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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중 탄식 (롬 8: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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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 탄식 (롬 8:18-26)

1.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

수많은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다를 오염시키고, 양식장을 황폐하게 만들고, 어민들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있다. 오늘도 방제작업이 벌어지고 있고, 복구를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회수한 원유한 양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 남은 기름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원래 상태로 복구 되는데 수 십 년이 걸린다.

저는 기름 범벅이 되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전복, 게, 검은머리물떼새 등 바다 생물들을 볼 때 가슴이 아팠다. 기름 천지가 된 모래바닥과 바위들을 닦아내는 사람들의 몸부림과 눈물을 볼 때도 가슴이 아팠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죽어가는 자연을 바라볼 때였다. 검은 색으로 변해버린 바위와 모래, 신음하며 죽어가는 바다 생물들, 또 그 모든 것을 품고 있어야 할 바다까지.

만약 자연이 정말 말할 수 있고, 소리칠 수 있고, 항의할 수 있는 생명이라면 그들의 슬픔과 절망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ex) 그래서 조금은 감상적인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사람들도 다 떠나버린 어느 날.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바위와 모래언덕은 얼마나 파도를 그리워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몸이 깎여지는 한이 있더라도 파도가 몰아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줄 것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바위와 모래 언덕. 그 많은 기름 덩어리를 자신의 몸 안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오랜 인내로 녹여내야 할 바다의 그 산고와 같은 고통.

그리고 저는 오늘 말씀이 생각났다. (19-22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 피조물도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회복되어 영광의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과 함께 한다.

2. 피조물의 고대와 탄식

1) 피조물은 누구인가?

●사단과 악한 영× ⇒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기다리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오면 자신들의 일이 끝나기 때문에 기다리지×

●선한 천사들× ⇒ 지금까지 부패의 노예상태에 굴복한 적이 없었기에. 계속 순종함.

●불신자들× ⇒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이 육적 삶이 계속되기를

●신자들× ⇒ (23절) “이뿐 아니라 우리도” : 피조물과 우리(신자)를 구분.

∴ 피조물⇒ 산, 강, 바다, 나무, 풀, 동물, 물고기 등 (자연과 생물들)

2) 고대 : 원래 본문에는 “고대”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피조물의 고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는 것이라.” 두 번을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다.

고대⇒ 목을 쳐들고 고개를 쑥 빼고 그 사람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

ex) 셋째 딸을 어린이집에 처음에 보낸 날. 그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하고 부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안아주자 엄마를 꼭 껴안고 엄마 얼굴에 계속 뽀뽀를 해댔다. 집에서는 뽀뽀한번 해 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한 번 해 줄까 말까 비싸게 구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연신 입을 맞추고 자기 얼굴을 엄마 얼굴에 문질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그 아이의 하루의 삶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밖에서 인기척만 들려도 “엄마가 왔나?”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엄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늘 생각하다가 입으로 가끔씩 “엄마! 엄마!”하고 불렀을 것이다. 어린이집에 아무리 신기한 것이 있어도, 친구가 옆에 있어도 그 아이의 머릿속에는 엄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오자 너무 반가워서 울음을 터트렸다. 바로 그것이 고대이다. (졸고 있던 사람들은 눈을 뜨며 이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연대 얘기는 안하는데?”)

3) ●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하나님의 아들들= 바로 우리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의 보증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계속 확인하고 확증해 가고 있는 우리들)

● 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할까? ⇒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때, 우리들의 구속이 완성되는 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 주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고 완성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실 때,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창조의 본래의 의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 때가 될 때까지 피조물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일까?

(20-21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피조물은 현제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이다.

● 허무? ⇒ 본래 의도한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본래 의도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쓰는 말.

<허무>는 피조물이 본래의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우주와 피조세계를 만드시고, 그것을 인간에서 주셨다. 인간은 그것을 다스릴 수 있게 하셨고, 피조물은 복종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이 관계가 깨어졌다. 피조물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지음으로 피조물도 그 본래의 목적에서 변질되었다. 인간의 타락 후에 피조물에게 생길 변화에 대해서 (창3:17-18)에서 말씀하셨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땅을 가꾸면 땅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주어야 하는데 전혀 의도하지 않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준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과 자연이 함께 형벌을 받게 된 결과이다. 창조 때부터 인간과 자연은 공동체적 의존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에게 해를 계속 입히고, 자연 역시 인간을 향해 해를 주는 것이 계속 되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이롭게 창조되었지만, 타락과 함께 형벌을 받아 인간에게 도전하는 환경이 되어 버렸다. 태풍, 가뭄, 홍수, 지진, 온난화 등 이 모든 것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과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가 점증되는 무질서를 향해서 끊임없이 퇴화하고 있다는 법칙이다. 한 마디로 하면 우주가 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자연세계가 항속적인 자가 개선을 한다고 말하지만 엔트로피 법칙과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우주는 지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 지금 우주와 자연, 이 피조세계는 환경이 나빠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부패와 허무에 굴복하고 있고, 주님이 재림할 때는 조금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허무와 부패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그 때 우주 만물은 완전한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처럼 피조물도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2. 신자들의 탄식과 기다림

신자들의 탄식과 기다림도 나온다. (23절) “그 뿐 아니라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령을 받았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탄식하고 있다. 무엇을 탄식하고 있는가? 청교도였던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경건한 자가 희미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사랑의 맥박이 약해질 수 있다. 마치 시내가 마르듯 은혜의 운동이 막힐 수 있다. 경건한 자 속에서 은혜가 역사하는 대신에 부패가 역사할 수 도 있다. 인내 대신에 불평이 나올 수 있다. 중생한 자 속에서 부패가 활기차게 작동할 수도 있다. 엄청난 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은총이 줄어드는 경우는 있어도 그것이 말라빠지지는 않는다. 은총이 감소되기는 해도 폐지되지는 않는다. 은혜가 가리워져도 해체되지는 않는다. 신자는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지만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금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약하고, 죄에 쉽게 넘어지고, 욕심이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 예약되어 있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아프기도 하고, 질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속량을, 몸의 부활을,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3. 성령님의 탄식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내가 기도를 별로 안하고 지낼 때, 해도 별로 기도할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 우리를 합리화하려고 할 때 잘 인용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사도바울이 우리의 구원, 특별히 우리의 완전한 구원의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 주실 때가 많다.

이런 우리들에게 사단은 이렇게 유혹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보니 너는 기도할 줄도 모르는구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기도할 줄 모르겠니? 자녀는 당연히 아버지에게 무엇을 요청해야 할지 아는 것처럼 너도 너의 아버지 하나님께 당연히 그 뜻대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아야 하는데 기도할 바도 알지 못하고 당황하는 너를 보니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러나 이 때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히 알고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성령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성령님의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도는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우리의 최종적 구원은 우리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탄식기도에 달려있다. 성령님의 탄식기도는 완벽하게 응답받는다.

피조물은 탄식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들도 탄식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성령님도 주님의 재림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피조물도, 성도들도, 성령님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며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어떤 소망이 있기에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있는가? 여러분은 대림절을 맞아 주님이 오시기를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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