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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상승과 하강 (창 3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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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상승과 하강(창33:12~20)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특히 예수 믿고 자녀 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 중에 시34:10 보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이 있고, 마7:11에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시때때로 시련이 닥쳐오고, 환란과 궁핍으로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넘치도록 주고 싶어 하신다면서 왜 그런 걸까요? 하나님이 약속을 펑크 내신 건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 성숙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소원은 우리 신앙의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에게까지’ 성숙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맏형님으로 모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되 신앙을 성숙하게 해가면서 주십니다. 괜히 신앙이 미숙한데 많이 주시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면 오히려 아이를 버리기 때문에 부모가 조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 신앙의 상승을 체크하면서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또 신앙이 성숙해지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 이렇게 신앙이 계속 상승하면서 넘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요? 우리 신앙이 상승(上昇)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강(下降)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에 기복(起伏 ups and downs)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앙이 상승하다가도 갑자기 신앙이 곤두박질을 치며 하강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슬럼프’(slump)라고 부르죠. 그렇습니다! 신앙에도 슬럼프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하나님이 몹시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잠시 은혜를 거두거나 시련을 주시면서 다시 신앙이 상승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이 등장합니다. 그의 생애를 관찰해 보면, 신앙의 상승과 하강의 연속 과정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신앙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적절하게 은혜를 베푸시고, 시련도 주시면서 그의 신앙이 상승하도록 유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잘 살펴보면서 부디 타산지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최대한 신앙의 기복을 줄이고, 꾸준히 신앙의 상승곡선을 그림으로써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 신앙의 상승 : 벧엘과 얍복나루

야곱의 생애 가운데 신앙이 상승한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과 얍복나루에서 밤새 천사와 씨름하며 기도한 사건 등이 있습니다.

① 벧엘 :

야곱은 출생 당시부터 욕심이 많고 간교한 사람이었습니다. 쌍둥이 형제로 출생하는데, 형 에서가 먼저 나가니까 뒤에서 발뒤꿈치를 잡고 추월하려고 기를 쓴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둘째로 태어나니까, 그 후에는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한번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시장해서 못 견뎌 하는 형 에서를 속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삽니다.(창25:27~34 참조) 또 한번은 에서가 사냥하러 나간 사이에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야곱은 봇짐 하나 짊어지고 정든 고향을 떠나 외가댁이 있는 밧단아람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한참 도망가다가 지친 에곱은 빈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듭니다.(창세기 28장) 그러다 꿈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서 있는데, 그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 어디로 가든지 보호하겠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야곱이 너무 놀라서 잠이 깹니다. 창28:16 말씀이죠.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났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신앙이 있었지만, 그저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신앙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대인들이 대개 그랬듯이 ‘지방 신’(local god)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방 신 사상은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가면 지배하는 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서 벗어났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는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명명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신앙 고백인 셈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신앙이 급상승합니다. 그래서 담대한 마음으로 밧단아람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라반이 얼마나 간교한지 야곱 못지않았습니다. 품삯도 제대로 주지 않고 얼마나 알뜰하게 부려먹는지 정말 고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고 인내합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처신합니다. 결국 20년 만에 대가족을 이루고 거부가 됩니다. 밧단아람의 축복은 벧엘에서 그의 신앙이 상승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앙의 상승과 더불어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② 얍복나루 :

2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나안 땅에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지시를 받은 야곱은 결단했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걱정스런 소식이 들려옵니다. 20년 전의 원한을 풀지 못한 에서가 사병 4백 명을 데리고 만나러 온다는 겁니다. 옛날 도망칠 때는 단신이었습니다. 죽어도 혼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가족에 재산도 많으니 더욱 불안했습니다.

그는 요단강의 지류인 얍복강 나루에서 불안한 밤을 보냅니다. 그때 야곱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해 주는 구절이 창32:7입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 ” 한 마디로 죽을 맛이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아무 방법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야곱은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혹시 자객인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실은 천사였습니다. 그는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환도뼈)이 어긋나고 말았는데, 이제는 정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겁니다. 그러자 사력을 다해 기도했고, 결국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천사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줍니다.(창32:24~32 참조) ‘야곱’은 무슨 뜻입니까? ‘발뒤꿈치를 잡은 자’ 혹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져 주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물이 약합니다. 인간의 탄식 소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큰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감격 가운데 그곳 이름을 ’브니엘‘로 명명합니다. 브니엘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신앙의 상승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오히려 신앙이 상승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상승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창세기 33장을 보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에서와 상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히 20년 전 원한을 갚겠다고 살기등등하게 오던 에서가 어떻게 나옵니까? 창33:4 말씀을 보면 뭐라고 되어 있나요?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완전히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죠? 과거의 모든 원한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고 야단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불안에 떨며 두려워했었는데, 단숨에 모든 게 해결된 겁니다. 심지어 에서는 오랜만에 가나안 땅에 돌아온 야곱에게 가이드를 자청합니다. 물론 야곱은 지혜롭게 사양하고 따로 행동하죠. 그 내용 오늘 본문 12절~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상승하면 우리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한 순간에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먹구름이 끼고, 비가 쏟아지고 기상 조건이 나쁠 때 비행기가 이륙합니다. 계속 고도를 높여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되죠? 구름도 비도 없는 청명한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에게 다가가 신앙이 상승하면, ‘영적 고도’를 높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꼭 명심하고 무슨 문제를 당하든지 다른 데 가서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고 신앙의 상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신앙의 하강 : 숙곳과 세겜

야곱의 이야기가 여기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위기 가운데 신앙이 상승하고, 신앙이 상승하자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시고, 문제가 해결되고 ... 이젠 걱정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다음 순간 야곱의 신앙이 다시 하강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 일행에게서 떠나 세일로 가버린 후 어디로 갑니까? 숙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겜으로 가서 정착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그는 숙곳으로 가서 집을 짓고 우리간도 짓고 재미있게 삽니다. 또 18절~19절을 보면 세겜이 더 좋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옮겨 갑니다.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숙곳에서 세겜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예 땅을 삽니다. 19절에 ‘크시타’는 화폐단위인데, 1크시타는 양 한 마리 정도 살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는 1백 크시타를 주고 땅을 샀습니다. 얼마나 넓은 땅인지 모르지만 상당한 면적으로 짐작됩니다. 이렇게 세겜에 정착한 야곱은 제단을 쌓습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말이죠. 그 제단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얼른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세겜에 정착해서 안전하게 평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제법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신앙생활을 그럴 듯하게 해도 진실한 신앙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흔히 우리는 외적으로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어야 문제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위험한 문제는 영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야곱에 밧단아람에서 20년 지낸 후 가나안을 향해 떠나올 때 하나님이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벧엘입니다. 또 그 이전에 그가 들판에서 돌베개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스스로 뭐라고 서원했었나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면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 잘 섬기고 성전 짓고 십일조 하고 ... 그렇게 서원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서원한 겁니다.(창28:20~22 참조) 그러므로 당연히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왜 벧엘로 가지 않고 숙곳을 거쳐 세겜으로 갔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방심했고, 세상적인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① 방심 :

안타깝게도 야곱은 큰 위기를 넘긴 후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젠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심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얍복나루에서 눈물콧물 흘리며 기도했던 그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급강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앙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다시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게 많은 사람들의 병입니다. 물론 위기 가운데 야곱이 마음 졸이고 힘들었을 테니까 몸도 마음도 휴식을 취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숫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벧엘로 갔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방심한 나머지 세겜에 들어가 세속에 파묻혔고, 급기야 그곳에서 큰 시험을 당하고 맙니다.(창세기 34장)

이런 예는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이 성 전투의 실패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이 다음 순서로 아이 성 정복에 나섭니다. 여리고 성은 철옹성인데 비해 아이 성은 작은 성입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도 정복했는데 이까짓 것 하고 방심했습니다. 자기들 실력으로 승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했건만 착각한 것이죠. 그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소수만 참전합니다. 식은 죽 먹기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여러분, 방심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프로야구 감동 중에 명장으로 꼽히는 김성근 감독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선수들에게 방심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잘 조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방심이나 자만심이 성공의 가장 큰 적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승리한 날, 특히 큰 점수 차로 대승한 날은 오히려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자정까지 훈련시킨다는 겁니다. 너무 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바로 계속적인 승리의 비결이라는 겁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매달립니다.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만 하면 금세 신앙이 곤두박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상승하는 듯하다 하강하고, 상승하는 듯하다 하강하고 제자리걸음합니다. 심한 경우 퇴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경고합니까?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자전거 타기가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전거 타는 것과 꼭 같습니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혹시 너무 빨라서 속도 조절을 할 때도 페달에 발을 올려놓고 긴장 상태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멈추면 여지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② 욕심 :

야곱은 또 한 가지 세상의 욕심 때문에 세겜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욕심을 부립니다. 벧엘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계속 축복하실 텐데, 인간적으로 과욕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롯의 이야기입니다.(창세기 13장, 14장, 19장)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 로 조실부모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들처럼 돌봐 줬는데, 이젠 좀 컸다고 그를 배반하고 떠납니다. 어디로 갔죠? 소돔 성으로 갑니다. 왜 갔나요? 육신적으로 살기 좋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소돔 성의 영적 상황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창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이 구절을 보면 소돔이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운 곳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롯은 소돔에서 세상 재미를 좀 보기는 했죠.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쟁을 만나고,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유황불 심판을 만나게 됩니다. 약1:14~15 말씀 그대로입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3] 신앙의 시련 : 세겜의 환란

여러분, 야곱이 세겜에 가서 정착할 때 어떤 시험이 닥쳤습니까? 창34:1~2 보면, 무서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시내 번화가에 놀라나갔다가 세겜족 추장 아들에게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겁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가정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기가 막힙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죠. 디나의 오빠들은 디나를 연모한 세겜 가족을 속여 결혼 조건이라며 할례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수술 후 고통을 당하는 동안 학살극을 벌입니다. 큰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곱의 탄식이 창34:30에 나옵니다. “ ...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한 마디로 이제 다 죽게 됐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무서운 것은 외적인 환경과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도 모르게 신앙이 하강하는 영적인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신앙이 상승 곡선을 그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십니다. 혹시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됩니다. 반면 신앙이 하강 곡선을 그리면 겉보기에 형통해도 별 볼 일 없습니다. 오히려 위험천만합니다. 망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4] 신앙의 회복 : 엘벧엘

다행히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셔서 환란 가운데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신앙을 회복하고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라는 겁니다. 창35:1 말씀 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들은 야곱은 짐을 싸서 떠납니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창35:2 보니까 세겜에 살면서 얼마나 세속에 빠져있었는지 우상숭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경이니 큰 시험을 당하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곱이 결단하고 벧엘로 향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시 말해서, 신앙의 상승 국면으로 돌아서니까 어떻게 됩니까? 창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상하게도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방을 두렵게 만들고 추격하지 못하게 막아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안전한 곳은 벙커가 아니라 ‘하나님 품 안’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에게 피하면, 하나님을 향해 신앙이 상승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결국 야곱은 벧엘로 다시 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창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 ” 야곱이 벧엘에 가서 예배드리고 다시 명명하는데, 뭐죠?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벧엘로 올라간 야곱은 다시 신앙의 상승곡선을 그렸고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시73:27~28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가까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다른 외적인 조건들은 별 게 아닙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겁니다.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 속에 승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계속 누릴 수가 있을까요? 신앙이 상승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상승, 상승, 계속 상승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항상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은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Let us fix our eyes on Jesus”(예수님에게 눈을 고정시키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들어 항상 예수님을 주목하라는 겁니다.

또 하나님께 밀착되어야 합니다. 신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 ” 여기서 그를 의지한다는 말은 한글개역성경에는 “그에게 부종(附從)하라”고 되어 있고, 영어성경(NIV)에는 “hold fast to him”(그에게 꼭 붙어있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 앙망한다는 것은 바라본다는 것인데, 영어 성경(NIV)에서는 흥미롭게도 “ ~ hope in the LORD”(희망을 건다)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는 희망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희망을 걸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눈앞에 있는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영적 상태가 문제입니다. 신앙의 ‘고도’(高度)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느냐?” 아니면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겜에 있습니까? 아니면 벧엘에 있습니까? 만약 세겜에서 신앙의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면, 치고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신앙의 상승곡선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고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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