악함에 대하여,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나만 알게 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고로 많은 피해도 따라옵니다. 오늘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문제를 야기합니다. 건듯하면 예언한다고 말합니다. 시한부 종말론도 그런 종류였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남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밤에 목사님을 찾아가면 돈을 꿔줄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왔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 예언과 계시를 너무 오용해서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대부분 혼란한 시대에 메시지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구약시대는 성경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순간순간 주시는 예언에 의해서 움직여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예언이 없어져가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도 진정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가 있다면 누군가를 통해서 말씀을 계시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받아서 지켜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

방언은 신비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신비한 언어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입니다. 이 방언의 은사는 믿음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받는 은사가 방언의 은사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 체험을 빨리하게 해서 신앙세계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영적체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면 내적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이 영적 체험은 필수적입니다. 영적 체험은 반드시 방언만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영적 체험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방언의 장점은 열심히 기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맨 정신으로 기도하면 10분하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방언으로 기도하면 밤새워 기도해도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운동에 불을 붙여 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깊지 못해서 기도하기 힘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 이 방언하는 분들이 합세하게 되면 그곳에 기도의 불이 붙게 됩니다. 기도의 열기가 타 오르게 됩니다. 방언은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은 내 신앙을 위해서 영적으로 주시는 체험이고 또 기도의 불을 붙이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은사이기도 합니다. 이 방언도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키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렇다고 방언을 받았다고 으스댈 것은 없습니다. 이 방언은 아주 기초적인 은사입니다. 그래서 이 방언의 은사는 신앙 초보자에게 비교적 많이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교회에 유익을 주고 본인에게 신앙적 체험을 주기 위해서 주시는 신비한 영적 언어입니다. 행 2장4절을 보면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기도할 때 밤에 방언이 터졌다고 했습니다. 이 방언은 기도할 때 성령이 주시는 외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를 활용할 때 몇 가지 주의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 방언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게 금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방언이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교회는 그 방언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주신 은사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또 이 방언을 남용하는 것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방언을 못하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강조하는 교회도 있고 이 방언을 집사임명의 조건으로 삼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연습시키는 웃지 못 할 일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두 잘못된 일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선물을 어떻게 연습하며 주시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모두 방언을 잘못 이해해서 그렇습니다. 또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혼자 큰 소리로 자랑삼아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잘못된 모습입니다. 분명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시면 감사하게 받아 교회부흥과 내 신앙성장을 위해서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통역의 은사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영적 언어입니다. 그래서 방언하는 자기 자신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대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도 모르는 방언을 큰소리로, 보란 듯이, 지나치게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능하면 방언하기 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쓰고 예언보다는 사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적인 방언입니다. 이 사적인 방언은 영적체험과 기도에 힘을 실어 줍니다. 그래서 방언은 영적 불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적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적인 방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언어인 방언입니다. 그 방언도 자신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마땅히 통역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통역의 은사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4:5). 즉 하나님의 신비한 계시를 방언으로 주실 때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일상의 언어로 해석해 주는 은사입니다. 그 방언이 공적인 방언일 때 통역하여 모두에게 알림으로서 모두에게 덕을 나누고 하나님의 격려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은사

가르치는 일도 특별한 언어의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일도 요령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능력도 특별히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특히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정신 지체자아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좋은 언어의 수단을 은사로 받은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가르치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인내의 은사까지 지닌 분들입니다. 남다른 인내력, 이해력, 언어전달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가르쳐도 전달하는 기술이 남다른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내용이나 방법이 아주 지루하고 요령 없이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를 해도 듣는 사람들의 진을 빼고 지루하고 답답하게 전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시작되면 모두 졸기 시작합니다. 그런 설교는 또 한없이 길기 일쑤입니다. 꼭 교장선생님 훈화하시는 것 같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교단에 올라가면 참 지루하게 훈화하십니다. “첫째 둘째 셋째 끝으로, 결론으로, 마지막으로, 이만 간단히” 얼마나 지루합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가르치는 일도 설교하는 것도 요령 있게 재미있게 간단하면서도 할 말을 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것을 보아도 요령 있게 간단명료하게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분명 언어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의 은사는 단순한 말 재주가 아니고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주 둔감하던 사람들도 능력 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감동을 주고 회심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그는 어부출신인데 무슨 특별한 언어 구사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사후 성령 받고 능력 받고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 속에서 불타는 뜨거운 심정을 토해내듯 예수를 전했습니다. 십자가를, 부활을, 너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때 모두의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3천명, 5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언어의 은사입니다. 미사여구를 쓰는 언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언어의 은사들입니다.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모두 언어의 은사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물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영적 선물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일입니다. 끈질기게 간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사모함과 간구함은 참으로 중요한 자세입니다. 누구든지 사모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락방에 모여 성령받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활용하는 일입니다. 은사가 선물로 주어지면 사명으로 알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사와 사명은 다릅니다. 은사는 사역을 위해서 주어지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성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엄숙한 명령 즉 사명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못해요, 나대신 아론을 보내세요”하고 핑계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론을 붙여 주며 “네가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은 실행해야 하고 은사는 활용해야 합니다. 사명을 받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은사를 받고 활용하지 않으면 그 은사는 그만 사장됩니다. 그래서 은사는 받은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되고 활용해야 합니다. 활용하면 계속 발전하고 안하면 퇴화합니다. 사용하면 더 풍성해지고 강해지지만 훌륭한 은사가 주어졌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마침내는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 목사는 “만약 당신에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용하라, 간수하려거나 구두쇠처럼 아끼지 말라, 마치 백만장자가 파산하기를 작정한 듯이 그렇게 아낌없이 쓰라“고 했습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은사도 기질대로 주어집니다. 사람마다 성품과 기질이 다 다릅니다. 은사도 기질과 성품대로 주어집니다. 일본의 하천풍언은 “싸우는 기질”을 타고 났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한대 얻어맞으면 반드시 두 번 때려 주어야 식성이 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는데도 그 성품과 기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도 기질은 바꾸지 못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과 40일간 대면하여 기도했습니다.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을 쓰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 아닙니까. 천사가 다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혈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세는 그 혈기 때문에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거친 기질을 바꾸지 않으시고 기질대로 사용하십니다. 하천풍언을 그 기질대로 사용하시니까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천풍언은 예수를 만나고 난후 고베를 중심으로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빈민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빈민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는데 일생동안 그 거친 기질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넝마주이들로부터 추앙받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소리가 큰 사람은 찬양대 하면 망칩니다. 그런데 데모하는데, 투쟁하는데 앞장서면 딱 맞습니다. 베드로의 성격이 얼마나 급합니까. 그래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질을 전도하는데 사용하니까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설교를 해도 그냥 설교가 아니고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하니까 3천명 5천 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얌전한 사도요한은 매사 조용하고 얌전하게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12사도 중 유독 혼자서 천수를 다하고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일생동안 요한복음, 요한 1,2,3서, 요한 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마지막에 제자들이 교훈 한마디만 남겨달라는 간구에 “내가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나, 그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닌 성격 개성을 따라 활용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은사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은 활용해서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 활용해서 더 발전시키고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이 되고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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