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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십일의 축복 (신 9:9~10, 마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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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일의 축복 (신 9:9~10, 마 4:1~2)

하루라는 시간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 24시간 드라마라고 합니다. 오늘이라는 하루의 삶의 가치란 어떤 다른 날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오늘이란 하루는 내일의 이틀 분의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이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만 가치 있는 하루를 살면 어느 날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루의 가치도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40일을 가장 좋은 사람과 아무런 방해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잠시만 봐도 재미있는데, 헤어져 돌아서도 한번만 더 봤으면 하는데 40일을 본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삶이겠습니까? 40일을 하루같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 수 있다면 이런 감격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삼중고의 장애를 가지고 있던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글을 잘 아실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첫째 날에는 자신의 스승인 설리번 선생님과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저녁노을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의 해돋이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밤에 별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저녁에 시내를 밝히는 네온사인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시 암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루가 이렇게 귀하고, 사흘만 눈을 떠도 이렇게 행복할 텐데 하물며 40일은 은총이며 축복의 날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성수 즉 거룩한 숫자가 있습니다. 3이 거룩한 숫자입니다. 3은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하는 하늘의 숫자입니다. 4는 땅의 숫자입니다.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것으로 3이 하늘의 숫자인데 반해 4는 땅의 숫자입니다. 그리고 7 혹은 12를 거룩한 숫자라고 합니다. 7은 3과 4를 더한 숫자이고, 12는 3과 4를 곱한 숫자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더하고 곱했기 때문에 빈틈이 없는 만수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4의 10배인 40도 꽉 찬 숫자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40일의 7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첫째,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40일간 홍수를 만납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둘째, 모세는 40일간 금식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얼굴빛이 변화하였습니다. 셋째, 여호수아와 갈렙의 40일의 가나안 정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전을 주었습니다. 넷째, 다윗은 40일간 골리앗과 전쟁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섯째,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를 이기고도 낙담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자청하였지만 다시 일어나 40일간 걸어가서 다시 삶의 회복을 맛봅니다. 여섯째, 요나의 40일의 회개기도는 니느웨가 변화하였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후에 40일간 부활 후의 증거는 교회 설립의 중요한 사역이 되었습니다.

  이런 40일의 축복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40일은 기적의 날입니다. 내일부터 4월 10일까지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집니다. 우리도 40일 동안 기적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40일은 은총의 날입니다. 40일은 더 할 수없는 만수입니다. 우리의 최선, 최고, 최상을 주님께 드리고 받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40일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40일이 하루같이 은혜와 축복의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준비하는 40일이 축복입니다.

  신명기 9:9에는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40일을 준비하며 금식하였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보니 금식이 아니라 단식이었습니다.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식음을 전폐한 40일이었습니다.

  모세의 40일은 초인적 기다림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이런 간절함과 열정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준비에서 이미 주어집니다. 잔치를 준비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며 이미 은혜를 받습니다. 예배는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은혜를 받고 시작합니다. 하늘나라는 가기 전에 준비하면 이미 축복과 가치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준비하며 기다리는 그 자체가 의미이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란 말이 있습니다. 군사를 양육하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군사를 쓰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루 사용하기 위하여 10년을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준비는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전투에 준비된 자는 이미 반을 싸운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은 자연히 나타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기회가 오지 않지만 준비하고 있는 자에게는 시기가 문제일 뿐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준비는 그 자체가 소중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런 준비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신분이 높은 인물일수록 만나기가 힘이 듭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이런 간절함과 기다림이 없이 만날 수 없습니다. 모세가 40일을 준비하며 만난 하나님은 그 이상의 가치를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인셀은 “기다리게 하는 것은 종속의 효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보다 가치가 높다고 간주하게 됩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을 좌우하는 권한을 갖는 우위의 입장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의 가치는 우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습니다. 각색 병자들이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려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리들이 둘러싸고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까지도 예수님을 만나려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고 해도 만남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무한의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만난지 30일이 되면 축하하고, 100일이 되면 장미꽃 100송이를 보내곤 합디다. 이성 친구를 만난 지 100일도 이렇게 중요한데 하나님을 만난 40일이 얼마나 더 중요합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평생에 소중한 경험입니다. 현대는 만남이 소중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헤어지기도 잘 합니다.

  11절에는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라고 합니다. 왜 40일입니까? 이 40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필요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야 은총을 주십니다. 구약성경에는 ‘하 욤 아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야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이 40일은 완전한 시간이며 충분한 시간입니다.

  계란이 부화하기 위한 기간은 21일입니다. 오리는 28일입니다. 거위는 30일입니다. 칠면조는 28일입니다. 동물도 임신기간이 다 다릅니다. 부화기간과 임시기간이 오랜 것 같고, 힘들어도 채워야 완전하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준비와 기다림은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시간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하루에 모든 세상을 못 만드셔서 6일이 걸렸을까요? 하나님은 순식간에 다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6일은 하나님께 필요하신 시간입니다.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모세의 40일은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을 준비하기에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아니면 참 만남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의 광야 생활도 같은 의미입니다. 일주일 혹은 천천히 걸어도 열흘이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40년의 광야생활을 요구하십니다. 만일에 일주일 만에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40년이 긴 세월이지만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육체적인 만남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참 만남(encounter)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완벽한 준비를 요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나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눈동자가 45%까지 확장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점점 더 눈동자는 작아집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눈동자는 무한히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정말 하나님을 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40일이 축복입니다.

  신명기 9:10에는 “여호와께서 두 돌 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 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모세는 40일의 공과 정성을 드립니다. 꾸준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받을 가치가 있고, 받으려고 기다릴 가치가 있고,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사람들을 보세요.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 그 언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나시던 날은 새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호숫가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무리들이었습니다. 산상보훈을 마치실 때에 그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놀라서 말합니다.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마 7:29).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가치가 무리들이 운집한 이유입니다. 말씀을 받는 것이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려고 40일이 걸렸습니다. 한 계명에 나흘을 투자한 것입니다. 계명 하나에 나흘의 가치가 있습니다. 계명 하나의 가치가 나흘이 문제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이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삶을 다 투자해서라도 얻어야 할 것이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포시스라는 수도사는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는 감독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던 말씀을 이제는 성경이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의 귀에 말씀이 들려진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감동이 없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는 자체가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할뿐더러 듣지 못한다. 듣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나는 듣지 못하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장애가 된다는 사실 깨달았다”. 듣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신앙의 장애입니다. 말씀을 받고, 말씀이 들려지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이 귀하던 시절에 성경을 반포한 얘기를 들으면 감동이 됩니다. 성경 한 권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애타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갈급한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국의 메리 존스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사고 싶은 것이 있어 돈을 저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기 봐주기, 이웃 정원 가꾸기 그리고 집에 기른 닭이 나은 달걀 팔기 등으로 돈을 모아 16살 때 그것을 사기에 충분한 돈이 모아졌습니다. 이 아이가 무엇을 사고 싶어 했는지 아십니까? 자동차이겠습니까? 새 옷이겠습니까? 그 때가 1800년도입니다. 이 아이는 성경 한 권을 사고 싶었습니다. 자기 마을에는 파는 성경이 없어 모은 돈을 가지고 25마일을 걸어서 이웃 마을에 갔습니다. 그 이웃 마을의 토머스 찰스 목사님은 팔기 위한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리는 이 마을에 와서 목사님께로부터 성경을 샀습니다. 이 성경을 손에 쥐고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이 사실을 알고 찰스목사님과 몇몇 사람이 성경책을 쉽게 보급할 방법을 논의하였습니다. 이것이 영국성서공회 창립의 효시였습니다. 한권의 성경을 얻는 것이 감격이며 은혜며 축복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공책’인 것은 아시지요?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지만 흔한 책은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가장 귀한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 한 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40일을 머물며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모세가 말씀을 받기 위하여 기다렸던 40일이 우리의 기다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40일을 기다려 말씀을 받았던 그 감격과 그 가치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 북한에 갔을 때가 10여 년 전입니다. 그 때 안내원이 저에게 “우리 공화국에도 지하교회가 250개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방세계에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저에게 한번 넌지시 말을 던져 본 것 같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한 사실 확인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북한에서 지하교인을 만났답니다. 그 지하교인은 그 분에게 “성경책을 보고,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예배 한번 드리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공감이 됩니다. 이런 말에도 아무런 공감이 안 된다면 문제입니다. 말씀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가 예전에 느끼기 못하던 감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늘 읽던 성경이지만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은 성경을 읽다가 너무 감격해서 새벽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가만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할 때가 있습니다. 자는 사람을 깨워 얘기하고픈 때도 있습니다. 이런 감격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합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결론

  40일은 말씀 축복의 날입니다. 모세는 첫 번째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십계명을 받을 때 다시 40일을 기다렸습니다. 40일은 기도 축복의 날입니다.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기 위하여 40일을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다고 했을 때에 40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신 9:25)라고 합니다. 40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의 날이며 말씀과 기도를 응답하시는 날입니다.

  내일부터 40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집니다. 길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성취하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축제의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40일의 영광을 재현하고 우리 모두에게 기쁨의 잔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 함께 새벽마다 기쁨과 감격의 열기로 교회를 가득 채우는 40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경험의 40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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