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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섭리의 오묘함 (롬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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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섭리의 오묘함 (롬 11:33)

아시는지요.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꽃샘추위가 발목을 붙잡지만 결국은 봄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옆 사람 얼굴에 봄이 보이나 아니면 겨울인지 보십시오. 옆 사람의 얼굴에서 벚꽃이 보이면 좋겠는데, 혹시 보이십니까. 자기 얼굴에 벚꽃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 얼굴에도 벚꽃이 보입니다. 한번 이렇게 이야기 하십시오 “당신 얼굴을 보니 벚꽃도 보이고 행복 합니다”이렇게 한번 축복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로마서는 전체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1장에서 11장까지 인데 이 전반부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인 교리부분이 강조되고 있고 12장에서 16장까지의 후반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랜 날 동안 달려왔던 그 전반부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구원과 가장 큰 염려였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깨닫게 되면서 그 구원의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까지 서술해 왔던 모든 논리를 접은 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정도의 고뇌를 쏟아 놓았던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섭리, 이 모든 것이 깨달아 알아지고 정리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너무도 깊고 오묘해서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송영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야기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더 설명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비밀을 깨닫고 알게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만 경배를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의 지혜가 당신의 지식이 당신의 섭리하심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나를 향한 마음이 이렇게도 크고 넓고 깊었습니까.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깨달으면서 감탄하는 것입니다.

과연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참으로 미미한 인간이 엄청난 하나님의 세계와 마주서게 되면서 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오묘함을 깨닫게 된 바울이 감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니 그 송영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오묘함이 깊도다 입니다.

에베소서 3장 18절 19절을 통해서 사도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너희도 한번 하나님의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밀려오면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옮겨주고 싶어 흥분하게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내 안에서만 머물러 끝나지 않습니다.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넘어 또 다른 나를 향하여 반듯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깨달았는데, 그 하나님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너희도 한번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를 믿으면서 이정도의 감격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정도의 감격을 경험해 보았다면, 아니 이정도의 감격 속에 있다면 아마도 세상의 그 무엇도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 오묘함을 깨달은 사도는 내가 가지고 자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 버렸습니다. 취미 생활도 여행도,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것들, 내 안에 은혜가 밀려오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랜 날 동안 절에 다니다가 교회 오신 한 자매가 처음에 교회 오시는데 얼마나 치장을 많이 하고 오셨는지 보기에도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순간에 다 던져 버렸더라구요. “왜요”, 그랬더니 “목사님 다 부질 없더라구요”.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경험,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느낌은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어린 아이가 아비를 알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아비를 안다고 해서 그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리고 그 아버지가 계획하는 일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하나님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여 알지 못하여 이런 체험이 없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단순히 종교생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바다에 다녀와 보셨습니까. 바다에 여러 사람이 다녀왔지만 바다에 대한 체험은 다양하지 않겠습니까. 같이 바다에 갔다 왔지만 한 종류의 사람은 방파제만 거닐다 왔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대하여 얼마든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치마를 무릎자락까지 잡고 물장구를 치다 올수 있습니다. 역시 바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들어가 파도타기를 하며 두어 시간 놀다가 올 수 있습니다. 그 역시 바다에 대한 이야기 가능합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산소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바다 속 깊이에 들어갔다 나옵니다. 그 역시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모두가 함께 바다에 다녀온 사실은 맞지만, 저들 바다에 대한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야 말로 각자 다른 것이 아니겠냐는 이야기입니다.

“깊도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이 하나님의 깊이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내 생각, 내 경험, 내 느낌의 울타리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을 가지고 내가 움직여 하나님의 깊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좁디좁은 내 울타리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지식 안에, 내 경험 안에, 내 느낌 안에 말입니다. 그러하다보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오묘하고 훨씬 더 아름다운 보배들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성도들을 섬기면서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는 어릴 적부터의 경험, 지식, 이안에 갇혀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낚시꾼 이야기를 아십니까. 두 사람이 함께 낚시를 갔습니다.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는데 한사람은 실력이 있다 싶었는데 그날따라 몇 시간동안 앉아있었는데 한 마리도 낚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경질이 나는 것은 옆에 사람은 때가 되면 한 마리씩 따꽁 따공 잡아 올리는 것입니다. 나는 잡지 못하고 저 사람은 잡아 열 받았는데 더 열 받는 것은 고기만 잡으면 줄자로 재어보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 합니다. ‘왜 잡은 고기를 자꾸 놓아 주냐’고 그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합니다. 우리 집  후라이팬이 30cm인데 고기가 너무 크면 구원 먹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우습지 않은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이러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아네, 내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이 사람들이 체험했네, 아~ 이렇게 기도도 하는구나, 아~ 이렇게 예배도 하는구나’ 자신을 열어놓으면 기독교의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거든요. 그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터인데 그 하나님을 놓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의 시작은 대부분 이렇게 하나님을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지만, 열심은 내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나를 위해 하나님이 춤추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이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생각으로, 노력으로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 내내 있어졌던 16차 영적전쟁의 주제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자”입니다.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은 놀랍게도 성령님의 강력한 체험은 내가 내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알게 하고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깊이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이에 들어가는 원리에 대하여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입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깨트려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계산, 과거의 습관, 내 삶의 목적, 내가 중심이었던 이 모든 부분들을 박살을 내 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로소 언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적어도 4복음서에서는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물론 제자는 되었습니다.  물론 배와 그물을 버린 자들은 되었습니다. 물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다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마지막까지 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입니다. 결국은 자기였던 것입니다. 오른편, 왼편, 누가 큰가 키 재기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런 자기가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좋은 직장 잘 다니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하여 모든 것 접어두고 선교사로 간다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족이 죽어라 핍박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를 버릴 수 없어 눈물로 교회 나와 신앙생활 한다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 생애를 다 바쳐 사랑하려 했던 연인을 밀려오는 벅찬 감격 속에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간다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을 포기하는 것 말고, 성공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 말고, 신앙을 위해서 가족을 등지는 것 말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부인하고 너를 포기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이다 입니다. 결혼을 하여 무엇인가 배우자를 위하는 것 같지만 자식을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것 아닌가. 제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진 사람 같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든지 무슨 일이든지 결국에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가장 결정적 걸림돌은 “나”입니다. 제일 무서운 싸움의 대상은 자식도, 아내도 동업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면 어느 정도 버겁기는 하지만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은 결국은 나입니다. 우리 주변에 자기를 이기지 못하여 주저앉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국은 자기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교회 선택에 있어서도, 물론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면 더 바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교회 쇼핑을 하듯 어쩌면 내게 맞는 교회를 찾아보지만, 그것이 온전한 것일까. 아니지 않습니까. 내 울타리에 갇혀있으면 갇혀있을수록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제한하는 것 아닌가. 참 제자됨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길이에 들어가는 첫걸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비밀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몸으로 체험 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있어 광대가 되어주면 좋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에게 광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어제 우리교회 젊은 부부들의 모임인 홈 크로스 모임에 초대를 받아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부터 25절까지 읽으면서 한 남자에게 한 여자, 한 여자에게 한 남자를 붙여주심에 오묘함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에게 한 여자를 붙여주심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이 말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하나 됨의 시작은 나를 포기하는데서 시작 하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끝까지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너고 너는 나이기 보다는 너는 나고 나는 나다 이고 싶은 것입니다. 특히 여자 분들이 이 부분을 포기 않습니다. 우리 착한 남자들은 거의 다 포기했습니다.

또 하나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사람에게 또 한사람을 붙여 주실 때는 돕는 배필로 돕는 자로 만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를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사용되던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었다면 남자의 성공, 남자의 미래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여자가 조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여자의 도움으로 여자는 남자의 도움으로 아름다움을 이루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 붙여주셨다는 단어 속에서 무엇을 알아요? 그는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대신 네가 사랑해줘라 나대신 네가 돌보아 주어라 그러니까 그의 부족은 그의 단점은 네가 비방할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붙였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어제 저녁에 가장 강조하였냐 하면 하나님이 돕는 자로 일방적으로 붙여주셨으매 부부생활은 네가 내 마음에 드느냐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네 마음에 드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아멘을 안 하지만  어제 젊은 부부들 아멘 많이 했습니다. 인정했지요. 결혼에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있어 절대 중심은 내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느냐가 아니라 네 마음에 드는가. 여기에서 훈련이 되면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가에 마음이 모두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부부싸움을 하려면 당신 내 마음에 안 들어 왜 나한테 이렇게 안 해주는 거야 이렇게 싸우지 말고 미안해 내가 왜 당신마음에 안 드는지 몰라 이렇게 싸우라구요. 신앙생활도 가정생활도 밑바닥의 아름다음은 “자기를 부인하고”입니다. 가정에서 대부분의 갈등 구조가 형성됨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가 갈등구조가 형성되는 것은 대단한 진리 문제인 것 같아도 결국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구원섭리 안에서 그 오묘함을 깨닫게 된 사도는 무엇을 감탄하였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의 부요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초월적 생각으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모든 활동 중에 보여주는 신적인 능력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것입니다. 좀더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입니다.

언젠가 TV에 만화를 그리는 선생님 한분이 나왔습니다. 패널들이 큰 전지를 걸어놓고 각종 색깔 펜으로 다 이리저리 그려서 망가뜨려 놓습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다 망가진 도화지의 그림을 선이 이리 저리 이 색깔, 저 색깔 그저 그렇게 산만해진 도화지 위에 만화가가 오더니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 선을 다듬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정리된 예쁜 그림이 한 장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을 믿는다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던져질 수 있는가. 내 인생이 지금까지 내 인생의 도화지에 내가 그려 이리 저리 망가져 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까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듯 만들어 갈 수 있음입니다.

한 개인 정도가 아닙니다. 한민족 온 인류를 섭리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깊이를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이 하나님의 깊이를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사도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 로마서 강해를 들으셨지만 한나라 이스라엘의 흥망 성쇄를 통해 이루어 가셨던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생각이 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의 많은 나라들 중에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심은 그들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성경 기록을 하기 위함이며 또 하나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이스라엘 안에 온 인류의 택한 백성을 그렸으니 바로 못자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때 마다 표정은 생전 처음 들은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내 생각, 내 울타리 안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사를 잘 드린 아벨은 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요셉은 종살이 10년 감옥생활 3년을 해야 했지? 광야 40년 동안 수고한 모세를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지? 왜?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고 착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 일곱을 뽑아 그중에 스데반은 왜 집사가 되자마자 성경을 한 장 넘기기도 전에 순교했지? 하나님이 만약 이것을 하셨다면 스데반은 집사로 임명하지 말았어야 함이 아닌가? 사실은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믿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깨닫게 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 아닌가. 참 지혜의 부요 자이신 하나님과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한 사람에게 있어, 한 사건에 있어, 한 조국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언제나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전체에 반응하고 인간은 부분에 반응한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요셉의 예를 들면 우리는 요셉의 종살이 10년 감옥생활 3년만 보며 그가 시련의 날들을 지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10년 3년 정도가 아니라 긴 생애를 한눈에 보시매 13년의 그의 아픔을 보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 기간이 17년이었다고 말합니다. 한나가 얼마나 많이 울었을텐데, 아파했을텐데 왜 17년을 하나님이 두고 보셨는가. 하나님은 한나의 17년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계획하신 것입니다. 17년이 지난 후에 사무엘을 주시고 사무엘 후에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줄 계획이 하나님에게는 있었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는 사랑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이었습니다. 그때는 능력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그래서 고생만 한 것 같았는데 그것이 능력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당시에는 최고의 어리석음이었는데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십자가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때리면 맞고 끌고 가면 끌려가고 침 뱉으면 침 뱉음을 당하여 결정적으로 아바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외면도 눈 감은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가장 처절한 모습이었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내 십자가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봐, 나를 왜 이렇게 처절하게 두시지, 절망감이 밀려오지만 지나고 보면 때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도 계산하기는 힘들지만 욥에게 자식을 데려가시고 재산을 가져가고 몸이 병들게 하셨지만, 그래서 욥이 눈물로 눈물로 탄식의 날들을 보냈지만 나중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고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인간은 이렇게 지나고 난 뒤에 아는 것 아닌가. 이 비밀을 알면 하나님의 지혜를 믿어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이여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 믿기는 쉽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있다고 믿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과 지혜를 믿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습니다. 모두의 바람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것이 치료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 백부장의 기도를 들으셔서 하인도 치료하셨으니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셨으니 지금 이 병도 치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능력만 믿게 되면 이 능력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면 기도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결정을 제가 수용하기를 원합니다. 아프라고 하면 아프겠습니다. 내 바람은 회복되는 것이지만 내 바람은 더 잘사는 것이지만 내 환경이 내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지혜를 믿습니다. 무엇입니까? 나는 오늘 부분에 매여 있지만 하나님이 전체에 반응하사 오늘의 아픔까지도 가장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니 내가 오늘 당신의 결정을 수용합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이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면 시간이 지난 뒤에 그때는 사랑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이었고, 그때는 능력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능력이었고, 그때는 손해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나중에 유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종살이 10년 감옥생활 3년을 성경을 그 13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통 하였더라” 종살이 10년 감옥생활 3년은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했던 그 13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왜 울어야 하는지 왜 아파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입니다. 여기 지식은 헬라어로 그노세오스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심에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심에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고 지식은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이루어 가심입니다. 여기서 지식의 하나님은 사람의 이해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모세를, 40년간 광야에서 수고한 모세를 가나안에 들이지 않고 요단 앞에서 데려가야 하심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제사를 잘 드린 아벨을 데려가심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을 하나님이 가족과 의논하지 않고 데려가심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지식에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누군가의 눈물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두십니다. 아바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원합니다. 땀이 피가 되는 기도에도 하나님은 눈을 감아버립니다. 이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많은 사건들 앞에 당황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을 왜 망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왜 우리 남편을 데려가셨습니까. 하나님 왜 사업을 망하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서울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한 자매의 어머니가 암 병에 걸렸습니다. 산기도도 많이 다니고 늘상 기도하던 우리 가슴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청년들이 동일하게 우리가 기도하면 어머니 살아 나실거야. 날마다 그 집에 가서 철야를 했습니다. 석 달 동안, 회복되는 듯하시다가 또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기도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흥분을 시켰는데 석 달 만에 그 어머니는 가셨습니다. 기도했던 만큼이나 절망했습니다. 왜? 왜? 왜? 믿었는데..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망연자실했는데 리더였던 한 형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을 수용하자’ 지구촌에 살려달라는 사람 다 살려주면 이 지구촌이 어찌 되겠는가. 내 어머니이기에 내 남편이니까 내 가족이니까 좀더 있어줌에 바램이지만 우리의 소망 따라 주님의 원칙이 흔들린다면 어찌되겠는가 하나님의 결정을 수용하자였습니다. 슬퍼했던 만큼이나 기뻐해보자. 제 기억에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때만큼 기쁨으로 장례를 치루었던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이해는 안 됩니다.

혹시 지난주, 지지난주 두어 주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눈물로 한쪽에서 예배하던 한 성도를 기억하십니까. 차태규 집사입니다. 그의 아내 정종순 집사는 지금까지 병원에 가본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한 분이었습니다.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고, 마땅히 그는 건강해서 자유한 줄 알았는데 지지난주에 갑자기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왜이지? 중앙병원에 갔더니 1차 검사를 하며 놀라고 놀라 고대병원에 보냅니다. 영적 전쟁하는 기간 내내 한 가지 한 가지 검사하는 과정 중에 대장암 말기, 자궁암, 그리고 간암 번질대로 다 번져 의사가 손을 댈 수 없음이라고 금요일 아침에 최종결정이 났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검사하는 과정 중에 전화 온 내용입니다. ‘목사님 제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믿음이 없네요’ 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최종 결정에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놀라던 아내는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예배드리고 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만 하나님의 지혜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내리신 결정을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왜 이리 해야 하셨는가를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면 하나님만의 신비감이나 우리를 당황케 하는 일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성으로 살면 되지. 사도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 찬양과 경배를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염려했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염려에 매여 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발견하고 지식에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염려하던 이스라엘, 믿지 않아 염려하던 남편, 그들의 구원계획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 버린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여기에 판단은 결단, 결행 등의 하나님의 통치하심입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심에 나사로를 왜 천국에 가게 하셨지, 왜 부자를 지옥가게 하셨지. 인간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가지고 하며 하나님을 핑계하고 싶어집니다. 아담처럼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할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말려야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에서보다 야곱이어야 했냐고, 왜 아브라함이어야 했냐고. 하나님의 구원섭리, 왜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랑하사 구원의 문을 여시면서 왜 이스라엘을 향해서 구원의 문을 여시지 않는 것인가 안타까웠지만 깨닫고 보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들이 왜 자식의 결혼을 반대합니까. 결혼할 사람이라고 데리고 왔는데 왜 반대합니까. 자식이 사랑한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앞서 살아봤기 때문입니다. 앞서 실수를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의 생각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의견과 자식의 의견이 어긋났을 때는 확률로 보면 부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옳을 수 있습니다. 왜? 저들을 앞서 살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들은 자식보고 공부해야 한다고 합니까. 공부가 전부냐고 대드는 자식에게 말입니다. 물론 자식의 말대로 공부 잘하는 것이 전체 해답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아보니 공부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인도하시매 우리는 오늘도 쉽게 이해하기는 그 하나님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결정은 실수가 없다고 믿는가.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지만.

또 하나 사도의 찬양의 내용은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추적할 수도 없고 그의 발자취는 따라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길, 그의 이끌어 가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한 국가, 한 민족, 한 교회, 한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바다에 길이 없는 것 같은데 길이 있다 합니다. 하늘에 길이 없는 것 같은데 하늘에 길이 있다 합니다. 일반인은 모르지만 전문가는 그 길을 압니다. 그냥 바다요, 그냥 하늘인 것 같은데 길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냥 이스라엘인줄 알았는데 그냥 대한민국인줄 알았는데, 이 안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산 빛나 교회가 그냥 심겨져 안산 빛나 교회인줄 알았는데 안산 빛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 인줄 알았는데 그냥 내가 나 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깨닫고 보니 내 안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 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의 삶에 하나님의 길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삶에 하나님의 길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하나님의 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목동이지만, 지금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지만, 지금은 고기를 잡는 어부 이지만 저들에게 하나님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섭리, 하나님의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여전히 하늘인데 길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여전히 바다인데 길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은 그냥 나만의 삶 인것 같은데 내가 결정하고 내가 걷고 내가 장사하고 내가 직장 다녀 내가 사는 것 같은데 이 안에 하나님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늘에 길이 있음을 전문가가 보면 알듯이 내 인생 이안에 길이 있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걸 믿는가. 이것을 깨닫게 된 사도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사도에게 그러하셨듯 우리에게도 언제인가 우리 입술을 통해 마음껏 찬양을 받아내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아멘 합시다. 내 개인의 삶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길은 좁은 길이었고 고개 길 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졌던 하나님의 길은 좁은 길이었고 고개 길 이었습니다. 모세 광야 40년은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그냥 고생하는 것 같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성경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길이 있었구나, 다윗에게 하나님의 길이 있었구나, 우리는 그 안에서 내 삶에 하나님의 길을 믿는 것입니다.

이따 예배가 마쳐지면 우리는 유치원에서 새로이 학교에 유치원을 졸업하고 새롭게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이 자리에서 축복하려고 합니다. 학교가면서 좋아하는 아이들이지만 사실 이제부터 고생길 시작이거든요. 제가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기에 개척하고 지금까지 유치원에서 1학년 들어가는 아이들은 한 아이 한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입학하기 전 이 주간에 제가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하나님의 길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측량할 수 없지만, 지금은 울고 있지만, 지금은 아파만 하고 있지만 내 삶에 하나님의 길이 있을거야. 이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제 입속에서 맴도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내 영혼이 찬양하네’ 혹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왜이지요? 왜 이렇게 내가 험한 길을 걸어야 하지요? 왜 그 실패가 내 것이어야 하지요? 왜 그 사고가 내 것이어야 하지요? 왜 제 남편이어야 하지요? 자식이 내 맘에 들지 않는데 왜 자식이어야 하지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임을 아십니까.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에게 내 길이 있다”. 절망하던 사도는 하나님의 깊이를 깨닫고 두 손을 들어 오! 하나님 당신의 사랑이 이렇게 넓고 크셨습니까. 오! 하나님 당신의 섭리하심이 이만큼 오묘하셨습니까. 다 접고 두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사도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머리위에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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