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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아슬아슬한 구원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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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구원 (눅 23:39~43)

우리는 지금 교회 절기 상 사순절(四旬節, L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주일 제외)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기도와 성경읽기, 절제와 성결, 구제와 섬김 등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매년 사순절 날짜가 달라지는데, 금년에는 아주 빠릅니다. 사순절 기간이 왜 매년 달라질까 아마 궁금하실 겁니다. 그것은 부활절(復活節, Easter) 날짜가 매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는 이렇게 정합니다. 부활절은 춘분을 기준으로 계산합니다. 춘분(3월 20일 혹은 21일)이 지나고, 보름달이 뜬 후 첫 번째 주일로 정합니다. 음력으로 환산하다 보니까 매년 달라지는 겁니다. 대개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금년은 3월 23일입니다.

이제 부활절 전까지 3주 남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연관된 말씀들을 전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순서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가상 칠언’(架上七言) 중에서 말씀드립니다. 본문은 그 중의 두번째 말씀으로 한 강도와 최후의 대화를 나누신 내용입니다. 모쪼록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피차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아슬아슬한 구원 : 강도가 얻은 구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좌우에 강도 두 사람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죽기 직전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① 한 강도의 구원 :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본문에는 한 강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틀린 게 아니라, 이렇게 된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싫어해서 빌라도 총독에게 거짓 고소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지한 백성들도 예수님을 오해해서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쟁이라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메시아 그리스도냐? 네가 구세주라고? 그러면 십자가에 당장 내려와 봐! 우리도 좀 구원해 보시지! ... ” 별의 별 말을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강도들도 한데 어울려 욕을 합니다.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막15:32 “ ...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39절~40절을 보십시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지금 이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욕을 하는 다른 강도를 책망합니다. “이 사람아! 너나 나나 죄를 지어서 사형을 당하게 된 주제에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무섭지도 않아?”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 영 딴판입니다.

여러분, 이런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복음서를 읽을 때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문 여러 개 보는 것과 같다 ... 동일한 사건이라도 신문마다 강조점이나 시각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전체를 종합해서 보면 올바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같이 예수님을 욕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쪽의 강도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아주 가까이서 예수님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겁니다. 무리들이 욕하고 소리를 쳐도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더욱이 첫 번째 말씀(눅23:34)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잘 몰라서 그럽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분명히 저 예수는 보통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리들이 조롱하는 저 소리가 실제로 맞는 소리 아닌가? 그래 맞다. 저 분은 분명 메시아 그리스도야, 구세주란 말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불현듯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정말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죄인이야.”

여러분,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릅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마치 겨울에 선 사람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을 훤히 보게 됩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죄인은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반면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막2:17 “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병자와 의사의 관계에 빗대서 설명하십니다. 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병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쓸데없습니다. 원래 건강해서 그렇다면 다행이죠. 그런데 병자이면서 자기 병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예를 종종 봅니다. 병이 전혀 없는 줄 알고 지내다 갑자기 악화되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구세주로 오셨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강도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다른 한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를 보십시오! 뭐라고 고백합니까?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사람은 자기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임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왜 ...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단 말인가? 그는 고민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53:12 “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 ” 무슨 말인가요? 죄인이 아닌 예수님이 죄인들 틈에서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 끼어서 처형당하심으로 이 예언이 절묘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심으로 죄를 대신 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죄 석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어코 제거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데모를 일으킵니다. 예수를 살려두면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며 빌라도를 협박합니다. 권력이 흔들릴까봐 겁이 난 빌라도는 결국 타협해 버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해서 손을 씻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그리고 꼼수를 부립니다. 누가 봐도 사형감인 강도 두 사람을 급히 처형하면서 예수님을 그 사이에 끼워 넣은 겁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불법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물타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고후5:21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을 의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인간에게는 의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렴풋이 대속의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본문 42절입니다. “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말은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 나는 흉악한 죄인입니다. 언감생심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감히 구하오니 당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 저도 따라 들어갈 수 없을까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오직 예수만 믿으면 의인이 되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0:10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이런 사실을 직접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은 이 약속대로 그 강도의 믿음을 보시고, 43절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낙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강도는 예수님을 통해 직접 예수님의 육성으로 구원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정말 아찔한 순간입니다. 만일 이 때 우물우물하다가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기회를 놓쳤더라면 그는 지옥으로 떨어져 영영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중에 이 사람처럼 아슬아슬한 구원을 받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심방을 갑니다. 그런데 평생 예수님을 부인하던 분입니다. 얼마나 다급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완고하던 분이 십자가 복음을 제시하면 마음이 녹아져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사하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더라면 어찌할 뻔 했나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어르신께 미리 복음을 전해 놓고 목사가 오면 세례를 주실 거라고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교역자와 교인들이 갔습니다. 가족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이 시간을 맞추셨는지 주무시는 겁니다. 얼마나 난처한지! 기껏 갔는데 허탕치고 그냥 돌아올 수도 없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곤히 주무시던 분이 스르르 깨어나시더니 복음을 다 받아들입니다. 병상 세례를 받고 몹시 기뻐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영혼을 반드시 구원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② 구원의 십자가 :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비참하게 처형되는 십자가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18 이렇게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므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영생의 복을 누리시고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분명한 구원의 십자가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고집을 부리며 부인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였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팡세」를 보면 ‘내기 이론’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기쁨으로 가슴벅차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수학자답게 확률적으로 한번 따져보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은 물론 천국을 확신하지만, 가정해서 천국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게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 믿지 않으면 큰 손해가 난다는 겁니다.

사실 인생은 넓은 의미로 보면 ‘내기’ 하는 겁니다.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궁리하다 결정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안전하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많은 복을 받게 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옛날 광고 카피처럼 가전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지만,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영원을 좌우합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결정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미국의 한 마을에 불량한 청년 둘이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인데 도박장으로 갑니다. 그런데 교회 옆을 지나가다 게시판에 있는 포스터를 보게 됩니다. 서교 제목이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한 청년은 도박장에 가지 말고 한번 들어가서 설교를 들어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은 미쳤냐고 빈정거립니다. 둘이 다투다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한 청년은 그 날 설교를 듣고 예수 믿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대통령 취임식이 성대히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감옥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 죄수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30년 전 헤어진 친구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미국 제22대, 24대 대통령 클리블랜드(Stephen G. Cleveland 1837~1908)입니다.

이렇게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합니다. 심지어 영원을 좌우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나중에 믿지 뭐. 그 강도처럼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한 생각입니다. 인생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나요? 미안한 말이지만, 자기가 언제 어디에서 죽을지 압니까? 그러므로 구원의 기회는 항상 지금 당장입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고후6:2 “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잠언 27장 1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여러분 가운데 혹시 아직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속에 믿지 못하는 단 한분이라도 계십니까? 이 시간 믿음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중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받고 영생과 천국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아쉬운 구원 : 강도가 놓친 축복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구원받은 강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슬아슬하죠. 남의 일이니까 드라마틱하고 흥미롭게 보이지만,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입니까? 정말 아찔한 일이죠. 더더욱 이 사람은 일찍이 예수를 믿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너무 아쉬운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 사람을 보고 그래요. 아주 경제적으로 예수를 믿었다고, 믿자마자 천국 갔으니 얼마나 효과적이냐고 ... 남은 수십 년 예수 믿고 천국 가는데 ... 그러나 그 사람은 효과적으로 경제적으로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사실은 손해 본 게 너무 많습니다. 그가 구원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축복을 놓친 ‘아쉬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크게 두 가지 축복을 놓쳤습니다. 첫째는, 이 땅의 축복을 놓쳤습니다.

① 이 땅의 축복 : 

여러분, 이 땅에 사는 동안 인생이 얼마나 고달픕니까? 그리고 죄 많은 세상입니까? 아마 이 사람도 처음부터 흉악한 범죄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다보니까 험한 세상에서 힘겹게 살면서 한번 두 번 범죄하면서 큰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만일 그가 진작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험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맛보며 승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평생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셔서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도와주셨을 겁니다. 마치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시23:1~4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② 하늘의 상급 : 

그뿐이 아니죠. 이 세상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니까 세상에 연연하지만, 사실은 영원한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영생을 얻어야 하고, 더 나아가 천국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가지만,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하늘의 상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인내하며 기뻐하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딤후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초대교회에 이런 순교사화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귀양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밧모섬 아시죠. 그곳에 가면 ‘聖 요한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것에 가면 벽화가 여러 개 있는데, 그 중에 40인 순교자」란 벽화가 있습니다. 그 벽화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우상 신전 제사를 거부한 크리스천 군인들 40명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발가벗겨져서 얼어붙은 호수에 세워져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곧 얼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장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따뜻한 목욕을 시켜 주겠다며 옆에 목욕탕을 준비해 둡니다. 보초가 모닥불 피워놓고 목욕탕 옆에서 지키는데, 40명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때 40명의 천사가 40개의 면류관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천사가 슬픈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군인이 울상을 하고 목욕통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보초가 소리칩니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 대신 서 있겠소!” 그래서 그 초병도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여러분, 면류관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우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 가운데 아슬아슬하게 구원 받은 강도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한번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기왕 예수 믿는 것 경 구원만 받고 턱걸이 하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많은 축복 받으시고, 저 천국에 들어갈 때 하늘의 큰 상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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