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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슥 1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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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슥 12:9-14)

[그 날이 오면, 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이방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겠다.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서 슬프게 울 것이니, 므깃도 벌판 하다드 림몬에서 슬퍼한 것처럼 기막히게 울 것이다. 온 나라가 슬피 울 것이다. 다윗 집안의 가족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며, 그 집안 여인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다. 나단 집안의 가족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며, 그 집안의 여인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다. 레위 집안의 가족들이 따로 슬피 울 것이며, 시므이 집안의 가족들이 따로 슬피 울 것이며, 그 집안 여인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다. 그 밖에 남아 있는 모든 집안의 가족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며, 각 집안의 여인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다.]

•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 왕

스가랴는 학개와 더불어서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다인들 가운데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잇도인데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 한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의 아버지 베레가는 느헤미야서에 이름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때를 근거로 계산해 보면 그는 주전 520-518년경에 활동한 것 같습니다. 그의 이름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했지만 황폐하게 변한 조국의 모습에 낙담한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들의 운명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을 예고하면서 모든 불의로부터 돌아서라고 외쳤습니다.

스가랴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는 포로 귀환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9장부터 14장까지는 주전 4세기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8장까지가 원래의 스가랴서이고, 9장 이후의 부분은 후대에 덧붙인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뒷부분의 내용은 매우 복잡합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 의미파악이 쉽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거칠게나마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적들을 물리치리라는 것과, 앞으로 평화의 임금이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그 평화의 임금은 온순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이 되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게 되는 데, 그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은 스가랴에게서 가져간 것입니다. 오실 평화의 임금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공의를 베풀고,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슥9:10)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군사 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게 되는 세상,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사는 세상(미4:3-4)의 꿈은 인류의 오랜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 거짓 목자의 운명

하지만 힘을 숭상하던 이들에게 이런 비전은 너무 낭만적인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때문인가요? 그 평화의 임금은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배척받고 제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비폭력 저항을 통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꿈을 인류에게 심어주었던 모한다스 간디도 살해당했습니다.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며 사랑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도 살해당했습니다. 오직 고통받는 민중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애썼던 엘 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성찬식을 집전하던 중에 저격병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그들의 꿈은 어리석었던 것일까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고 말했던 홉스가 옳은 것일까요? 사랑이나 돌봄 혹은 섬김이라는 것은 약자들의 윤리일 뿐입니까? 실제로 세상은 강자들의 편익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화의 임금이 제거된 후에 등장하는 지도자라는 이들은 백성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목자들,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면 삯꾼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등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무정합니다.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스가랴는 그런 지도자들의 모습 이렇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양을 잃어버리고도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길 잃은 양을 찾지도 않으며, 상처받은 양을 고쳐 주지도 않으며, 튼튼한 양을 먹이지 않아서 야위게 하며, 살진 양을 골라서 살을 발라 먹고, 발굽까지 갉아 먹을 것이다.”(슥11:16-17)

사실 역사의 과정을 보면 힘을 숭상하는 이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떻게 하든지 힘을 얻든지, 아니면 힘 앞에 굴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기본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 원리를 깨뜨릴 힘은 없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품고 계신 하나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양 떼를 버리는 쓸모없는 목자에게 닥쳐올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칼이 그의 팔과 눈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은 가끔 욕심이 많은 목사들을 만날 때마다 농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지 언제 ‘내 양을 먹으라’고 했어?” 촌철살인의 말씀입니다.

• 용서를 비는 영

스가랴는 힘을 숭상하는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받게 될 것인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굴복시키려는 강대국들의 시도를 하나님은 헛것으로 만드십니다.

“그 날에, 세상 모든 이방 민족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집결할 때에, 내가 예루살렘을 바위가 되게 할 것이니, 모든 민족이 힘을 다하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바위를 들어올리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상처를 입을 것이다.”(슥12:3)

이것은 유대인 스가랴가 본 민족적인 비전이지만 나는 이 본문의 ‘예루살렘’에 ‘성도’라는 단어를 넣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는 때로는 어려움을 겪겠지만, “모든 민족이 힘을 다하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든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밑힘’ 즉 저력입니다. 사랑은 가장 유약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랑처럼 강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의 사람들, 소망의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백성이나 성도들이 흠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맞지요?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참 많이도 하며 삽니다. 문제는 무감각입니다. 죄를 자꾸 저지르다 보면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타락이란 영혼의 둔감함이라 생각합니다. 스가랴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저지른 큰 죄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악한 자들과 공모하여 평화의 임금을 죽였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처벌하시는 대신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길을 택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12:10)

이 영을 우리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은혜를 구하는 영’을 내려주실 때 우리는 영혼의 둔감함으로부터 깨어나 삶이 곧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용서를 비는 영’을 내려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 일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조차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도 가질 수 없고 회개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10절에는 수수께끼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비는 영을 내려주실 때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개역)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이것을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라고 옮겼습니다. 공동번역은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이라고 옮겼습니다. 뭔가 복잡하지요? 그만큼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당신의 종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찔러 죽인 평화의 임금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평화를 깨뜨리는 일체의 행동은 하나님의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

용서를 비는 영을 받은 사람들은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한 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임금을 억압하고 박해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한 자기들의 죄가 떠올라 그들은 슬피 웁니다. 10절 하반절부터 14절까지는 “~가 슬피 울 것이며”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온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를 가슴 아파하며 슬피 우는 광경을 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슬픔의 강이 온 나라를 에돌아 흐르고 있습니다. 1983년에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면서 흘렸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물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이 눈물은 억울하고 원통해서 흘리는 것도 아니고, 기뻐서 흘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참회의 슬픔이요,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슬픔의 눈물입니다.

마종기 시인의 <나무가 있는 풍경>은 슬픔과 눈물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시름에 겨워하던 시인은 어느 날 예배 중에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성긴 눈발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옷깃을 여민 채 주위를 둘러봅니다.

누구요? 안 보이는 것은 아직도 안 보이고
잎과 열매 다 잃은 백양나무 하나가 울고 있습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을 닦고 있는 나무,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내가 몰입했던 단단한 뼈의 성문 열리고
울음 그치고 일어서는 내 백양나무 하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텅 빈 허공을 배경으로 노박이로 서있는 나무 한 그루뿐입니다. 잎과 열매를 다 잃어버려 쓸쓸한 나무, 시인의 심상에 비친 나무는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그저 울고 있는 게 아닙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진을 눈물로 닦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시적 도약이지요? 시인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습니다.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이것은 물음이 아니라 진술이고 확인입니다. 이 깨달음이 그를 새롭게 세워줍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해줍니다. 하나님 안에서 슬퍼하는 것이 복인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스가랴는 온 땅에 가득한 슬픔의 깊이를 설명하기 위해 “므깃도 벌판 하다드 림몬에서 슬퍼한 것처럼 기막히게 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하다드 림몬이라는 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이스르엘 평원의 므깃도 골짜기를 일컫는 지명일 겁니다. 그곳에서 가나안의 농민들은 우기가 되면 다시 살아나기 위해 추수가 끝날 때에 죽는다고 여겨졌던 ‘생장의 신’을 공경하기 위해 벌판에 나와 슬피 울곤 했습니다. 스가랴는 이 풍습을 염두에 두고 죽임을 당한 평화의 임금이 다시 살아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죄를 참회하는 절기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슬픔과 눈물이 없다면 치유도 구원도 없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구하십시오. 이 무정한 민족의 가슴에도 눈물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린 교회의 가슴에도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종교의 한복판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파하며 가슴을 치는 참회의 눈물이 흐를 때 우리 역사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눈물로 갈아엎어진 마음, 눈물로 갈아엎어진 역사야말로 평화의 텃밭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 모두 평화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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