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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발산에 한 단(壇)을 쌓았으니 (수 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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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발산에 한 단(壇)을 쌓았으니 (수 8:30~35)

우리는 새 정부 출범 꼭 2주일을 앞두고 숭례문(崇禮問)화재라는 어처구니(맷돌의 손잡이)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숭례문(1962, 12, 20 국보 제 1호로 지정)이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누각이라는 데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서울 다녀왔느냐? 그럼, 서울 가니 남대문(숭례문) 문지방(門地枋)이 굉장히 높더라"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서울을 다녀오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대에는 남대문도 개방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남대문에는 일반 주택과 같은 문지방(문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그윽한 국민적 정서를 안고 있는 숭례문이 갑작스런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으니 사람들의 허전함과 안타까움은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서울에 있는 그 어떤 고궁이 손실되었다 해도 숭례문 손실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잿더미 앞에서 소복한 여인의 살풀이(타고난 흉살을 예방하는 굿) 춤을 추는 장면이 T.V에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아예 상복을 입고 헌화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심지어 그곳에 제물을 갖다놓고 엎드려 절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에게는 숭례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안타까움을 다스릴 길이 없어 충동적으로 하는 일에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그러나 종교를 떠나 문화시민으로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단(壇)을 쌓았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은 단의 대상이 어떤 신이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 단의 대상이 우상이냐? 하나님이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마자 난공불락의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른바 철벽금성 여리고성을 칼 한 번 써보지 아니하고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그 누구도 피 한 방울 흘린 일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못하는 것을 했을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절대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됩니다(수 6:18-19). 그래서 아간의 범죄를 막지 못했습니다(수 7:1).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성에서 대패했습니다(수 7:16-26).

교만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자신이 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성을 점령한 뒤에 아이성 공략에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이유는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해 작은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인간 편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 4:10)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사 7:13)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 겠느냐?』(민 16:9)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제 2차 아이성 공격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승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투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데 비싼 대가를 치루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아이성에서 걸어 20마일 이상 떨어진(걸어서 약 이틀) 세겜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에발산까지 나아가 거기서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무장 시키는 작업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진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완전히 정복하지 않은 가나안 땅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에발산까지 간다는 것은 일견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패배 소식을 들은 남부와 북부의 성읍들이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동맹이라도 하여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일반 전략가 같으면 전쟁이 끝난 다음에 단을 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전쟁 중에 이 일을 감행했습니다. '에발산에 쌓은 단'은

Ⅰ.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단입니다.

본문 8장 30절에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위하여(for) 쌓은 단이란 말은
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단이라는 말입니다.
② 하나님 때문에 쌓은 단이라는 말입니다.
이 제단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에발산에 단을 쌓는 일은 여호수아의 즉흥적인 생각에서 한 일이 아닙니다.
일찌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에발산에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또 하나의 돌에 석회를 발라 그 위에 율법을 새기고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낭독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하라고 했습니다(신 27:4-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에발산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성을 정복한 후에야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에발산으로 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스승 모세의 말대로 행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영의 사람들이 하는 일은 육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튼튼한 요새 대신에 제단을 먼저 쌓았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수식어들로 전승의 문구가 새겨진 승전비 대신 율법을 새긴 돌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영의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영감 받은 모세가 하는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행위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유효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행위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위험천만한 이 일이 병기와 군대를 증강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미 아간의 죄로 인하여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를 경험한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가나안 정복 작전에 승리를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앞에 놓고 길갈에서 성결의식(할례)를 경험했습니다(수 5:1-9). 그렇기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자마자 바로 단 쌓는 일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요새시요, 창과 방패시요, 전쟁을 이기는 능력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영적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 18편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7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시편 91편 2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91편 4-5절에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라고 했습니다. '에발산에 쌓은 단'은

Ⅱ.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시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러한 위급한 상황을 무릅쓰고 에발산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에 새기고 백성들 앞에 낭독했던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 제사를 상징합니다.
에발산은 저주를 선포 받은 땅입니다.
신명기 11장 29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 두 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의 동쪽 입구에는 세겜 성읍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두 산이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나누어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두 산은 가나안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고 비슷한 높이로 마주 보고 있는 산입니다.
또한 가나안으로 이주해 온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입니다. 이러한 에발산에 제단을 쌓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주심으로 죄악과 저주로 가득찬 이 세상이 구속될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가 에발산에서 드려진 것은 이미 선포된 저주를 없앤다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의 세상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이 세상의 어두운 죄악을 깨끗하게 청산하신 것입니다. 에발산에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계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만이 세상 죄를 속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 제사를 상징합니다.
본문 8장 31절에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라고 했습니다.
에발산에 세워진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데 유의해야 합니다. 구약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것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벽을 허물어뜨린다는 예표로서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십자가에 친히 번제와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이제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인간의 구원은 십자가 제단에서 인류를 대신하여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믿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7장 7절에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계시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에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상징은 바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입니다.
'에발산에 쌓은 단'은

Ⅲ.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결과 승리한 자들의 예배계시입니다.

본문 8장 34-35절에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모세의 율법을 돌에 새기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8장 32절에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돌은 제단을 쌓기 위한 돌이 아닙니다. 제단을 쌓기 위해 사용한 돌은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자연 그대로의 원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기록하는 이 돌은 율법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도록 석회칠을 하여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돌입니다.

신명기 27장 4절에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노숙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베개 하던 돌에 기름을 붓고 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28장 18-19절에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돌을 세워 단을 쌓았습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에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돌을 쌓은 사건이 네 차례나 나옵니다.
첫 번째는 요단강을 건넌 후에 요단강가에 세워진 돌무더기인데 이것은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돌입니다(수 4:9).
두 번째는 첫 번째 아이성 공격에 대패하고 아간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로 친 후에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수 7:26).

세 번째는 아이성을 함락한 뒤에 세운 돌무더기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8:29).
에발산에 세워진 돌무더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돌무더기입니다. 이 돌무더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8:33).
여호수아가 먼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면 제사장들이 그것을 받아 다시 큰 소리로 낭독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되는 일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된 의무입니다.

여기에 남녀노유가 있을 수 없으며 혈통의 차별이나 본 국민이나 타 국민이 구별이 될 수 없습니다. 축복의 복음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지역, 모든 종족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을 쌓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구약시대에는 성전의 제단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 제단 위에는 희생제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제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속죄 제단의 흠 없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바른 관계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로마서 5장 8-11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이 사실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단을 쌓는 일은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 계시입니다. 큰소리로 말씀을 낭독하면 백성들이 듣고 깨닫는 것은 신약의 예배계시(설교계시)입니다. 인간은 예배하는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입니다. 인간의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예배하지 아니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온전한 뜻이 예배입니다. 승리할 때 예배해야 합니다. 실패할 때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 대상이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이 예배 대상입니다. 예배 목적이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배의 가치가 예배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만족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는 인생의 전부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몸 된 교회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과의 바른 관계, 물질과의 바른 관계를 시마다 때마다 점검하고 교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제단이 어디 입니까? 여러분의 제단은 여러분들이 산제물 되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각자 받은 교회적 사명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는 그 어떤 경우에도 타협되거나 양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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