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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교냐? 사명이냐?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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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냐? 사명이냐? (요 21:15~23)

나쁜 습관

지난주일 설교를 하면서 제가 어렸을 때 집에 친구를 데려오면 부모님이 "아버지는 뭐 하시냐? 공부는 몇 등이나 하냐?"고 물으셔서 참 이해가 안 갔는데 정작 제가 부모가 되어 제 아이들이 집에 친구 데려오면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또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 "너희 형은 공부 잘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옆집 아무개는 공부 잘 하는데, 엄마 친구 아들 아무개는 공부 잘 하는데 너는 왜 못 하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공부 아주 못 한 것도 아니요 공부 그런대로 했는데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부모의 말 중에 어떤 말이 제일 듣기 싫으냐?" 하는 항목에서 늘 1, 2위를 차지하는 대답이 바로 "부모가 나와 남을 비교할 때"입니다. 저만 듣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다 그런 모양입니다. 왜 꼭 남과 비교해서 말해냐 하냐? 그냥 "너 공부 좀 열심히 해라" 하면 안 되냐? 비교는 정말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서 똑같은 말을 저희 아이들에게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누구는 공부 잘 하는데, 누구는 부모 말씀 잘 듣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고 있더군요. 아이들이 뻔히 싫어할 것 알면서도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이런 비교 안 하십니까? 이런 말 좋아할 자녀가 하나도 없다는데도 왜 굳이 말을 그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나쁜 습관들 중에 하나가 바로 남과 나를 늘 비교하는 것입니다. 물론 비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남과 나를 비교함으로 "저 사람 참 잘 한다, 내가 저 사람처럼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내가 아직 저 사람보다 너무 부족하다, 내가 더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발전을 위해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저 사람에 비해 나는 너무 못났다"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참 불행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고 그 사람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저 사람은 도대체 좋은 면이 하나도 없다. 참 몹쓸 사람이다. 저런 쓸모없는 사람이 뭐 하려고 태어났나 싶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나름대로 좋은 면이 있고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에 장점 하나도 없고 쓸모 하나도 없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전혀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길 때 일어납니다. 남을 함부로 무시해도 문제지만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장점과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을 무시하고 깎아내리고 비관하고 "나 같은 게 왜 사나? 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만의 장점,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더 발전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소중히 여기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비교하지 말라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진 은사 부러워할 시간에 네 자신이 가진 은사를 더 개발해라." 참 중요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도 나온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나름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지요? 한 개도 안 준 종은 없습니다. 달란트는 당시 로마의 화폐단위지만 이 말이 나중에  '탤런트'(talent)가 되어 '재주, 재능, 은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성도들에게 나름대로 은사를 주셨고 누구든지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은사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만 은사의 종류와 숫자는 다를 뿐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줄 때 어떤 기준으로 다섯 개, 두 개, 한 개를 주었느냐? 25장 15절에 '재능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 이 '재능대로'라는 번역이 조금 아쉽습니다. 이 '재능'이라는 말이 원어에는 '능력, 역량'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차라리 "능력에 따라 다르게 나누어 주었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뻔 했습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각자 다르게 나누어 주었듯이 오늘 하나님도 우리 성도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은사를 주시고, 또 은사를 여러 개 주기도 하고 적게 주시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자꾸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이런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왜 저 사람은 은사를 저렇게 많이 받았는데 나는 조금밖에 못 받았나?" "왜 저 사람은 저런 은사를 받았는데 나는 저 은사를 안 주셨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노래를 잘 하고 찬양을 너무 잘 한다면 그게 은사입니까?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숨 쉬는 것이나 말 하는 것을 은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노래 잘 하게 하셨고, 어떤 사람은 봉사 잘 하게 하셨고, 또 어떤 사람은 손님 대접 잘 하게 만드셨습니다. 각자 받은 은사가 다르고 종류가 다른데 우리는 자꾸 남의 은사 부러워하며 그 은사 못 받았다고 아쉬워하다 세월 다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은사 부러워할 시간에 내 은사가 뭔지 발견해서 그 은사를 더 개발하고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은사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은사는 남이 뭘 받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뭘 받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를 찾아 잘 개발해서 그것으로 하나님 영광 위해 잘 사용하면 은사가 어떤 종류냐 몇 가지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교하지 말고 나만의 은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바랍니다.

사명을 비교하지 말라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받은 사명보다 내가 받은 사명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남이 받은 사명이 뭔지 궁금해 하고, 그 사람 받은 사명이 너무 좋아보여서 상대적으로 내가 받은 사명은 너무 초라해 보이고, 별 볼 일 없어 보인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1장을 가지고 이런 복음성가를 만들었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참 좋은 노래지요. 이 가사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실망해서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밤새도록 애써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제자들은 또 실망합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제자들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말대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아주 많이 잡는데 바로 그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이 맨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고 하자 베드로가 맨 먼저 바다에 뛰어듭니다. 이 장면에서 두 제자의 다른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요한은 여성적이고 애교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 있던 제자입니다. 그만큼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제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제자답게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야! 저기 예수님이다"라며 말만 하지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성격을 금방 아시겠지요? 애교스럽고 섬세하지만 결단력이나 용기가 부족한 타입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좀 섬세함이 떨어지고 조심성이 없지만 우직하며 언제나 행동이 앞서는 성격이라 제자들 중에서도 늘 앞장서서 반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말을 듣고 솔선수범 가장 먼저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자 그 자리에서 예수와 제자들끼리 만찬이 벌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난 흥겨운 만찬의 자리였습니다. 한데 이제 만찬이 끝난 후에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세 번 다 말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그래서 세 번 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은 까닭은 아마도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셔서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배반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는 절망감에 빠진 이 제자를 격려해서 주님의 양을 치고 먹이는 목양의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그 다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운명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18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젊을 때는 베드로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지만 늙어서는 그 팔을 벌리게 되고 남이 베드로에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다음 19절에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이 말은 베드로가 말년에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팔 벌리고 죽게 된다는, 순교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대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 예언을 믿음으로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베드로의 마음속에 이런 결심이 섰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이 몹쓸 인간을, 이 못난 제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용서하고 품어주시고 사명까지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 위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순교도 좋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여러분, 사람이 감격을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 특히 아랫사람에게 시킬 때 억지로 시키면 하긴 하겠지만 그리 열심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그를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감격시키면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목숨까지 바치려 들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법을 잘 아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20절을 보니 이 때 베드로의 마음속에 한 가지 너무 궁금한 일이 생겼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보니 지금 예수님 곁에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가 있는데 그 요한이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나를 보고 순교를 당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요한이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도 자기가 주님의 신뢰를 많이 받은 것도 알지만 요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아주 각별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라도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순교를 당한다고 치고, 그럼 저 예수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친구는 어떻게 될까? 저 친구도 나처럼 순교할까? 아니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우리의 사랑 많고 친절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야, 요한이는 이렇게 될 거야" 하고 대답해 주시지 않고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내가 요한을 순교하게 하든, 아니면 재림 때까지 살게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잔말 말고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참 야박하시다, 섭섭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유다를 제외한 11명은 다 순교를 당했다고 전설이 내려오는데 유독 요한만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에베소에서 90세 넘도록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그렇게 요한만 아끼고 살려두면서 베드로에게는 순교를 강요하는 그런 야박한 분일까요? 예수님이 편애하신 것일까요? 아니요. 오히려 주님이 섬세하고 치밀하게 제자들을 사용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특성과 성격을 아시고 각각 거기 맞는 일과 미래를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재능과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른 달란트의 분량을 준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도 다 나름대로 성격이 다르고 재능도 다른데 주님은 그것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너무도 정확하게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도 분명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좀 우직한 성격을 가졌고 어떤 때는 행동이 너무 앞서는 경향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하고 오늘 본문에서도 누구보다 먼저 물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늘 제자들의 대장 역할을 한 맏아들처럼 듬직한 제자였습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즉시 울며 회개하는 그런 순수하고 우직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냐"고 물은 뒤 주님의 양을 치고 먹이는 목자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목자를 잃고 갈길 몰라 방황할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입니다. 목자의 사명은 늘 양보다 먼저 앞에 서서 이끄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이 늘 앞장서서 일하면서도 함부로 가벼이 굴거나 경거망동하지 않고 듬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이런 우직한 사람은 양을 치다가 박해가 오면 피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 맡기신 양떼를 돌보다가 순교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요한의 성품은 어떤가요? 물론 형 야고보와 함께 불같은 성격을 가져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지만 실제 그의 성품은 차분하고 애교 있는 성격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몸으로 뛰고 밖에서 하는 일보다 차분하게 앉아서 글 쓰고 공부하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요한은 자기 성품대로 수명을 다 누리면서 차분하게 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비교가 아닌 사명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많은 성도가 있지만 각기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 다 다르고, 맡은 사명이 다르고, 가야 할 길도 다르게 정해져 있습니다. 각자 자기 성격과 능력에 따라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날 새벽 베드로는 한 가지 실수를 했습니다. 그저 주님이 자기에게 맞게 맡기신 사명에만 집중하고 충성하면 될 것을 공연히 남의 일에 신경을 쓴 것입니다. 물론 남의 일에 전혀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일에는 잘 집중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도 제대로 감당 못 하면서 공연히 남과 나의 사명을 비교하며 저 사람 사명이 더 좋아 보인다고, 더 귀해 보인다며 실망하고 섭섭해 하고, 불평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교회는 어떻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는 직분대로 각기 맡은 사명이 다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권사는, 집사는, 성도는 다 그 나름대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또 같은 직분이라도 그 사람의 성격과 감당할 수 있는 분량에 따라 주님은 각자의 고유한 사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교회의 구성원 각자가 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깨닫고 충성할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바로 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각자의 사명에 충성할 시간에 괜히 남과 나를 비교하고, 공연히 남이 그 일 잘하고 있는지 신경 쓰고 저것밖에 못하나 흉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될 것입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자기 일 하나라도 더하는 것이 낫지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특별히 실망한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고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나를 따라 십자가 지고 고난의 길을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얘야, 나는 너의 성격과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안단다. 그래서 너에게 꼭 맞는 일을 시키려고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나의 길을 따라오너라. 비교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비교하지 않는다. 나에게 너희들 하나하나는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단다. 너희들 각자는 모두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너희 하나하나의 결단이 모여 큰일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나는 똑똑하고 대단한 한 명을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너희 하나하나의 결단과 순종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 다른 은사와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와 사명이 모이고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하도록 하셨습니다. 비교가 아닌 사명입니다. 이 나만의 사명을 발견하고 잘 감당할 때 우리의 참된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명을 발견하고 잘 감당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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