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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 (눅 5: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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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극복하는 믿음 (눅 5:18~26)

(눅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눅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벼룩은 근육이 발달하여 자신의 몸길이보다 200배를 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벼룩을 잡아 유리 병에 넣고 유리병 중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으면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유리에 부딪치게 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계속 실험을 하면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나중에 중간의 유리 장벽을 없애도 벼룩은 예전 유리벽 전에서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벼룩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국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식의 한계에 갇혀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능력의 한계에 갇혀삽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경험의 한계에 갇혀 새로운 세계로 가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유리 병 중간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안된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한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심한 중풍에 걸려 온 몸에 마비가 왔습니다. 보통 중풍에 걸리면 뇌 혈관이 막혀 산소의 공급이 차단되어 몸의 한 부분의 신경이 마비가 옵니다. 어떤 사람은 언어 장애가 오고, 어떤 사람은 보행 장애가 옵니다. 그런데 본문의 중풍병자는 중증으로 온 몸에 마비가 와서 누워지내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한계에 부딪칩니까?  그런데 온 몸에 중풍이 와서 침상에 누워서만 지내다보니 얼마나 많은 한계에 부딪치겠습니다. 가고 싶은데를 마음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더 많은 좌절을 맛보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로 나아와 놀랍게도 중풍 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모든 죄가 사함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가능케되는 기적의 배경에는 중풍병자의 한계를 극복하는 큰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중풍병자를 보면서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큰 믿음을 소유하여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더 존귀하고, 더 가치있게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는 믿음을 어떻게 활용하여 한계를 뛰어넘었을까요?  그가 뛰어넘은 한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1. 참 믿음은 나를 넘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동원하여 치료해 보았던 중풍병자는 의술의 한계만을 확인하였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을 수 없는 한계만을 확인했습니다. 당대의 의술로는 아무리 탁월한 의사를 만나도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현실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려는 순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만나 일일이 손을 얹으시니까 모두 치료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는 중요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라면 불치병이라고 알려진 내 병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신은 중풍병에 걸려 다시는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하루종일 확인하며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으리라는 믿음을 품고 한계를 극복하였던 것입니다. 이대로 불행하게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능력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새로운 인생이 열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질병을 바라보며 질병에 자신의 인생이 삼키워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며 낙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바라보며 불우한 환경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의 나락에 떨어지리라 여기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고 자신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하며 주저앉아 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불행해집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실패합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망합니다.

  자신의 문제만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환경만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연약함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를 넘어서 큰 능력을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슴합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낙담이 될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역전의 용사가 됩니다.  고통스러울 때도, 두려울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갖는 사람이 참 믿음의 주인공들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 옆에 앉아있던 개가 루터가 식사하는 모습을 열심히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손이 밥그릇으로 가면 눈이 밥그릇으로, 손이 입으로 가면 또 눈길이 입으로 따라옵니다. 루터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개의 시선이 따라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터가 개에게 감동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없이 먹어치우고는 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루터는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중얼거립니다.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더라면 하나님은 내게 더 크게 감동하셨을 것이다"

  '개는 밥 먹는 손을 쳐다보는 동안 일절 잡념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온갖 잡된 생각을 다하고 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검푸른 바닷물을 바라보고는 물에 빠졌습니다.  위기를 이기는 힘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옵니다.  환경만을 바라보는 것은 낙심만 가져다줍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실망만 안겨줍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 또한 절망을 안겨줍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자신과 환경만 보았다가 실족하였습니다.

  성도는 모든 상황 속에서 분명히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불안할 때도 우리 시선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능력의 예수님을 기대하기 바랍니다.  위기의 해결책은 나의 방법, 나의 능력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나의 할 일은 위기도 기회로 바꾸시고 실패도 성공으로 바꾸시고, 절망속에서 큰 능력을 행하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 참 믿음은 장애물이 가로막을 때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나 가고자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는 갈수 없었습니다. 제발로 일어나서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병 같으면 어떻게든 예수님앞에 나아가 고쳐달라고 간청하련만 중풍병으로 꼼작을 못하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발로 걸을 수가 없었으나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좋은 건강한 네 명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친구가 예수님께 나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 친구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걸을 수 없는 장애물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장애물이 중풍병자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앞을 가로막은 장벽은 사람 장애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들었습니다. 중풍병자보다 먼저 와서 집안을 물론 마당과 대문밖까지 사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모여든 이들중에는 자신처럼 낫기를 기대하는 병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나 누구도 비켜주지를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면 치료받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소망으로 달려왔으나 사람들때문에 도저히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눈앞에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실망하고서 그대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지붕을 통해서라도 들어가자.'는 기발한 생각을 하고 지붕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은 덤불이나 갈대를 덥거나 진흙을 이겨서 평평하게 만든 집들로서 그 지붕을 뜯는다면 왕창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길이 막혔을 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가로막은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참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어떤 왕이 길 한가운데 큰 돌을 굴려다 놓고 누가 그 돌을 치우는가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한 상인이 지나가며 "어 쓸모 없는 돌이 굴러 나왔어"하고는 귀찮게 생각하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한 관리가 지나가며 "도대체 누가 이 돌을 여기에 버린 거야"라고 불평하며 지나갔습니다. 왕은 이 나라의 도덕 수준을 탄식했습니다.  그때 한 농부가 채소를 싣고 시장에 가다가 그 돌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 돌을 들어서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있던 곳에 주머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돈과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는데 '이 돈은 누구든지 이 돌을 치우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장애물이 길을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 뒤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이 도와주시리라는 좋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나 도움을 받지 못합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하나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님이 은사 또는 능력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나 받지 못합니까?  장애물이 앞을 가로 막을 때 포기하고 돌아서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뛰어 넘어 예수님발앞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장애물 경주와 같습니다. 장애물이 곳곳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가로막습니다. 날마다 열심히 기도생활 하려는 사람 앞을 가로막습니다.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전도하려는 사람앞을 가로 막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충성, 봉사하려고 하는 사람앞에는 반드시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잘 달려가다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으면 멈추어 뒤돌아 옵니다. 실망하고 포기합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중단합니다.

  장애물 경주에서 장애물은 멈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과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장애물도 멈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과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잘 통과하면 믿음이 인정받습니다. 칭찬듣고 상으로 큰 축복이 임합니다. 사람이 가로막든, 환경이 가로막든, 사단이 가로막든 반드시 극복할 길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풀 공식이 있고 답이 숨어 있는 것처럼 장애물은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심한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이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담소하였습니다. 모인 친구들 중에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갑자기 '우리 각자 자기 아내 자랑을 해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것은 정신병자 아내를 둔 친구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다 그 의견에 동의하여 농담을 섞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아내를 자랑하였습니다. "내 아내는 절세 미인이야." "내 아내가 우리 가정에 들어온 후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화기애애하게 되었어." "내 아내는 내 마음이 살살 녹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각자 차례대로 이야기를 마치자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만 남게되었습니다. 모든 친구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저 사람은 과연 무슨 말로 아내 자랑을 할까? 라고 궁금해하면서 집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불평만 나올 줄 알았으나 정작 불행한 아내를 둔 그는 활기있는 얼굴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감사가 넘친다네. 자네들이 아는 바대로 내 아내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지. 그러나 나의 큰 행복은 이런 아내로 인해 내가 기도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네.  만약 내 가정에 고통이 없고 화평하기만 했다면 기도와 신앙이 지금같이 뜨겁지 않았을 거라네. 그렇지만 나는 불행한 아내로 인해 항상 기도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돛은 바람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돛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바람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선원이 유능하듯이  역경을 잘 이용하여 성숙의 계기로 삼는 사람이 유능한 신자입니다. 장애물을 잘 이용하여 더 잘 달려가는 사람이 그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한계에 봉착하여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가족의 핍박입니까?  직장에서의 압력입니까?  아니면 중풍병자처럼 육신의 연약함입니까?  또는 교회안에서 힘들게 만드는 다른 교인때문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까?  그외의 어떤 장애물입니까?  좌절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은 사람중에서 치유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주님과 더 가까와질 수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이 더 존귀하게 주님께 쓰임받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준비하시고 한계를 극복하며 가까이 다가오시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어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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