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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다 나은 의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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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의 (마 5:17-20)

오늘도 오늘 이 예배 공간에 성령의 감동하심이 크게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제 3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생애와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며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과정과 이런 믿음의 성숙함이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 모두에게 느껴지고 경험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면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강조하셨듯이, 그에게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큰 사랑과 자비함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은 그들을 품어주셨습니다. 사회적인 죄인의 자리에 있었던 세리들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피해주며 못살게 하는 강도까지도, 심지어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그 여인마저도 주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시고 품으시며 큰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큰 사랑과 흉내낼 수 없는 큰 자비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꼭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보면서는 노하시며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지독히 미워하셨던 것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불의함, 그들의 잘못된 Life style, 이런 것들을 주님께서 심하게 책망하셔서 바르게 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례적으로 그들을 더 혹독히 책망하시며, 어떤 때는 저주하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고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 어떤 사람들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이었던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잘못된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나중에 바리새주의, Pharisaism 이라는 단어를 만들게 되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바리새주의라고 하는 이것이 오늘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바리새주의, 율법주의, 형식화 되어버린 신앙, 책망받을 수 밖에 없는 신앙의 모습이 내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깨닫고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는가?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 오늘도 열심을 가지고 주일을 지키며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예배뿐만 아니라 일주일동안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고, 주일 예배 외에도 많은 예배시간이 있고 또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해야할 많은 일들이 있는데, 여러분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혹시 그 일들이 짐으로 느껴진 적은 없으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하는 이것들이 내게 짐으로 느껴진 적은 없는가. 왜냐하면, 오늘 지적받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그들이 율법신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Pharisaism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에 매이게 되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말하는 것이거든요. 근데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출애굽해주신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복되게 살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을 출애굽 시키고 난 후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 십계명이요, 그 십계명을 근거로 한 많은 율법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구원 받은 감격과 은혜로서 지켜야할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들은 그것들을 율법적인 사고로 하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잊어버리고, 그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기쁨도 감격도 다 사라지고 그저 내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되겠다. 이것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신앙의 행위 이 예배를 비롯하여, 예물을 드리는 것이나,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나, 또는 교회 밖을 향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이 모든 일들을 합하여 모든 신앙의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복을 받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내게 주어진 구원의 감격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신앙 생활을 구원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우리가 드리는 신앙은 부처님 앞에 복을 빌고 절을 하는 것과 산신령에게 절을 하고 복을 비는 것은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하여 예배하고 빌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격하여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리고 주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예배하는 여러분의 예배하는 표정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억지로 복을 받기 위하여 억지로 절을 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냥 날씨 춥다고 방안에 앉아서 TV보고 있을 수 없어서 주의 전을 향해 달려 나오는 그런 감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입장할 때, 양쪽 날개는 텅텅비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도사님들이 앞에 앉으라고 기를 쓰고 안내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해서 앞에 앉으라고 할 것도 없이, 교회가 꽉 차고 자리가 없으면 자기가 앞에 오지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자리가 없으면 억지로 안내할 것 없이 다 앉기 위해서 자리 찾아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일부러 억지로 일찍 오십시오. 제 시간 맞춰오십시오. 광고를 자꾸 하자고 해도 제가 안하는 이유는 예배가 감격스럽고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빨리 오겠지요. 그래서 예배가 감격스럽고 교인들이 성숙하면 일찍 오라고 하지 않아도 일찍 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요. 세월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0년이 가까워도 그렇게 안되네요. 유감스럽기는 합니다. 그래서 제 목회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생각을 합니다. 세월이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늦게 오는 사람이 1/3이니 예배의 감격은 전혀 없는 것이고, 자리를 안내하지 않아도 빈자리가 없어서 정신없이 일찍와서 가방을 들고 뛰다시피 와서 다 앞자리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며 20년을 목회해도 아직도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이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복을 받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1년 믿고, 10년 믿고, 20년 믿고, 30년 믿고, 40년 믿고, 50년 믿고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속에 있는 감격과 기쁨은 사라지고 겉모양 껍데기, 형식만 우리에게 남는 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책망하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Pharisaism,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내 신앙생활 속에도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성경은 20절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오늘 17-19절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은 율법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요즘말로 하면 한단계 Upgrade, 오늘 성경 표현대로 말하면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러 왔다’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읽진 않았지만, 20절 이하의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6반제라고 하는 율법에 나와있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거듭 반복하시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들이 20절 뒤에 계속 나오게 됩니다.

‘성내지 말아라’ ‘음욕을 품지 말아라’ ‘이혼하지 말아라’ ‘맹세하지 말아라’ ‘보복하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율법에 나와있는 이것들이 겉모양 뿐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재해석하여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결코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더 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소위 Pharisaism, 형식만 남아있는 그들의 내용이 무엇일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되겠는데, 많이 얘기할 수 없고 간추려 3가지만 얘기한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가,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지식을 의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많은 무식한 대중들이 율법의 내용 조차도 다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율법을 알고 있는 것이 의로운 것, 곧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요즘의 여러분 속에도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믿음이 좋은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좋은 믿음으로 가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좋은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여서 교회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이 곧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Pharisaism, 형식주의에 있는, 율법주의에 있는 이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좋은 믿음인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내 마음 속에도 그런 믿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 그것이 마치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찬송을 많이 알고 남보다 찬송을 잘하면 그것이 좋은 신앙인것. 아닙니다. 그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구제하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에 대한, 신앙생활에 대한 외식에 대한 것입니다. 외식, 밖에 나가 식사를 자주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겉모양을 치장하려는, 겉모양만 있는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을 많이 말씀하고 계시는데, 오늘 뒷부분에 보면 기도에 대하여, 금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금식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라. 그리고 기도에 전념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얼굴을 흉하게 하지말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요즘말로 말하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지 말고 말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

구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심지어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주의 사람들은 작은 구제를 함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먼저 알리고 사람들에게로부터 인정받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에도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오지, 복음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거나 선교하는 일에 있어서 미국 다음으로 가는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자세히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교를 해도, 복음을 전해도 내 얼굴, 내 교회가 드러나지 않으면 안합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돈을 많이, 예를 들면 요즘 개척교회를 해도 조그마한 지하교회 돈 몇 천만원들여서 교회를 해도 교인들 잘 안갑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꼭 필요한 새로운 도시나 새로운 자리에 교회가 필요하면 교회가 제대로 시설을 갖춘 교회여야 하고 시설을 갖춘 교회로써 교회교육도 잘 이루어져야 아이들을 데리고 교인들이 갑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많이 듭니다. 한 교회가 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교회가 돈을 모으고 모으고 모아서 수억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면, 교회가 금방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교회로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내 이름, 우리 교회 이름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합니다. 선교사를 보내도 우리교회 단독으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합니다. 개척교회를 저 전라남도 산골짝 구석 구석 어디다 해도 우리교회가 우리교회가 개척교회를 하면 뒤에 우리교회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교회는 한 번도 안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기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으면 선한 구제도 하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와 한국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 번째로 그들은 공을 세워서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잘못된 것들이 사함받고 용서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돈을 다 뺏기고 얻어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도왔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지적하려고 하는 포인트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진정한 이웃이냐’ 이것이 그 이야기의 포인트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난 그 사람을 때리지도 않았고, 돈을 뺏지도 않았고, 난 강도질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강도한 사람보다는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하는 소위 행위에 강조를 두게 되면 소극적인 의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우리는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다. 율법을 앞에 놓고, 우리는 살인을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간음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해서 나는 깨끗하다.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시는 것은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동안에는 회개도 없고 그리고 상대적인 의에 머물러가지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런 것은 있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정치인들의 비리를 보거나 재산을 보거나 다 보면 나는 저들보다는 낫다. 나는 저 사람들보다는 깨끗하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그런 소극적인 의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기도의 모습중에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니다. 저 구석에는 세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앞자리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여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신앙생활이 거듭되면 거듭될 수록 많은 세월 동안 똑같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겉모습만 남게되는 경우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아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많은 시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보다 많은 율법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보다 시간을 더 많이 주님을 위하여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들 보다 더 경건한 모습,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의가 저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저 구석에서 고백하였던 세리처럼 기도한다면 남을 입에 올릴 것도 남을 비난 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바로 이 말 한마디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 이런 믿음으로 출발하면 남을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 내가 죄인인데, 내가 죄인인데 누구를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인에게 많은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인데,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누구를 비난하며,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프리스트’ 라고 하는 자그마한 소설책이 있습니다. ‘프리스트’라는 말은 신부님, 사제를 말하는데, 어떤 젊은 신부 한 분이, 신부로 생활을 하면서 결국 탈선하여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본인은 그것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며 거기에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동역자들도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주교도 그를 향하여 직접적으로 나가 죽으라고까지 저주하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고 따르던 많은 교인들마저도 얼굴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 때 오직 두 사람만이 그 젊은 신부를 마음 속으로 그를 이해하며 따뜻한 얼굴로 바라봅니다. 오직 두 사람, 한 사람은 드러난 그 젊은 신부와 똑같은 죄를 지었던 신부입니다. 그러나 그 신부도 자기를 드러내고 그 젊은 신부의 편을 들 수 없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의 얼굴이 밝은 얼굴로 실수하고 죄 지은 신부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 뒷자리에 있는 아주 불행한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과 같은 그런 많은 죄와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외면당하며 소외당한 한 죄 많은 고통당하고 있는 여인이, 그의 얼굴도 환한 얼굴로 실수하여 파문당하기 일보직전인 그 젊은 신부를 이해하며 환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우리는 주님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우리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내가 죄인의 몸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하실 주님 나를 용서하신 구원의 주님 나를 사죄하시면 내 죄를 사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의 말씀 그 성경의 말씀을 아멘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죄의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감격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말씀을 다시 시작한다면 이런 감격과 은혜의 기쁨 안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율법주의 바리새주의에 빠지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 받으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되어지는 사랑과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반복하면서 결코 Pharisaism 이런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무리 열심히 주일 거룩한 모습으로 나와 예배드린다고 하여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진정한 감격과 감사가 없는 형식만 남아있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보다 더 나은 의, 그 의를 그 믿음을 간직하게 될 때, 주님께서 영접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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