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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래의 나를 보시고 계십니다 (요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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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나를 보시고 계십니다 (요 13:36~38)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사람을 대하는 가치기준은 시대를 따라 변하고 장소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기에 세상 기준으로만 사람을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 이천에서 냉동창고 화재로 중국교포가 여럿이 죽었습니다. 그때 중국에서 이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죽더라도 한국에서 죽어야 한다.” 보상금이 2억이 넘으니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중국에서 죽으면 그런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나라는 후진국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대하는 가치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가족계획협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 협회에서 만든 표어를 살펴보면 사람을 대하는 가치의 변천사를 한눈에 살펴보게 됩니다.
1960년대는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였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에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에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4년도에 가족계획 표어를 모집했는데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로 바뀌었답니다. 이 표어가 대상이랍니다.
그리고 금상은 “한 자녀보다는 둘, 둘보단 셋이 더 행복하답니다.”이고 은상은 “하나의 촛불보다 여러 개의 촛불이 더 밝습니다.” 이고 동상은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라고 정했답니다. 우리 교인 중에 이 표어를 들어야 할 사람이 여러명 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변합니다. 언제는 낳지 말라고 난리이더니 이제는 낳는게 복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다르고 성공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변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평가 할 때 무엇을 보고 평가하십니까?
예를 들어 사윗감을 놓고 선을 보려 할 때 제일 먼저 살펴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 직업이 뭐냐? 가정이 어떤 가정이냐? 부모의 직업이냐 배경이 어떠냐? 학력 수준이 어떠냐? 돈은 얼마나 갖고 있느냐? 좀 더 물어 본다면 키는 얼마냐? 형제는 몇이냐?
대체로 이런 것을 먼저 살펴보고 만날 것이냐? 안 만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뭐죠?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의 사람 됨됨이와 꿈입니다. 아무리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인격이 잘못되어 있으면 안 되고 꿈이 없다면 그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려면 만나봐야 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꿈과 비전, 사람의 됨됨이는 사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 이력서를 통해서는 사람의 인격과 비전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을 제자들을 택할 때 꼭 만나서 부르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찬을 하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의 발도 씻기면서 마치 먼 거리를 떠나는 사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분위기가 이상하니 다들 속으로 걱정을 하면서도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해 베드로가 나섭니다.
“주님 어디를 가십니까?”
그때 주님이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따라서 합시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저는 이 한 구절이 제 가슴속에 비수처럼 박혔습니다.
이 한 구절 속에 주님의 하나님의 사람을 바라보는 원리가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1. 지금 현재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사에 들어갈 때 이력서를 내 보셨나요? 이력서는 뭘 보자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떤가를 보겠다는 것이지요. 과거를 보면 현재를 볼 수 있고 현재를 보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속을 가능성이 제일 많은 것이 이력서입니다.
아직도 사람을 뽑으실 때 이력서를 의존하여 사람을 뽑습니까? 빨리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다릅니다. 우리의 이력서를 보지 않고도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우리 사람은 과거와 현재 밖에 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현재만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먼 미래를 내다보십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 선택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90% 이상이 북쪽 갈릴리 지방 출신이고 그것도 절반이상은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그것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일에는 학식이 좀 있고 배경이 좀 든든한 사람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절반은 어부요, 또 그 당시 매국노처럼 취급했던 세리도 끼여 있고, 열심당원이나 로마 정권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하나 만나보고 뽑으셨습니다. 이력서 받아서 뽑은 사람 없습니다.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그들일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업이나 학력, 재력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만약 그런 것으로 제자들을 뽑고 사람을 차별하셨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직업이나 학력, 그리고 과거나 현재보다는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의 현재는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는 허풍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는 죽음의 두려움이 닥치면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는 모습이 베드로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알면서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망하거나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를 안고 가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허풍쟁이 베드로를 본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 목숨 내걸고 복음을 전할 위대한 사도 베드로를 미리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우리를 바라볼 때 현재의 우리만을 바라보지 말고 미래의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베드로의 그 허풍만을 보고 버리지 않으신 주님!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이 대하십니다.
때로는 “주를 위해 죽겠나이다.” 큰소리 뻥뻥 치면서도 때로는 주일도 구별할 줄 모르고 돈에 눈이 뒤집혀 세상으로 달려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때로는 마치 자기가 아니면 하나님 일이 안되는 것처럼 건방을 떱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식도 그렇습니다. 현재만 보면 속 터집니다. 현재만 보면 뭐가 될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만 붙들려 있기만 하면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자녀들을 현재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미래를 내다보시고 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 자녀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가르치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를 저주하지 마세요. “그 꼬라지로 뭐가 될래?” 하지 마세요.
“주님이 너를 들어 쓰실 것이다.” “주님은 너를 사랑하신단다.” “너에게는 엄청난 사명이 있단다.”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들어 쓰실 거란다.”
이런 말로 격려하고 소망을 갖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 자녀를 들어 쓰실 것을 바라보면 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2. 주님이 만들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나중에는 따라 오리라" 하신 말씀은 "현재는 안 되지만 내가 너를 만들어 쓸 때는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나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습니다. 지금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들어 세우시고 훈련시켜 위대한 종으로 만드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변화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주님 부인하고 지옥 갈 수 있나요? 그거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 안 믿고 살 수 있나요? 그것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믿었고 내가 구원 받았다고요? 천만에요.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셨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분의 약속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주님처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이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일하고 계십니다. 결국은 위대한 나를 만들어 들어 쓰실 날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기업이나 조직은 만들어진 존재를 들어 쓰려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교, 대학 들어가려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것으로 차별치 않고 누구든지 주를 따르면 만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도 만들어 쓰셨습니다. 아브라함 생애 초창기를 보세요. 형편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하고 빼앗기기도 합니다. 기근이 닥친다고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 가기도하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까지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아버지의 마음과 코드가 맞을 때까지 훈련시킵니다. 모리아 산의 번제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 사건 중에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이 구절은 그제서 알았다가 아니고 이제 네가 훈련을 마쳤다하는 "합격증"입니다.
 
모세도 40년 동안 만들어 쓰십니다. 요셉도 13년 동안 만들어 쓰십니다.
베드로도 만들어 쓰십니다. 그의 과실을 보세요. 덤벙댑니다. 그래서 물위로 걷기도 합니다. 실수투성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소리도 듣습니다. 혈기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군병 ‘말고’를 향해 칼을 빼서 휘둘러 귀를 베기도 합니다. 언제나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주님은 그런 것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을 때 한번 책망하십니다.
마가복음14:37~38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베드로 같이 실수투성이고 작심삼일이고 의지와 행동이 불일치되는 형편없는 우리지만 그러기에 ‘공사 중’입니다. 완전 작품이 아닌 ‘공사 중’입니다.
옆 사람에게 말하세요. /나는 아직 공사 중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공사 중인 미완성 작품이지만, 그래서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 지금도 순간순간 들어 쓰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한 그때만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이 모습으로도 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더 능력 있고 더 크게 쓰시기 위해 우리를 다향하게 훈련시키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무엇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나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훈련시킬까요? 세 가지 방법입니다.

1)말씀을 통한 믿음훈련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부도낼 줄 알면서도 말씀으로 교훈합니다.
누가복음 22:32에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십니다. 실수 했을지라도 돌이켜 큰일을 할 것이라고 권면하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찾아오셔서 말씀을 상대해 주시고 “내양을 치라”고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의 교훈이 그의 믿음을 세워 간것입니다.

2)성령을 통한 능력 훈련입니다.

오순절에 주님은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를 무장 시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함께 함으로 죽음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가치관을 변화시켜 줍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는 능력을 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 그때마다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기록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말씀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억하며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의 깨닫게 하심 때문입니다. 

3)사랑과 용서를 통한 섬김 훈련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짓을 한 베드로를 용서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찾아오셔서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사랑과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는 양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힘든 환경 속에 있습니까? 뭔가 어렵고 안 풀이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이 세 가지 과목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험과목은 떨어지면 계속 재수합니다. 합격할 때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이후로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복만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워도 일어서시고 실패해도 일어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혹독한 훈련을 하시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수했어도 낙심하지 마세요. 세 번 부인 했어도 도망가 자살한 가롯 유다보다는 낫습니다. ‘부인한 놈’ ‘도망간 놈’ ‘책임지고 자살한 놈’ 어느 놈이 가장 낫습니까? 비록 순간에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부인을 했을지라도 끝까지 버티고 남은 베드로를 들어 쓰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하나요? 현재의 꼬라지만 보고 과거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능하심과 나를 지극히 사랑하심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현재의 모습 속에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현재의 모습 속에서는 소망이 없어 보이나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장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믿음의 주요 나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시기룰 바랍니다. 그러면 소망이 있고 그러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현재만 바라보고 일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미래를 내다보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나의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주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을 모습을 바라보시고 일어서기를 축원합니다.

내 미래의 어떤 모습을 얼마만큼 내다보느냐가 능력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람을 대하시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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