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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 17:1-7, 롬 5:1-11, 요 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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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 17:1-7, 롬 5:1-11, 요 4:1-6 )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가장 먼저 범한 죄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주 40야를 금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서 그동안을 참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그들은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정신은 여전히 출애굽이전이었습니다. 그것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 우리는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서 범하게 되는 죄를 볼 수 있습니다.

  현대를 "속도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단지 속도가 아니라 “속도전”이라고 합니다.  더 빨리 나가기 위한 전쟁이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더 빠를수록 더 성공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신앙도 이런 시대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앙이나 영성은 오히려 시대역행적이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빠른  것이 아니라 느린 것 속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성은 디지털적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습니다. 오늘 우리 교계현실은 급성장이 가져온 부작용 때문에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시가 바쁘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도 느긋하게 물러가셔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능력을 받고 분명한 목표를 확인했던 것과 같은 노력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출17:은 두 가지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낸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던 일입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를 바위에 앉히고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부축하여 종일 내려오지 않게 하였더니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을 진멸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닛시”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여 다투었던 사건이요, 후자는 모세의 지도력을 도와서 승리를 쟁취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다 광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광야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야는 마귀가 들끓는 곳입니다. 수없이 많은 고난과 시련에 직면해야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나아가면 승리할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애굽 1세들처럼 그 광야에서 마귀의 희생이 되고 말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이끌어 냈느냐? 차라리 애굽에서 종노릇하면서라도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이 여기서 주려 죽는 것보다 낮지 아니하냐?” 라고 한 저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는 저런 일들, 즉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역시 불신앙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아무리 상황이 그렇고, 또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다고 해도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불신앙의 열매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친다고 거기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그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와 이스라엘이 마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든다고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납득이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과 훌의 협력으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완파하고 “여호와 닛시”로 승리했습니다. 여기에 기도하는 모세의 손, 협력하는 아론과 훌의 손, 그리고 나아가 전쟁한 여호수아의 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 앞에도 므리바의 기적과 르비딤의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마실 물을 내어놓으라면서 도전했을 때 모세가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로 말을 했는데 하나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곧 이어서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다툰 것이 곧 여호와를 시험하는 일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자화상입니다. 그들은 작은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불평하였으며 어려움이 닥치기만 하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도전하였습니다. 심지어 불평분자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를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가자는 반역까지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단지 말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정도가 아니라 돌을 던지려고 할 만큼 사태가 험악해 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는 잘도 참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 앞에 모세는 “차라리 내 이름을 주의 생명록에서 제할지언정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큰 계명을 묻는 사람에게 이 한가지만이 아니라 다른 한 가지를 덧붙이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 같은 사람은 “우리 앞에 천국 가는 직행 로는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를 거쳐, 그리고 이웃을 거쳐서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웃과 손잡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볼 때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보다도 사실은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문제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큰 계명의 절반을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늘 하던 일상적인 일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3.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사역하신 내용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 시 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또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를 가려고 하면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기 위해 요단강 동쪽을 우회해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들 사이의 장벽은 우리의 휴전선만큼이나 높았습니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휴전선을 걸어서 넘어간 것이 역사적 사건이었듯이 우리 주님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신 것은 그보다 엄청나게 더 의미가 깊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로써 수 백 년 동안 가로막혀있던 두 종족 사이의 담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허무신 것을 예표하신 것처럼 여겨지는 사건입니다. 오늘 요4:4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말씀의 의미는 그만큼 깊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단지 그 땅을 밟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초면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이상하게 여겼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만난 여인이 사마리아 사회에서도 지탄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합리화하기 어려운 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벽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런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인종의 장벽, 신분의 장벽, 사상의 장벽, 그 어떤 장벽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서로 정죄하거나 단절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결혼제도를 이루시고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듯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인간을 다른 인간이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먼저 세상적인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경로이든지 간에 주님과의 만남이 이 여인뿐만 아니라 여인이 속한 사마리아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인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 죄를 자백하게 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 즉시 그 여인은 자기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 나왔으며 그로 인하여 사마리아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한 불쌍한 영혼을 사랑하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지나가던 나그네를 만나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본 여인의 회개와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냈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향한 인간적인 선입관을 버리고, 서로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을 조급하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서로를 향하여 참고 용납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롬5: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매우 리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우리 이웃 가운데 연약한 사람,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심지어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는 곧 바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뜻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모세와 다툰 것이 주님을 시험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금단의 땅 사마리아를 밟으신 것이 그 땅을 구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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