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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하기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일 (행 1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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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기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일 (행 13:5-12)
   
    세상 사람들은 왜 쉽게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물론 믿는 사람들도 많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 반발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적으로 복음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들어봐야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복음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미션스쿨에 다니고 또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열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저도 다 파악하지 못합니다마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열일곱 살이 되어서 그때에야 복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배웠습니다. 왜 인간이 죄인이고, 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고,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을 쉽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설득력 있게 들은 것이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교회 밖에도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 안에도, 교회를 다녀본 사람들 중에도 복음을 배워야 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전도가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일단 그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압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 낚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기본적으로 가장 심플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나를 따라오면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마음이 준비되지 않아서 안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렴풋이 압니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데 그럴 각오가 돼 있지 않은 경우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분들 중에도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분들에게 ‘세례를 받지 그러십니까?’라고 여쭤보면 ‘아직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사실 피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지레 피상적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을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무엇을 금지하는 게 아닐까 하고 지레 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나는 술, 담배를 하기 때문에 교회를 못 다닙니다.’라고 말씀하는 분들, 성경 어디에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른 어떤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도 성경이 말하고 있지도 않은 술,담배를 가장 우선적인 예수 믿는 사람들의 표시라고 생각하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 믿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교인들도 있지만 그것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언제까지 비본질적인 것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이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서로 말하고 그것을 비교하고 남의 눈치를 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중심의 문제이고 결국은 그 마음의 문제이고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주님의 말씀을 좇는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성경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그냥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 믿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안 믿어진다고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고, 믿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믿어지고 또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믿어지는 것이 축복이고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축복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교인들에게 기도를 권면해도 여러분 스스로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기도를 할 것이 아닙니까. 스스로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야 신앙생활이 즐거운 것이지 그런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면 강요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이라는 것이 있고 그 영혼이 숨 쉬는 것이 기도입니다. 영혼이 자라나는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만약 이러한 갈급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영혼이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든 섬김이든 봉사를 강조하기 이전에 먼저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먼저 거듭나서 영혼이 살아나야 그때부터 영혼이 숨쉬기 시작하고 말씀의 젖을 사모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신앙이 자라날 수 있는 것인데 목회자는 안 믿는 사람에게 믿게 하는 역할도 있지만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그런 의지가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나와 계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기독교 잡지를 보니까 ‘록키’라는 영화로 유명한 실베스터 스탤론이라는 배우가 있지요. 그분이 크리스천이더라고요. 저는 그것을 보고 놀랐는데 최근에 만든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에서 그의 신앙을 반영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세상에는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실베스터 스탤론도 이제 와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고 옛날부터 믿기는 믿었는데 방황하다가 인생의 바닥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돌아온 경우입니다.

  우리가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경우도 있지만 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는 뒤돌아서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더 이상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돌아설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탕자에게는 기근이 축복이었습니다. 기근이 없었다면 탕자는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기근이 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들에 나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것이 악하냐, 왜 그것이 죄인가를 말하기에 앞서서 탕자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키고 사람 스스로를 천하게 부끄럽게 만듭니다. 기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올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기근이 사람의 자존심을 깨뜨립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다. 어린 아이도 그렇고 어른도 그렇습니다.

  제가 LA에서 청소년 사역을 할 때 금요일 저녁마다 집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교회의 벤을 몰고 학생들을 픽업해서 교회에 데리고 와서 집회를 하고 다시 벤으로 집으로 데려다 줍니다. 하루는 데리고 오는 학생들 중에 사춘기 나이의 여학생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교회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어느 남자 대학생이 자기 스포츠카로 대기하고 있다가 이 두 여학생을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거예요. 제가 그것을 보고 화가 나 벤을 몰고 쫓아갔습니다. 그래서 그 차 앞에 벤을 대고 길을 막고 내려서 그 두 여학생보고 나오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제 이 두 여학생을 데리고 교회로 가서 종아리를 걷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필요하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목회자이기 전에 아버지와 같은 인물로서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회초리로 때리려고 하는데 한 학생은 맞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빌면서 울더라고요. 다시는 그런 거 안하겠다고 잘못했다고 비는데 한 학생은 때리려면 때려라 그런 눈으로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아, 같은 사람이지만 이렇게 차이가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가 벌써 이십년 전이니까 그 학생들이 지금은 엄마가 됐을 텐데 지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지 참 궁금합니다.

  사람은 이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쉽게 자기가 잘못했다고 빌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는 사람이 있고 때리려면 때려봐라 이렇게 버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목사인 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대로 하나님에게 합니다. 사람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하나님께는 친절할 것 같습니까.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 같습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 것을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에게 할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먼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거창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작은 일에서 형제자매를 섬기고 작은 일에 충성하고 그러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대중을 향해서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시중들고 가서 누구를 데리고 와라, 뭐 해라, 이것부터 하면서 순종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고 또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한번 설교했더니 삼천 명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스케줄이 타이트했기 때문에 일들이 빨리 빨리 진행된 면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빨리 진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금방 사람들이 성장하고 큰일을 맡게 되고 사도직을 맡게 됐지만 이제는 세상이 좀 더 복잡해지고 변화가 많고 그러다보니까 우리가 똑같은 신앙의 교육을 배우는 것이 더 오래 걸리고 더 많은 걸림돌이 있고 또 새로운 지혜를 요구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옛날보다 더 식견을 넓혀야 될 필요가 있고 좀 더 인생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고 사람들의 욕망과 그들의 동기와 생각과 형편과 처지를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서로의 형편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한민국, 나가서 글로벌 시대에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같은 서울에도 사람들 생각이 다르고 또 그들의 사는 환경이 다르다보니까 이제는 더 많이 접해보고 공부하고 또 경험을 쌓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이 시대에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사람들이 쉽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내면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대비되는 다른 생각, 다른 사상을 품고 있어서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문명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충돌입니다. 옛날에는 충돌을 일으킬 만큼 가치관이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집안에서도 여러 가지 가치관을 가진 가족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옛날 베트남전 시대에 한 집에 형은 월남군 군인으로 복무하고 동생은 베트콩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침에 형제가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형은 월남군에 출근하고 동생은 베트콩으로 출근했다, 한 집안 안에도 이렇게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고 평생 주일학교를 다니던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엉뚱한 생각을 접하고 엉뚱한 생각을 좇아가서 교회를 떠나가고 신앙을 버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즉 그 아이들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파워풀 한 것을 접하게 되니까 믿음을 버리고 그것을 좇아가는 경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더 파워풀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위 영적인 대결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본문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첫째는 사도바울,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있었지요. 둘째는 서기오 바울이라는 로마 총독이고 세 번째는 바예수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인 바울과 거짓 선지자인 바예수 간에 영적인 대결이 이루어지는데 그들의 대결은 누가 이 로마 총독의 마음을 주장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이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를 두고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와 바울이 영적인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영적인 대결을 벌여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는 자가 진짜 선지자요 진짜 하나님이라고 불의 대결을 벌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불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누구의 신앙이 진짜이고 누구의 철학이 진리이냐를 놓고 그 중간에 서기오 바울이라는 로마 총독이 있는데 그는 복음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러다 복음을 들으려고 했는데 그 옆에 있던 거짓 선지자 즉 8절 말씀에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그러니까 이것은 그저 의견이 다른 것, 다원주의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같고 존중해야 된다는 내용이 아니고 이 거짓 선지자는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힘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현실이에요. 복음을 듣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준비되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믿고 싶지 않아서 안 믿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영적인 가치관의 혼동 속에서 믿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무엇인가가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냥 점잖게 권고하고 대화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처럼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파워풀하게 어둠의 권세를 대적하고 영적인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저희 교인들 또 사역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것입니다. 학식도 있고 교양도 있고 마음도 착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영적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좀 더 터프하고 와일드한 면을 소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을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착한 심성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으로 거친 영혼들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영적인 와일드한 파워를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을 보세요. 그가 이 거짓 선지자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10절에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고 친절한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하게 하시는 말씀이고 그리고 상황을 바르게 판단한 것입니다. 지금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어둠의 권세가 진리를 굽히려고 하고 하나님의 길을 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영적인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여러분의 가족이 믿음을 거부하는 것을 존중하고 지켜보시겠습니까? 언제까지 그것을 묵인하겠습니까?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이것이 진짜 기독교입니다. 이 초대교회의 신앙이 진짜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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