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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정을 회복합시다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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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회복합시다 (계 3:14-22)

오늘은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궐기했던 3·1운동을 기념하는 주일로 올해 89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는 장엄한 말로 낭독된 이 독립선언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국에 만세 삼창 소리가 퍼지던 그때를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그 위대한 선배들 앞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숙이는 중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때만해도 우리 민족은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영남, 호남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하는 세대간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이라는 계층 간의 갈등도 없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보면 기독교에서 16명, 천도교에서 15명, 불교에서 2명이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그들은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도 너와 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 자신의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됩니다.

옛날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무식했지만 순수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한겨울 추위에도 수십 리, 심지어 수백 리를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온 밤을 새우고 금식했습니다. 말씀대로 성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금연금주 운동을 펼치고, 유혹이 와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신앙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조국의 무너짐 앞에 양식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자주 독립을 위해 거리, 거리를 뛰쳐나가 총을 맞아가며 칼에 찔리면서도 그들의 가슴 안에 있는 태극기를 휘 날리며 자유를 외쳤습니다.

김구 선생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삼천리를 피로 물들여 내일의 희망을 열었던 3.1절도 이제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세대간, 계층간, 이념간의 갈등이 사회곳곳에 옹이처럼 박혀 우리를 가슴앓이 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나라의 갈등은 국민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몇해 전인가요. 여론조사에서 희망 없이 산다고 대답한 사람이 열에 일곱이고, 20대의 80%가 취업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으며,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민을 가고 싶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요즘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눈물이 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하는데 마치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능력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영적인 갈급함과 영적 전투의 긴장감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였는데,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30년 전만 하더라도 교회마다 성인 출석보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출석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더 많이 출석하는 교회가 거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쾌락의 해일에 휩쓸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참상을 드러내는 것도 교회가 영적인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누가 이 기막힌 현실을 책임져야 합니까? 저는 교회가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이고, 이 나라의 중심문화가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고 이어서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인데 우리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절대적 믿음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삶이 우리의 인생 취임식의 메인 이벤트였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들어설 정부를 보아도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내정자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국무위원 내정자가 거의 다 신앙인들입니다. 지도자들이 지금의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세대간에 날카로운 대립을 하고 있는 이 현실을 놓고 먼저 가슴을 쳐야합니다. 뭐, 우리 역시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예수 믿는 우리가 먼저 가슴을 쳐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옷을 찢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 한 가지는 '병원 가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잘 안 갑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가 돼야 겨우 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병을 키우고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왕왕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건강을 위해 미리 기도하고, 미리 건강 진단을 받습니다. 혹시 병이 생겨도 적절한 처방과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건강도 잘 관리할 수 있고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미리미리 진단하고 치유해서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영적 상태 진단과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나와 있지만, 특히 요한계시록 2장-3장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거기 보면 주후 1세기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당시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일곱(7)은 완전수입니다. 꼭 카운트해서 7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대표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당시에 실재하던 일곱 교회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대표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오늘 이 사대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 내용이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과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면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고, 혹 문제가 있으면 치유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편지'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열심이 식어진 것'입니다. 식어진 가슴!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요 우리교회의 문제요, 저와 여러분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각자 영적 상태를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차마 입에 담기에 거북스러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먼저 15-16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現 터키)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1세기 당시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지요, 상공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금융업, 양모업, 의약업 등 3대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7 km 지점에 히에라볼리(Hielapolis)라는 온천지대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온천수는 아주 뜨거운데,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7 km 오는 동안 식어져서 미지근해졌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인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라오디게아는 아주 풍요로운 곳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보면 육신의 향락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곳도 그랬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안타깝게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는 아주 풍요롭고 평안했지만, 영적으로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병들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할수록 안타까운데, 인간이 참 이상합니다. 풍요롭고 평안해지면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더욱 겸손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교만해지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영국의 평론가·역사학자인 토마스 칼라일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역경을 견뎌 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 정말 이 말처럼 개인을 봐도 그렇고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 중에 신앙을 잘 지키다가도 풍요로워지고 번영하게 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회는 교회를 유혹하지만, 유혹에 빠진 교회처럼 처절하게 버림받는 경우도 없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될수록 세속적인 사회는 천박한 동료의식으로 교회를 반길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2000여 년 전에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세속화된 교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고하셨습니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금권과 권력에 취했을 때 4세기의 교부였던 히에로니무스는 “교회의 벽은 금으로 번쩍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하시고 죽어가고 있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여러분, 유럽의 역사가 바로 그 증거 아닙니까? 과거 유럽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까? 그 거대한 교회당들이 다 그때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교회당들이 텅텅 비고 관광명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온 땅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갈수록 우리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신적인 통찰력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십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뜨겁지도) 않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 ” 16절에도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 ” 마치 라오디게아의 ‘식어진 온천수’와 같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차갑다는 것은 아예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뜨겁다는 것은 예수님을 철저히 믿는, 정체성이 분명한 신앙 상태를 가리킵니다. 불행하게도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겉으로는 믿는 신자 같은데, 실제로는 불신자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을 가리켜 흔히 ‘명목상의 교인'이라 부릅니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향락도 좋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면 좋다는 식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는 겁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모르고 오히려 자기는 신앙생활을 꽤나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적 교만과 무지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정 능력만 있으면 우리는 그에게 아직도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사는 열정을 상실하고, 열정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자신의 현실 자체를 직면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인생을 다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인생 최후의 비극은 자신을 돌아 볼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돈이 많으니까 영혼도 풍요로운 줄 아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한 금’ 즉 온전한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진짜 부요함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보면 부유해서 남 보기 번듯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곤고하고 공허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흰옷’은 비싼 양털 옷을 입고 뽐내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얻은 의의 옷(칭의)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영적으로 벌거벗은 겁니다. 그런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약’은 라오디게아에 의과대학이 있고 거기서 조제하는 안약이 아주 좋았다고 하는데, 이것을 풍자한 표현입니다. 육안이 아무리 밝아도 믿음이 없으면 영적 소경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믿고 영적인 눈을 뜨라는 겁니다. 그리고 영적인 진리를 깨닫고, 천국을 바라보며 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열심이란 말은 헬라어 ‘제스토스’(ζεστοs ‘뜨거운’)에서 유래합니다. 즉, 회개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전남 광양에 가면 우리나라의 가장 큰 제철소 가운데 하나인 광양 제철소가 있습니다. 그 규모가 여의도 4배가되고, 순 이익이 연간 2조고, 6시그마 운동으로 유리알처럼 투명한 경영을 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제철소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제철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강석을 녹이는 고로입니다. 이 고로는 한번 불을 붙이면 고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불을 끄지 않습니다. 약 15년 간 하루 24시간 계속 불을 붙인다는 것입니다. 한번 불을 끄면 고로 안의 녹던 철강석이 굳어서 폭탄으로도 잘 처리가 안 된답니다. 그래서 24시간 3교대로 15년 간 계속 쉬지 않고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로의 불이 제철소의 심장이 아니겠습니까? 이 불이 꺼지면 고로도 못 쓸 뿐 아니라 제철소도 all stop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두 예외 없이 마음의 고로에 불이 붙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위해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주를 위해 드릴 만한 자세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런 각오 앞엔 때로 희생을 감수해야하고, 불이익의 문제도 일어 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실 만큼 나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셔서 죄로 오염된 나를, 저주와 사망의 줄을 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때는 그만한 기대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러분,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이 바로 마음 문입니다. 열고 싶을 때 열리지 않습니다.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는 것이 마음의 문입니다. 주님 앞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고장이 났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열지 말아야 할 때는 또 얼마나 잘 열립니까? 근심과 염려, 자존심 상하는 말이 들어오면 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들어와서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셔야 합니다. 들어와야 할 말은 문 밖에서 사정을 해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들어오지 말아야 할 말은 들어와 나가려 해도 못 나가게 문을 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속에는 늘 근심, 걱정, 자존심 상하는 마음만 가득 채워져 있어 부글부글 끓습니다. 온천물처럼 부글부글 끓고 마음속이 편안하지 않으니까 얼굴이 오만상 다 찡그려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 끝나고 안내를 해 보면 나갈 때도 무슨 야단맞고 나가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 지은 사람처럼 인사합니다. 은혜가 넘치면 '할렐루야' 이렇게 나가면 되는데 참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윌리엄 홀만 헌트의 성화 '세상의 빛'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분들이 한번쯤 보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문밖에서 등불을 들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주변에 담쟁이덩굴과 잡초들이 무성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고 죄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강제로 요구하지 않으므로 나 자신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는 겁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을 따르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회개하고 열심을 내면 어떻게 해주신다고 했습니까?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측근'이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세상에서 조금 높은 사람의 측근만 되어도 거들먹거리는데, 예수님의 측근이 된다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세상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맞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시고 그리스도의 열정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될 겁니다. “만일 지역사회의 교회가 다 없어진다면, 그 교회의 신자들 외에 교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밥 로버츠의 「T-라이프」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메시지는 너무도 두려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자기반성은 자기성찰을 넘어 열정의 회복과 거룩한 꿈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모세의 120년 인생을 보십시오. 그는 처음 40년을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 생각하며 살았고 그 다음 40년은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삶이었습니다. 모세는 화려했던 왕궁의 겉옷 속에 감춰진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보는 진정한 자기반성을 경험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위대함은 겸손한 자기반성을 넘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의 회복과 거룩한 꿈의 실현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귀한 아들, 딸이란다.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단다. 나는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단다. 결단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단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곧 들어오셔서 교제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으시는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리신 십자가의 주님 붙잡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정을 가지고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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