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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신 1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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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신 10:12-19)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적절한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예상치 않은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어려움이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정신질환이 생겨 정신병원에 가는 것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정신질환이 발생할 수 있고, 그것은 마치 살다가 감기가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정성껏 치료한 다음에 정상이 되면 다시 그의 가정이나 직장으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인지, 아직도 정신질환이 남아있는지 그 환자의 정신건강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몹시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재미있는 방법으로 그 정신질환자의 정신건강 상태를 가늠하게 되는 이야기를 썼는데, 환자를 어떤 수도꼭지가 있는 방에, 우리처럼 온돌방이 아닌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방에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물이 졸졸졸 넘쳐 나중에 그 물이 바닥에 흔건히 고이게 되는데, 의사가 그 환자더러 이 바닥에 있는 물을 훔쳐서 닦아내시오, 시킨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정신병자 환자들은 의사가 시킨대로 그 바닥에 있는 물을 훔쳐내기 위해서 열심히 닦아서 짜고, 또 닦아서 짜고 그렇게 열심히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그 물을 훔쳐내도록 시켰지만, 먼저 수도꼭지부터 잠그고 그리고 그 물을 훔쳐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현실만 앞에 놓고 그것이 잘됐느니 못됐느니, 살겠느니 죽겠느니 몸부림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근본부터 고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그는 재밌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40이 넘으면 주변 환경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사람이 내게 친절하게 하면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평소에 친절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왠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고, 영~ 나로부터 멀어지고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우리가 현실적으로 어떤 일을 당하였든지 간에 그 근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 원인을 먼저 생각해 보는 사람, 크게는 국가의 경제이든 정치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 근본으로 돌아가서 그 뿌리에서부터 생각할 줄 아는 그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혹은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 볼 때도,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를 생각하는 것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을 소유하였느냐, 그의 외형이 어떤지에 대하여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이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행하고 사느냐 일 것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알고 있긴 하지만, 아무런 행동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저희 신학교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윤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비윤리적인 사람이고,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주 비조직적인 그런 사고를 가졌다. 그런 재밌는 반 농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부인이 학교에 가서는 가정과 교수인데, 그래서 가정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아이들에게 아주 잘 가르치는 유명한 교수인데, 집에 와서는 살림살이를 하나도 못한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행하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어떻게 행하고 사느냐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느냐 입니다. 얼마만큼 사랑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무리 좋은 괭이가 있어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제가 종종 말씀 드리지만, 평생을 희생하며 고생하며 살았던 주부여러분, 마지막에 가서 인생을 원망하며 내가 뭐하러 이렇게 고생하며 살았나라고 말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진정한 감동할 만한 사랑이 있어야 나타나는 행동이 가치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가 이 시간 과연 무엇을 사랑하고 살아가는지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지닌 사랑에 대하여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따라 내 존재의 가치가 평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전에 ‘뇌내혁명’이라고 하는 아주 두꺼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였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과학자의 과학적이론입니다마는 이 책에 보면 이 우주에는 어떤 신비로운 의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법칙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신비롭고 강한의지가 있는데, 그 의지로부터 받은 유전자가 우리 몸에 있고, 이에서 멀어지든가 역행하면 그 몸에서부터 악한 호르몬이 나와서 그를 병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 절대의지에 따라서 살게 되면 행복하고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갖게 된다. 뭐 그런 재밌는 이론이 그 책속에 있습니다. 그 책을 이 목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 신비로운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라고 말하듯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하나님의 사랑, 그 의지에 따라 순조롭게 순행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몸과 맘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에서 점점 멀어지고 그것을 역행하여 살아가면 우리의 마음이 불편하고 좋지 못한 호르몬이 나와 우리의 건강도 상하며 우리도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의지가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로 향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와 같은 길로 갈 때 육체도 정신도 건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현실, 여기에 몰두하지 말고 생각을 돌려서 내 마음속에 깊이 있는 사랑을 재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본문을 비춰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데서부터 우리의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을 해야 하는 소위 ‘Responsible Being’ 응답적인 존재라고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을 다시 반사하는 사랑을 다시 되돌려 주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을 이렇게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먼저 우리는 되돌아보며 깊이 근본적인 문제 곧 사랑의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고 불행하게 어머니 슬하에서 5형제가 살았는데, 제일 맏이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가 너무 힘들고 고생스러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이 아들, 제 친구 목사가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다가, 길가에 있는 남의 집 감나무에 아주 맛있게 빨갛게 익은 홍시가 있었는데, 그것을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고 싶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시라고 하는 것이 손이 가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홍시를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감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라서 잘 부러집니다. 감나무는 감도 많이 달려있기도 하고 원채 잘 부러지기 때문에 높이 있는 그 홍시 하나를 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기를 쓰고 남의 집 감나무에 올라가서 빨갛게 익은 홍시하나를 따서 어머니께 드리려고 가슴에 품고 달려갔습니다.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미니에게 그 홍시를 드렸는데, 그 때 마침 어머니 무릎위에 셋째 동생이 앉아 있는데, 이 동생이 그 홍시를 보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먹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 홍시를 그 동생에게 선뜻 주어버렸습니다. 이걸 본 제 친구 목사가 화가나서 동생 손에 있는 홍시를 뺏아서 ‘니가 왜 이걸 먹냐고 엄마가 먹어야지!’하면서 그것을 땅에 확 팽기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속상해서 이 친구도 울고, 홍시를 뺏긴 동생도 울고,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어머니도 울고 그래서 세 식구가 모두 부둥켜 안고 한참이나 통곡을 하고 울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툰 사랑의 표현과 받아들임이 이 세 사람 모두를 그렇게 울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인 개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 시간 다시 한 번 돌이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애굽에서 종되었을 때에 너희를 구원하였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느냐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망이 났느냐 무얼 자꾸 반복해서 말하느냐고 느낄 만큼 자꾸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꾸 반복하여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민족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이 나라와 이 백성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많은 혼란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우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오천만이 가까운 이 사람들 중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할 때도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며 그 능력과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쉬운것 같아도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오늘 내가 당하는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며 그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깨닫고 감사하며 그 사랑의 능력으로 그 사랑을 다시 반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믿음으로 이해하시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그 깊은 사랑의 고백 속에서 계명을 대하라. 그런 말씀이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많은 계명이 있지만, 그 사랑의 고백 속에서 그 계명을 대하라.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의 문제를 계명이라 해석한다면, 그것을 대할 때 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고백하는 눈으로 내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라 그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철 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습니다. 그러나 철이나고 보면 그게 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 자신의 복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요 또 간섭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더 눈물나게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바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는 눈들도 이런 사랑의 고백 속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지난주일 마 5:17-20절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는 말씀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눈 바 있습니다. 계명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눈 것이 지난 시간이기 때문에 오늘 계명에 대한 말씀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그의 요구하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그를 사랑한다면 내가 요구하고 내가 바라는 것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소원이 아니라 그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 인간적으로 효자로 말한다면, 내 소원보다 부모님의 소원, 내 처지보다 부모님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가진 자녀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그에게 그것에 관심의 초점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작곡가 ‘베르디’라는 사람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가 처음으로 큰 곡을 작곡해서 플로렌스라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듣고 그리고 흥분하며 갈채를 보내고 있는데, 베르디는 자기를 향해서 박수 치는 관중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고 저 높은 곳 V.I.P석에 앉아 있는 그의 대 선배이며, 그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과 같은 롯시니라고 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의 작품에 반응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가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분이 내 작품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궁금하였고 그만을 쳐다보고 있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뭐라고 하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당한 현실을 어떻게 평가해 주시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내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 주시는가, 그것이 중요하며 거기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성도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 많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결론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기뻐하고 그를 섬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중에 보면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만을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18절에 말씀하시기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신원이라는 단어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우시고,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관심 가지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우리도 사랑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좀 비약하여서 이 사랑하여야 할 대상을 크게 넓게 이 나라와 이 민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백성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의 이 백성을 끊임없이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제가 삼일절이었습니다. 우리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몸부림 칠 때 1919년 3월 1일, 자유를 위하여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 우리는 조용히 일본에 속한 나라로 평가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모든 제국주의자들이 서로 나눠먹기 공작을 할 때였기 때문에, 그러니 모든 나라가 ‘이 나라는 일본에 속한 나라다’그랬다면 그것을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3.1 운동이라는 이 사건이 온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로써 8.15 해방과 함께 독립을 찾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 천도교가 2백만, 불교도가 3백만, 기독교인이 35만으로 전인구의 1.2%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만세 운동으로 인하여 체포된 사람의 수를 일본정부가 발표한 대로 보면 기독교인이 2,039명, 천도교가 1,063명, 유가가 55명, 불교가 41명뿐입니다. 예배당이 불타고 순교를 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때 희생된 사람의 60%이상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달라진 애국가를 부릅니다만 그 당시는 그 때의 찬송 14장이 애국가의 곡조였습니다.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고 애국가를 부르며, 우리는 민족운동과 신앙, 교회 운동과 애국운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이상재 선생님 같은 분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할 때, ‘네 배후에 누가 있느냐? 대라!’하니까 간단하게 ‘하나님이 시키셨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어 하는 일이지 시키기는 누가시켜! 이런 신앙적 운동으로 애국운동을 승화 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뜻도 있고 나의 바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라고 해서 다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하여야합니다. 그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법도를 그의 계명을 지켜나가는데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바라기는 새로 출범하는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이 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그가 기뻐하는 일을 하여서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살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요구하심에 맞추어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욕심, 내 바램, 내 마음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섬기며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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