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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무기력한 피해의식) (수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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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무기력한 피해의식) (수 18:1-7)

우리는 여호수아 후반부에 들어와서 계속적으로 분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다른 것이 분배의 원칙, 그다음에 갈렙를 통하여 창조적인 특권의식, 요셉 자손들을 통하여 파괴적인 우월의식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무기력하게 하는 피해의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요단강 동편에서 모세에게 땅을 받은 두 지파 반을 보았습니다. 요단 동편에서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 지파, 그리고 갓지파는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길갈에서 요단 서편 땅 분배받은 유다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에브라임 지파를 보았습니다. 갈렙은 이방인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땅을 받았습니다. 고의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차지한 땅이 기름진 좋은 땅입니다.

그들은 피해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요셉 자손이 부당하게 우월의식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땅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못했지만 몹시도 불쾌했을 것입니다.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회막을 길갈에서 실로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회막을 세웠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종교 중심지가 옮겨진 것입니다. 지금 말하면 수도가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실로가 어느 지파에 속한 땅입니까?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누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속한 지파의 땅에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아직 땅도 분배받지 못했는데 좋은 땅은 자신들이 다 차지하고 수도까지 자신들의 땅에 옮겼으니 마음의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이란 내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의식입니다. 자신의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모든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왜 하필 나야?”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난 더 나은 부모님을 만나지 못한 거야?” “왜 당신은 내게 그런 짓을 했지?” “왜 나는 늘 이 모양이야!”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지?” 자기 비하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은 열등감 우울증으로 발전합니다. 피해의식에 한번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을 건설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자신은 희생자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겨 부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세상을 탓합니다. 분노하고 증오합니다. 자신만 부당하게 고통 받는다는 생각에 복수를 꿈꾸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 복수를 해주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에서 다양한 종류의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자신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일곱 지파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중단해 버린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 18:3)”

복으로 주신 땅을 지체하지 말고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비전의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을 지체하지 말고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피해의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누리지 못할 때 어떻게 그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를 교훈받고자 합니다.

1. 주어진 인생의 조건과 환경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받아들이고 취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땅을 정복하는 일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땅을 차지한 지파가 협조해 주지 않아서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정황상 피해의식 때문에 중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섯 지파에 비하여 자신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섯지파가 이미 좋은 땅을 차지하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너희들 끼리 잘 해 먹으라”라고 말하며 불평불만을 가지고 땅 차지하는 것을 중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열조에게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고 이삭과 야곱 모세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된 땅입니다(창12:7, 13:15,16; 17:8 출3:7,8 신1:25). 그 땅을 왜 차지하지 않고 지체하고 포기하느냐는 것입니다. 지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금 지체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땅을 주신 분이 여호수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인간적인 감정으로 차별하여 나누어준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열조에게 약속해 준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지파에게만 준 땅이 아니라 나머지 일곱지파에게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뭇거리지 말고 그 땅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야야 헤릅스트는 [피해의식의 심리학]에서 진정한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피해자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과거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라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부정적인 생각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이 갖는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 안의 고정관념을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고정관념이 만들어놓은 가식적인 나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주어진 환경, 달란트, 은사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일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을 최대한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차지해도 넉넉한 삶, 풍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내 공로에 대한 대가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면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그랬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벨에 대하여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고 분노를 품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피해의식의 극단적 행동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를 받고 안받고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자신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은혜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이 더 나쁘게 나가면 피해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경악케 했던 시대의 연쇄 살인범 유영철 씨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유섭 교수는 유씨가 살인마가 된 배경을 그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가난과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찾았습니다. 고통스런 가난의 상처와 아버지, 어머니, 계모, 아내, 애인한테서 버림받았던 피해의식이 공격성과 범죄행위로 표출되었다는 것입니다. 피해 의식이 심화되면 피해 망상증에 걸려 심각한 인생의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땅을 주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금그릇을 만드느냐 놋그릇을 만드느냐 질그릇을 만드느냐 나무 그릇을 만드느냐는 만드는 사람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부자집에서 태어나느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느냐? 김씨 집에서 태어나느냐? 이씨 집에서 태어나느냐? 딸로 태어나느냐? 아들로 태어나느냐?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알고 정복하여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과 환경에 있다고 해도 주님의 피값으로 산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피해의식을 오늘 말씀처럼 창조적으로 잘 극복한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피해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난 사람입니다.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아버지의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형들이 시기하여 동생을 애굽 사람에게 팔아먹어 버렸습니다. 애굽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피해의식이 있었겠습니까? 형들 때문에 이렇게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일평생 그 때를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은 청년 요셉을 유혹합니다. 단호하게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감옥에 갇혔습니다. 얼마나 피해의식이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갇혀 죄수가 된 것입니다.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오랜 세월 후에 형들을 만났습니다. 형들은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창50장 15절을 보십시오. 이 때 요셉은 울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피해의식을 가지고 복수의 칼을 갈아야 했을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는 주어진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들은 진학하고 가정 형편상 나만 진학하지 못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술자로 만들기 위해, 인내하는 아내를 만나게 하기 위해, 강한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 그랬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와 피해를 준 사람만 생각하지 말고 그 사건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피해의식을 창조적인 힘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피해의식을 가지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낭비하거나 나태하게 보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히 나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한 시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쓰임받기에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선 강도도 예수님 믿고 회개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아브라함을 75세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사고로 기자로 꿈을 펼쳐 보지 못하고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10년 동안 병상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3년 동안 무려 13개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어느 날 기차역에서 출장 가는 밀런 출판사 편집장 레이슨을 만나“한번만 읽어주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레이슨은 읽지 않았습니다. 미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만 읽어 주십시오 - 미첼올림”동일한 전보를 세 번째 보내었습니다. 드디어 그의 작품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6개월만에 100만부가 팔렸고, 미첼은 이 소설로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만약 다리가 다쳤을 때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포기했다면, 두 번째 전보를 부치고 포기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976년, 55세가 되던 해에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40살에 살인하고 도망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80살의 나이에 불러 민족 구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아합 왕에게 쫓기며 차라리 죽기를 원했던 노년의 엘리야 하나님은 그 엘리야를 찾아가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힘을 내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역을 감당하라고 합니다. 지금 포기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다 포기해 버린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라고 물어 보셨습니다. 그의 진정한 문제는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이 문제였습니다. 늘 피해의식, 패배의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인성에 홀로된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니까 초상집이 잔치 집으로 변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축제의 행렬로 변하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잠 24:16)"다고 했습니다.
"환난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에 이름으로 나는 일어 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2.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땅을 받은 다섯지파와는 달리 피해의식을 가지고 정복 사업에 소극적인 일곱 지파를 향하여 다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지파별로 3명씩을 선정하라고 합니다. 21명입니다. 가나안 정탐을 위해 보내 12명보다 많은 인원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합니까? 일어나서 그 땅을 두루 다니며 앞으로 받은 기업에 대한 지도를 그려오라고 합니다. 그들이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갈렙이 지도자인 유다 지파와 여호수아가 지도자인 요셉의 족속을 언급합니다. 그들의 땅은 제외시키라는 것입니다. 관심가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땅 보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남은 땅을 일곱부분으로 그려오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나누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려온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으로 땅으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들은 좋은 땅 가지지 못했다고 피해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레위 지파는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서 모세를 통하여 기업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마당에 이런 말씀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마다 알맞게 다양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의식을 갖지 말고 너희에게 주신 땅을 그려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인생의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전을 가지고 목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꿈이 없어집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똑같은 땅에서 출발하였지만 아브라함을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피해의식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땅만 보고 살았습니다. 롯은 아버지 어머니를 일찍 잃었습니다. 상실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삼촌인 아브라함을 따라 고향을 떠났고 아브라함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가족이 전쟁 포로로 잡혀갔고, 재산을 잃어 버렸고 소돔과 고모라가 불에 타 모든 경제적 기반을 잃어 버렸고 마침내 아내마저 자신의 눈 앞에서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얼마나 피해의식이 강했겠습니까?

요즈음 세상 사람들 말로 하면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느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비전의 사람 아브라함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소돔서 구출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자폐증적 삶을 살아 버립니다. 피해의식을 술로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결국 술의 종이 되어 더 험악한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술에 취하고 자신의 딸들과 동침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인생이 비참해져 버렸습니다.

6섯 명의 남편을 둔 수가성 여인을 보십시오. 얼마나 피해의식이 많았겠습니까? 수치심으로 낯에 밖을 나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남편을 여섯이나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해의식을 보상받기 위해 또 다른 남자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피해의식을 보상받기 위한 선택은 제대로 된 선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끝없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어느날 예수님 만났습니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생의 비전을 발견하고 메시아를 소개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 사는 사람들입니다. 피해의식의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해의식의 종이 되지 말고 인생의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피해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을 바라보고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요셉처럼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부정적인 사람은 결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전의 사람들이 결국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꿈을 품은 두바이의 한 지도자가 사막을 낙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아무런 자원이 없는 나라입니다. 빈곤과 무질서가 판치는 '곧 완전히 망할것 같은' 나라였습니다. 부존자원은 커녕 가장 기본적인 마실 물조차도 부족해서 이웃나라인 말레이시아로부터 사다 마셔야했습니다.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살고 있어 인종폭동까지 발생할 정도로 갈등과 반목이 아주 심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꿈을 품은 한 지도자에 의해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953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졸업반을 대상으로 조사했답니다. 졸업생 중 67%는 뚜렷한 목표와 비전이 없었고, 30%는 비전이 있었지만 기록해 놓지 않았으며, 오직 3%만이 자신의 비전을 기록해 놓았답니다. 그들이 졸업하고 20년이 지난 후 다시 설문 조사한 결과, 자신의 비전을 기록해 놓았던 3%의 수입이나 성공률이 비전을 기록해 놓지 않은 나머지 97%보다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 John Maxwell 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대비시켜 정의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목표를 두고 걷는 사람과 아무런 목표가 없이 걷는 사람은 그 발걸음이 다릅니다.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아무런 비전이 없이 사는 사람은 사고의 방식이 다릅니다.

오 헨리는 말하기를 "길가에 조그마한 돌 하나라도 목적이 없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목적이 있겠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삶은 선명해집니다. 목표, 소망, 비전을 갖는 것은 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유명한 슈바이쳐 박사는 "이상의 힘은 무한하다. 한 방울의 물은 무력하게 보이나 그것이 바위 틈새에 들어가 얼면 바위도 가르게 된다"고 말했고, 톨스토이는 "이상은 길잡이다. 그것이 없으면 확실한 방향이 없어진다. 방향이 없어지면 행위도 없고 생활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꿈입니다. 비전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도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바라보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세계를 품고 섬기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열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라에 대에서는 경제 부국에 대한 비전, 복지 국가에 대한 비전, 정의와 평화에 대한 비전 등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가정. 자녀 양육. 사업. 직업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을 순종함으로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지시를 받은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8절보십시오. 순종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적진입니다. 9절보십시오. 그 일을 완성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지적도를 만들기 위해 정탐에 나섰습니다. 처음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믿음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믿음으로 주어진 임무를 담대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철저한 신앙과 순종은 어려운 역경과 난관을 타개하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에 머무는 신앙인으로 끝나서는 아니됩니다. 약속을 성취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데 쓰임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입니까? 피해의식을 가지고 내가 이루는 것은 좋지 않은 땅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목표만 설정해 놓고 모험을 하지 않고 위험부담을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목표 향해 갈 때 크고 작은 장애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찰스 R. 스토너는 그의 저서 『용기의 힘』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경을 겪는다. 반가운 손님은 아니지만 역경은 언제든지 올 수 있고, 그 다음 동작을 리바운드한다. 그리고 다음 전략을 찾아보게 만든다. 그 사이 역경에 적응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런 반응들은 다음에 오게 될 도전을 극복하는 자신감을 배양시켜 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걸어갈 때 역경은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역경을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역경의 가치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인간은 30%의 긍정적인 감정, 70%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무언가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이 발달된 사람이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이 발달된 사람들입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불순종이 많은 사람들이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순종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피해의식의 종이 되면 매사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전체에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1,60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이 약속을 성취하여 누리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목입니다. 가나안을 주셨으면 그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밟아야 할 사람은 우리입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였다할지라도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할 것은 우리의 목입니다. 이 일을 하는데는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고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말씀따라 순종하고 나가다 보면 습관도 바뀌고 인격도 바뀌고 환경도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피해의식으로 인생을 처절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여럿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사사입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창녀라는 기구한 인생을 가진 여인에게서 원치않은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창녀의 자식이라고 학대받는 입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 얼마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았겠습니까? 집에서 쫓겨나 잡류들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형제들이 쫓아낸 것입니다. 서자로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집에서 쫓겨나기 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암몬 나라가 쳐들어왔습니다. 나라가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입다는 전에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인데 나라가 어려우니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해의식을 극복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결국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지도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진정 행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3)" 우리가 약국에 가면 약 처방전을 줍니다. 그 약을 줄 때 왜 처방전을 주겠습니까? 병을 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처방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그곳이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3종류의 가짜교인을 말하였습니다.

(1)말씀을 듣지않는 교인-교회에 와서 설교들 듣기는 듣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교인
(2)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인-말씀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인
(3)말씀을 듣고 인격과 생활이 변하지않는 교인-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인격의 변화가 없는 교인.

참으로 북한 주민을 비극적인 삶을 살게 만들고 김일성을 보십시오. 아버지 김형식은 기독교인만 다니는 숭실학교에 다녔고 어머니 강반석은 이름 그 자체가 보여 주듯이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장로 집안에는 강양욱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어머니는 예배당에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정말 있다고 예배당에 다니시나요?] 그러면 어머니는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흔들며[무엇이 있어 다니는 것이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 가서 뭘 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 도중에 피곤에 못이기어 모친이 조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적 교회를 다녀지만 끝내 하나님의 품에 돌아 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막스는 대학 때 성경을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스탈린은 신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 8:21)"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8)"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우리는 어떤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피해의식의 종이 되어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피해를 위해 십자가에 인간으로 참을 수 없는 피해를 당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지난 과거의 일은 어떤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피해가 지금의 나를 붙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인생을 붙들림 받아야 할 분은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용서해 주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정서적가 피해의식의 종이 되지 않도록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풍성하게 살아야 합니다.

1. 주어진 인생의 조건과 환경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받아들이고 취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을 순종함으로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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