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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넴 여인과 바알살리사 사람 (왕하 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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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 여인과 바알살리사 사람 (왕하 4:8-44)

  요즘 모 방송국에서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받는 사례의 액수를 트집 잡아서 교회 전체를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해당 교회의 교인들이 결정하고 기꺼해 드리고 있는 사례를 헌금 한 푼도 하지 않는 자기네들이 도대체 무슨 상관할 바라고 그러는지, 또 목사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행법에 따른 지극히 합법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탈세나 저지르고 있는 범법자처럼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실정만을 반복해 왔던 현정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비판도 없이 '권력의 시녀' 노릇만 하던 그 방송국이 목사와 기독교가 이 나라에 무슨 해를 끼치고 있다고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있는지 그 저의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목사들을 양성해내는 신학교 역시 그런 취급을 받기 일쑤입니다.

  걸핏하면 '무인가(無認可) 신학교' 운운 하면서 신학교라는 것을 마치 이 사회에 아무 필요 없는 군더더기쯤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교인들에게까지도 목사와 신학교에 대하여 이와 같은 냉소적인 자세가 은연중에 습관화되어 버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원래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시고 선지학교들을 세워 주셨을 때, 이들과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과의 관계가 그처럼 부담스럽고 냉랭하게 되도록 하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일부 진실하지 못한 목사와 영적으로 부실한 신학교가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 때문에 이런 무분별한 비판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적어도 교회와 신자들 사이에서 만성적인 풍토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본을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참된 선지자와 진리의 선지학교, 그리고 신실한 성도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그 특별한 관계는, 오늘날 우리들 역시 신앙생활하는 중에 반드시 체험할 수 있어야만 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총회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며 헌금하는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뜻 깊은 주일에 우리는 엘리사와 그의 선지학교, 그리고 이름도 없는 두 명의 성도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아름다운 관계를 함께 되새기어 보면서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하여서도 꼭 같이 누리게 되는 은총으로 삼고자 합니다.

  1. 참된 목사를 모심으로써 성도는 은혜로운 예배생활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넴의 한 여인이 체험했던 사실이었습니다.
  본문 8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8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 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9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갈멜산에 주로 거하고 있었던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의 별궁이 있던 이스르엘에 자주 다녀오곤 했는데, 바로 그 도중에 수넴이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 살던 "한 귀한 여인" 즉 당시의 상류사회에 속했던 한 여인이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로 알아보았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를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란 뜻으로서, 이 표현이 구약에서 선지자에게 적용된 사례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즉 그 수넴 여인은 자기 동네를 자주 지나가는 엘리사였지만 결코 대수롭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택하신 특별한 사람'인 줄로 깨달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엘리사를 어찌하든지 정성껏 대접하고 모시고자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동네를 지나갈 때마다 한 끼 식사 대접해 드리곤 하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그것만 가지고서는 마음에 차지 않아서 아예 엘리사가 머물 수 있는 방을 하나 따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여기 본문에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라고 되어 있는 것은 '벽이 있는 다락방을 짓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하여튼 방뿐 아니라 그 안에 휴식과 말씀 연구에 필요한 가구까지 다 갖추어 두는 등, 이 여인이 엘리사를 섬기는 마음은 참으로 극진했던 것입니다.

  이 수넴의 여인이 그처럼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정성껏 대접했을 때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까?
  1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우선 그녀는 평생소원이던 자식을 얻게 되었고, 또 나중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었을 때에도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 다시 살려냄을 받았습니다.
  이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대접함으로써 얻게 되었던 축복에 대해서 우리는 대체로 이것만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축복 한 가지를 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내내 누리고 있었습니다.

  18절부터 23절에 보면 "18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19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21그 어미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22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컨대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23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수넴 여인의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었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는 않고서 자기 혼자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가려고 "한 사환과 한 나귀"를 쓰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편은 "오늘이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왜 당신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려 하느냐?"고 궁금해 했습니다.
  우리는 이 남편의 말을 통하여, 이 수넴 여인이 평소에 매월 초하루와 매주 안식일마다 엘리사에게 나아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그랬겠습니까?
  바로 그 '초하루'와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율법에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인도하는 가운데 이런 성일들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북조 이스라엘은 초대 임금이었던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를 여전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즉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종교가 판을 치고 정통 레위인 출신이 아닌 가짜 제사장들이 난무하던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들은 나라에서 임명한 제사장들의 소위 예배란 것에 도무지 참석할 수가 없었으며 그 대신에 소수의 참된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정기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넴 여인도 바로 그런 온전한 예배생활을 엘리사 선지자를 만남으로써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진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초하루와 안식일'이 올 때마다 그 엘리사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그녀가 아들 하나 얻었던 것보다는 사실상 훨씬 더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은혜로운 예배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성도가 참된 주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별로 특별한 복처럼 여겨지지 않고 그저 당연해 보이는 것 같은 일이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교인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예배를 통하여 은혜 받기는커녕 자기 교회 목사 얼굴만 보아도 오히려 시험이 들게 되는 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 대부분의 경우가 목사가 경건생활에서 부덕하거나 금전 문제에 있어서 깨끗하지 못할 때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나타나야 할 목사가 그런 삯군 짓만 하고 있으면 그런 목사 밑에 있는 양들은 얼마나 불쌍한 것이겠습니까?

  여러분들 역시 목사를 대할 때 바로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사가 얼마나 여러분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지 그 여부에 따라서, 혹은 여러분 인생의 여러 가지 고민과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해 주는지 그 능력을 따져서 그 목사의 좋고 나쁨을 따져서는 아니 됩니다.
  교역자들이 여러분의 교회 밖에서의 삶에 대하여 많이 도와주는 까닭에 그 고마움 갚는 셈치고 주일날 예배에 참석해 주는 것이라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도록 이끄는 사명을 받은 자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예배를 통하여 받는 은혜가 얼마나 좋고 큰 축복인지를 교인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단의 총회에서 세계 각지에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있지만, 특히 특정지역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구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이런 지역에는 이제야 자유롭게 신앙생활할 수 있는 길이 조금씩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선교지역의 교회들에서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분위기는 마치 초대교회의 모습과도 같이 뜨거운 은혜로 충만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그 동안 지하교회에서 평신도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제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며 축복의 기도의 손을 들고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를 직접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선교지의 교인들이 선교목사 한 분을 맞이하고 모시게 되는 감격과 기쁨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주변에 흔한 것이 '제발 우리교회에 나와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목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교인들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성도들만 참된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통하여 은혜로운 예배생활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며 월정헌금과 오늘 같은 주일의 특별헌금을 통하여 후원하는 것이 바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이처럼 큰 축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참된 목사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워서 보내는 정말 소중한 사명임을 다시금 깨닫고 더욱 정성과 힘을 함께 모으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른 신학교를 후원함으로써 성도는 보람된 봉사생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까 수넴의 여인도 무명(無名)이었지만 이것 역시 문자 그대로 이름 없는 한 성도가 엘리사의 선지학교를 통하여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38절로 41절에 기록하기를 "38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고 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에 혼합주의의 이단 신학과 가짜 제사장들이 판을 치는 가운데 엘리사는 참된 선지자들을 양성해 낼 신학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바로 자신이 선지학교 하나를 설립했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 학교는 재정적으로 무척 운영이 어려웠습니다.
  소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가해 준 신학교'도 아니었으며, 아무 교단적인 지원은 물론이요 후원 교회 하나 제대로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들외"란 오렌지 비슷한 색깔과 크기의 열매였는데 맛도 쓰고 또 복통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생도 한 사람이 우연히 이것을 따왔을 때에, 워낙 먹을 것이 없었던지라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즉 과연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 가려 볼 여유도 없이 그저 솥에 썰어 넣어 국을 끓였습니다.
  그리고 다들 둘러앉아 그 국을 먹으려고 맛을 보니 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선지생도들이 얼마나 상심했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이름도 모르는 열매를 가지고 무슨 야챗국을 끓여서 그것을 식사라고 먹으려 했는데 그것마저 못 먹을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도와주셨습니다.
  비록 엘리사가 그 솥에 가루를 넣도록 했지만 물론 그 가루 자체가 무슨 효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에 의하여 그 국의 독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에서 나타나듯이 이 엘리사의 선지학교란 학생들의 식사 한 끼도 변변히 제공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진짜 '보따리 신학교'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렵게 운영되고 있던 그 신학교에 어느 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2절부터 44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바알살리사"라는 곳에 살던 어느 무명의 성도가 이 '보따리 신학교'에 뜻하지 않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라고 했습니다.
  산과 들에서 아무 것이나 캐어서 근근이 연명하던 그 선지생도들에게 정말 오랜만에 '진짜 식사'가 될 것을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처음 익은 식물'이란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지소산의 처음 얻은 것들을 제사장들에게 갖다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지자들을 대접하거나 선지학교를 후원할 자유도 있었지만, 율법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대로 적어도 토지의 첫 소산만큼은 무조건 제사장에게 '소제'로 바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알살리사에서 온 사람은 그 특별한 예물을 제사장에게 바치지 않고 이 엘리사의 선지학교로 가져왔으니 일견 아주 엉뚱한 행동이었고 사실 불법적인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의 행동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북조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 금송아지 숭배자들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직함은 제사장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율법에서 명하는 바 토지의 첫 소산을 갖다 바치도록 되어 있는 진짜 제사장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이 무명의 성도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예물을 바로 이 엘리사의 선지학교, 즉 그가 알기로는 진짜 선지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학교이며 그래서 제사장이 받아야 할 예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확신되는 이 학교로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백 명이나 되는 선지생도들에게 그 예물은 비록 양적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적은 것도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이 가져 왔던 식물을 통하여서도 또 한 번 발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의 '들외'로 끓인 국의 경우에는 그 '질'을 변화시켜 주신 능력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양'을 증폭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그 선지생도들은 "먹고 남을" 정도로 배부르게 식사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식물은 그 선지생도들에게 단순히 '영양가'로서만 힘을 준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 격려'의 힘 또한 얼마나 크게 더해 주었겠습니까?
  금송아지 모셔 놓고 제사장 노릇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후원자가 되어 주고 있었지만,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전하고자 공부하고 있던 그 선지생도들은 산골짜기 구석에서 건물 하나 제대로 없는 학교에 모여 있었습니다.
  소위 국가에서 인정해 주는 거짓 제사장들은 날마다 호의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야챗국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바로 그때 어느 한 성도가 '원래 제사장에게 드리게 되어 있는 예물'을 가지고 이들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높은 사람들과 불신사회는 이들을 '별 볼일 없는 학교'로 여기고 냉대하고 있을 때, 그런 자기네들을 '토지의 첫 소산의 제물'을 받을 자격 있는 참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로 인정해 주면서 그 특별한 예물을 들고 찾아온 성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선지 생도들이 그가 가져온 보리떡과 채소를 먹으면서 얼마나 사기가 충천했겠습니까?
  그 무명의 성도가 이 가난하고 이름 없던 엘리사의 선지학교를 찾아와서 그런 정성어린 성별의 예물을 드렸을 때, 그 작은 봉사는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학교 간판만 달고 있으면 다 같은 신학교인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송아지 우상숭배하는 제사장'들만 배출해 내는 신학교들이 수두룩합니다.
  학교 재정이 넉넉하고 교수들의 경력이 찬란하고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는 것이 바른 신학교의 조건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이지 오늘날의 교인들도 저 '바알살리사의 성도'처럼 과연 어느 신학교가 정말 제대로 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을 양성하고 있는 바른 선지학교인지를 똑바로 분별할 줄 아는 영지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물론 고려신학교가 '유일한' 바른 신학교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 고려신학교가 여러분들께서 힘을 모아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여 물질로 후원할 때 정말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진짜 선지학교 중에 하나인 것만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고려신학교만큼 이 나라의 '금송아지 숭배자' 곧 이단 기독교와 천주교를 철저히 비판하고 배격하면서 오직 개혁주의 신앙만을 줄기차게 외치는 신학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려신학교 역시 처음 시작될 때에는 여지없는 '보따리 신학교'였지만 그때부터도 숨은 무명 성도들의 정성스러운 후원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는 가운데 이제까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를 지었을 뿐 아니라, 다른 신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전학생 무료 숙식'을 제공하면서 오직 경건과 학문의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지교회들이 매년 교회 예산의 3퍼센트를 고려신학교 후원금으로 내고 또한 고려신학교 후원회까지 조직하여 개인적으로 월정후원헌금과 특별후원헌금을 바쳐서 이처럼 진리에 정통하고 영적으로 경건한 바른 신학교를 섬기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특권이며 보람된 봉사임을 깨닫고 더욱 힘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앞의 열왕기하 2장 23절부터 25절에 기록된 말씀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벧엘"을 지나갈 때 "젊은 아이들"이 그를 보고 "대머리여 올라가라(꺼져라)"고 "조롱"해 오자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뭐, 철없는 아이들이 놀렸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저주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나?'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모욕당한 분을 참지 못해서 저지른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 '벧엘'은 바로 북조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자연히 그 동네 사람들은 평소부터 엘리사와 같은 참된 선지자를 깔보고 멸시하고 있었으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이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엘리사 선지자는 사사로운 분풀이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처럼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도록 만들고 있었던 그 동네 전체의 불신앙, 어른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독하는 그 벧엘 사회 전체의 죄를 두고 저주했던 것이며, 그래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했던 것이었습니다.
  참된 선지자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바로 그 선지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직접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며, 그런 개인이나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북조 이스라엘 사회의 절대다수가 바로 그런 영적 암흑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이 두 무명의 성도들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과 바른 선지학교를 섬기면서 이처럼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가짜 목사'들이 판을 치고 '이단 신학교'가 오히려 문교부 인가라는 딱지를 자랑스레 내세우는 그 혼란의 와중 속에서도, 그 이름 없는 한 주부는 참된 선지자를 섬기며 은혜로운 예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그 보잘 것 없는 한 촌부는 바른 선지학교를 찾아가서 그의 정성된 예물을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벧엘 사회'는 여전히 목사를 조롱하고 신학교를 경시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비록 극소수이지만 오직 '수넴의 여인'과 '바알살리사의 농부' 같은 성도들이 있는 까닭에 목사들은 강단에 설 용기를 얻게 되며 신학생들은 격려와 지원을 받으면서 경건과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흔해 보이고 신학교가 많은 것 같아도 그 중에서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과 '바른 선지학교'는 분명히 따로 있으며,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지(靈知) 역시 이 나라의 일천 만 기독교인이라 해서 아무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역시 참된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당신의 종들을 섬기며 바른 신학교를 돕게 하실 것이며 또한 이를 통하여 그 자신들 역시 영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받아 누리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세워 주신 말씀의 사자들과 또한 여러분이 함께 기도하며 후원하고 있는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이처럼 은혜로운 예배생활과 보람된 봉사생활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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