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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위의 말씀(2) : 희망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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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말씀(2) : 희망 (눅 23:39-43)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데보라 노빌’의 “감사의 힘”(Thank You Power)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에먼스’ 교수(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학교 심리학과)와 ‘마이클 매컬로프’ 교수(마이에미대학교 심리학과)는 함께 흥미로운 실험을 하였습니다. 감사하는 태도가 삶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를 뽑아 A. B. C 세 그룹으로 나누고 이들에게 일주일 동안 각각 다른 세 가지 말과 행동에 집중토록 했습니다.

A그룹에게는 기분 나쁜 일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차의 배트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여기까지 걸어서 왔어요.’
‘저 머저리 같은 녀석에 내 차를 박고 도망갔어요.’

B그룹에게는 고마움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제 남자 친구는 정말 친절하고, 헌신적이에요.’
‘그렇게 멋진 일출을 본 것은 처음이었죠. 깨워줘서 고마워요’

C그룹은 일상적인 일에 집중하도록 하였습니다.
‘구두를 샀어요.’ ‘옷장을 정리했어요.’

실험 참가자들은 일주일 동안 지시한 사항에 따라 충실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 감사하는 태도에 주력한 B그룹의 사람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들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와 함께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고 전했습니다. 분명 그들의 삶은 일주일 전에 비해 개선되었습니다. 전보다 삶을 즐겼고, 낙천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반면 A그룹과 C그룹에서는 그런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교수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그들은 실험 기간 동안 좀더 긍정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게 된 거죠. 두통이나 감기를 앓은 사람도 없었어요. 활동지수도 매우 높았죠.”

이 두 교수는 이와 같은 실험을 1년 동안 더 진행해본결과, B그룹에 속한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주요변화를 발견하였습니다.
*삶이 더 행복하다고 느꼈다. *낙천적인성격으로 변했다.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열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결단력이 강해졌다. *힘든 일을 처리하는데 자신감이 붙었다. *인생의 목표를 수립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돕는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스트레스애 강해졌다. *가족관계가 돈독해졌다. *신앙심이 깊어졌다.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성경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를 만납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루 말로다 할 수 없는 고통을 함께 겪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좀 쉽게 설명하면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천국으로 갔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이처럼 갈라놓았을까요?
그것은 현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Ⅰ.한 사람은 예수님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23:39입니다.
“예수와 함께 달린 죄수 가운데 한 죄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하였다.”

이 사람은 일생동안 살아온 그대로 지금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습니다. 분명 잘못 살라온 인생인데, 자기의 삐뚤어진 아집과 편견으로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고, 자기가 생각하는 그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지금 흉악한 범죄를 하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정신을 차리고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이 마지막순간만이라도 진실해져야할 시간인데, 그는 아직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정죄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며 세상을 어둡게 하는 온갖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쏟아놓은 것들로도 많이 더러워진 세상에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태도로 지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

이 사람이 누구로부터 예수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말 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이나 신뢰의 흔적은 추호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그리스도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인 본능적인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구하고, 몸이 아프면 치료를 기다리며, 추우면 따뜻한 옷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난 중에 고난을 벗어나기를 간청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겸손하게 하시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단시키시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단의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뜻을 바로 알고 이겨내면 그만큼 큰 복이 따릅니다.
십자가 위의 이 행악자는 고난의 의미를 묻지 않습니다.
고난의 해결만을 원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그에게 아편일 수 있습니다.

이 강도는 감히 예수님께 이렇게 무례하게 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여론의 힘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사람들이 아우성칩니다.
“당신이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37)
이 여론에 힘을 얻어 말합니다.
“그리스도여, 당신도 이 고난에서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여보시오”
이렇게 말함으로 묘한 쾌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가장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Ⅱ.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보며 말합니다.
누가복음23:40-43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 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런 다음에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고난 속에서 사실상 거듭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늦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변화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위대한 희망을 보게 된 이것 때문입니다. 

1.자신의 죄보다 더 큰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신념을 믿고 일생을 살아온 삶의 결과가 심각한 죄의 심판뿐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른 자신의 모습은 한 마디로 절망이었습니다. 이 절망의 상황 속에서 그는 위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주님의 기도 속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이 사랑 속에서 그는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잇다는 놀라운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용서하는 사랑 속에서 죄짓고 정죄 받고, 죄책감에 시달려 온 그 사람이 용서받은 기쁨의 세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이 은혜의 세계를 알았더라면 그들도 에덴에서 추방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천국은 용서의 사랑을 알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세계입니다.
지옥은 용서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끝내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무렵 두 제자의 실수를 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세 번식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보다는 유다의 죄가 더 심각하여 한 사람은 용서를 받고 수제자의 위치를 회복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는 회개하지 못하였고, 베드로는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는 죄보다 더 큰 용서의 사랑이 있음을 알면 희망이 있습니다.

2.고통 하는 현재보다 더 영광스러운 세계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가 그 나라가 천국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그 나라가 현세와는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곳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12:2-5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미든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나는 이 사람이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으로 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체험한 낙원의 셋째 하늘의 신비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8:18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1:21,23,24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설 연휴가 있던 토요일입니다. 권사님 한분이 사위의 자동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건강을 체크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 두 갈레였는데 권사님은 서울역 앞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자동차가 병원 응급실 앞에 정차하고 내려서 서너 걸음을 걷는데 갑자기 숨이 차고 계속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 앉기를 원하면서 곧 바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응급실 앞이었으니까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고 권사님은 폐혈전이라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갔더니 많이 회복이 되신 권사님은 당신에게서 일어난 일들이 너무 신기하고 놀랍다며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집에서 그런 일을 당하였으면 하나님께 갔을 것입니다. 이번에 갔으면 사람들에게 칭송을 많이 받았을 텐데요” 하셨습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이것이 예수 안에서 이 세상보다 더 영광스러운 천국을 발견한 사람의 삶입니다.
생명의 끝에서 발견한 영원한 생명의 세계-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신뢰-절망은 없다.

3.운명보다 더 크고 강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사람들은 오늘의 삶의 현실은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삶의 귀결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들어 온 운명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바꾸어지기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모든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 질병이든, 실패든 간에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변화가 가능합니다. 변화를 이루는 핵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강도가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실로 놀랍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제판장의 정죄를 받고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있습니다. 자신의 결과대로 그는 억울함 없이 마땅히 지옥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자신의 그 당연한 삶의 귀결에 의의를 재기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해서 모욕하고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일 들었던 주님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23:34입니다.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신뢰함으로 드린 이 사람의 기도가 이 사람의 우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

우리는 가끔 우리의 기도가 염치없는 행위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내 살아온 과정을 보면 무슨 염치로 감히 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
“기도할 사람이 따로 있지. 나는 안돼”
굉장히 양심적이고, 정직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사람은 단 한 가지 이유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조건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3:16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 믿음에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선행됩니다. 주님은 이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 은총 속에서 약속하십니다.

로마서8:32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요즈음 우리는 우리 위하여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40일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특별 새벽기도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이 서언에 기도하는 성도들로 가득합니다.
기도는 운명을 바꿉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997년 이 땅에 IMF 체제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외국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 몰린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을 때, 은행에 돈을 넣어 이자를 받던 사람들은 “날마다 자색 옷을 입고 연락을 즐기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대로!” 계속해서 높은 이자를 받으며 잘사는 이대로 가기를 원했다는 데,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규명할 이유는 없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이대로!” 라고 외치는 분이 계십니까? 물론 열심히 성실하게 사시는 분들이야 이대로가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를 원하신다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하십시오. 기도 속에 변화의 희망은 아직도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 희망은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 속에 있습니다. 긍휼을 바라는 사람에게 하신 대답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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