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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의 프로가 됩시다 (고전 9: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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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프로가 됩시다 (고전 9:15-18) 
 
 
❚전도의 프로는 누구인가?

각 교회마다 대표적인 전도왕이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도만은 최고로 잘 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전도의 프로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런 전도 프로 한 사람이 한 해에만도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명씩 전도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전도 제일 잘 하는 분들은 한 사람이 1년에 3천 명씩 전도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안수집사 한 분과 권사님 한 분이 서로 전도왕 경쟁을 했는데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매년 이 두 분이 번갈아가면서 전도왕을 차지했는데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온 교우들이 “올해는 저 두 분 중에 누가 전도왕이 될까?” 큰 관심을 기울이곤 했습니다. 

이 두 분이 한 사람 당 2백 명 이상 씩 전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교회에는 전도왕이 누구일까요? 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교회에도 전도 열심히 하는 분은 많지만 이 정도로 프로급 전도왕은 아직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 가운데 이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오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분 가운데 꼭 이런 귀한 전도왕이 나오게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이렇게 한 해에만도 수백, 수천 명씩 전도하는 전도의 프로가 한 분만 있으면 그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하겠지요? 이런 분 둘만 있으면 그 교회는 금세 두 배, 세 배씩 늘어나겠지요? 아닙니다. 물론 이런 분들이 있으면 그 교회가 부흥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전도왕, 전도의 프로가 더욱 귀한 것은 전도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너지 효과’라는 말 아시지요? ‘시너지(synergy) 효과’란 ‘상승작용’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한 가지 요소가 상승되면서 다른 요소가 덩달아 따라 올라가는 현상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의 시너지 효과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한 해에도 수백, 수천씩 전도하는 전도의 프로가 있으면 그 교회 다른 성도들이 “나도 전도해야겠다, 저 분만큼은 못 해도 나도 열심히 전도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덩달아 열심히 전도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진정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무리 우리 교회에 이런 전도왕이 있다고 해도 다른 성도들이 전도에 무관심하다면 절대 부흥이나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도는 저 양반이 다 하는데 내가 뭐 할 일이 있겠나” 생각한다면 한 두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전도해도 절대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란 한두 사람이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몇몇 정해진 사람만 전도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전도의 프로란 누구인가? 앞서 말한 한 해에도 수백, 수천씩 전도하는 그런 분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도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분들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전도의 프로란 누구냐? 그 교회 온 성도가 전도의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몇 특정한 분들만 아니라 그 교회 온 성도가 전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가운데 적어도 수십, 수백 명 이상이 전도를 꾸준히 해서 전도의 프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 해에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명씩 전도하는 훌륭한 전도왕이 나올 뿐 아니라 온 성도가 전도의 프로가 되는 그런 축복 받은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전도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

또 한 가지 전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도는 몇몇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다, 전도는 저 사람이 다 하면 된다고 하는 오해가 있는가 하면 전도에 대한 또 하나의 큰 오해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전도가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항상 제가 여러분에게 전도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반드시 전도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도는 모든 성도의 의무라는 뜻인데 왜 제가 전도가 의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그것도 우리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리인 것입니다.

그 근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9장 1절부터 9장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하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평생 복음을 위해 애쓰면서도 또 평생 이런저런 구설수와 시비에 시달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다 좋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꼭 삐딱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합니다만, 사도 바울의 경우 평생 시달린 구설수와 시비는 첫째, 사도의 자격 문제(과연 바울이 사도 자격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고 둘째, 사도의 권리 문제였습니다. 사도의 권리란 무엇인가? 당시 바울 외에 다른 사도들은 다 생계비를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받아 생활했습니다. 4절에 나온 ‘먹고 마실 권리’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내가 사도기 때문에, 생계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 전하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먹고 살 권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아 생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5절에 보면 게바, 즉 베드로는 선교할 때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교회의 후원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잘못 된 것은 없지요. 베드로만 해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어부라는 직업도 포기하고 배도 그물도 다 버리고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교회의 생활비를 받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도 다 그런 권리를 행사했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유독 사도 바울만이 스스로 일을 해서 생활하고 선교를 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선교하는 것을 ‘자비량(自備糧) 선교’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tentmaker’라고 부릅니다. 뜻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텐트,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이 말이 바로 사도 바울이 텐트를 만들어 자비량 선교를 한 데서 온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비량 선교를 했는데 뭐가 부족해서,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얼마든지 다른 사도들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고 교회의 지원을 받고 성도들의 후원을 받아 선교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왜 이 당연한 권리를 포기한 것일까요? 바울이 다른 사도들처럼 후원 받고 편히 살 권리가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의 힘든 길을 선택한 까닭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바로 그 까닭이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15절부터 나옵니다. 함께 1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여기 나오는 ‘이것’이 뭐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사도의 권리지요. 자신이 힘들게 일 안하고 얼마든지 생활비를 받을 권리 말입니다. 또 가족도 혜택을 받을 권리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리를 하나도 안 쓰고 그런 권리를 달라고 요구조차 안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미완성 문장)” 바울은 여기서 꽤나 격앙되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것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 권리를 일부러 안 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수고를 뜻합니다. 자기가 복음을 그토록 생명 걸고 열심히 전한 까닭은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과 뜨거운 사랑 때문인데 이 큰 자랑거리를 어찌 한낱 생활비나 편안한 생활과 바꿀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혹시 그토록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나서 생활비나 보조를 받는 것이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나 이렇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니 성도들이 알아서 나를 돕고 대우해 주시오” 한다면 그 복음을 증거한 가장 큰 자랑이 다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있어 복음증거는 가장 큰 자랑이요 권리인데 그 큰 자랑과 권리를 사소한 권리와 맞바꾸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을 받으려면

이 사실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18절에 ‘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18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가장 큰 상은 무엇인가? 그토록 열심히 복음 전하고도 사도가 당연히 받을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 남겨 둔 것이 상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좀 말을 바꾸어서 요즈음 말로 설명해 볼까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믿음생활 열심히 하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희생하면 상급이 있지 않겠습니까? 큰 상급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수고했다고 칭찬 받고, 인정도 많이 받고, 상도 크게 받고,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애썼으니 날 좀 알아달라고 해서 보상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줄어들겠지요. 하늘나라에 쌓일 상급이 없겠지요. 바로 이와 비슷한 뜻입니다. 바울도 세상에서 남들 다 당연히 누리는 권리지만 그것을 누리면 내가 나중에 주님께 받을 상이 없는 줄 알기에 그 당연한 권리 일부러 안 누리고 그 고생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이 고백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하느라 애씁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의무입니까? 권리입니까? 권리라는 것이지요. 내가 복음을 먼저 받고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기꺼이 남들에게 전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큰 자랑인 복음을 남들에게 전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크나큰 권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소유하고 그 복음을 자랑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 말입니다. 나아가 그 복음을 전하느라 애쓰고 수고한 상을 반드시 받을 테니 얼마나 큰 권리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그 큰 권리를 결코 세상의 작은 권리와 바꾸지 않겠다고 한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전도와 복음전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권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전도할 때 시켜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남이 시켜서 의무감으로 하면 거기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이 해봐야 상급은 없습니다. 오직 복음이 귀해서, 복음이 자랑스러워서 기꺼이 남들에게 전할 때 그 전도가 가치 있는 것이고, 이 전도가 나에게 얼마나 큰 권리요 특권인지 알아서 전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최근 항존직 피택자들을 대상으로 6개월 간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도책임이 있는데 임직식 전까지 장로 피택자는 5명, 안수집사와 권사 피택자는 3명을 전도하되 무조건 교회 데리고 나와서는 안 되고 그 분들이 다 4주차에 등록하여 ‘양’을 받는 경우만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임직식 전까지 이 전도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는 임직을 보류한다고 했습니다. 2년 전 임직한 분들은 장로 피택자는 전도 3명, 안수집사와 권사 피택자는 2명이었는데 더 는 셈이지요. 과제가 이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과제와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 말씀드리면 아마 너무 놀라서 나는 절대 장로, 안수집사, 권사 피택되지 말아야겠다고 할까봐 말씀드리지 않지만 전도만 해도 얼마나 부담됩니까? 말들은 다 안 해도 아마 벌써 전도 어떻게 하나, 누구보고 좀 와달라고 할까 피택자들 다 마음이 조마조마 할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피택자들뿐 아니라 우리 성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담임목사가 시키고 교회가 시켜서 전도한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고 그 전도한 영혼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합니다. 전도는 권리요 특권입니다. 전도는 자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자랑을 자랑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 큰 특권을 특권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저 부담감만 가지고 의무감만 가지고 하려 한다면 포기하십시오. 그건 아닙니다. 상급도 없습니다. 장차 주님께 받을 그 큰 상을 그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받아야 할 장로, 안수집사, 권사의 직분조차도, 세상에서 우리가 받을 아무리 크고 영광스러운 상조차도 결코 주님이 직접 주실 상과 칭찬과는 절대 바꿀 수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해서, 복음 전파해서 이 상을 받는다는데 어찌 전도를 안 하며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억지로 하겠습니까?

엊그제 6월 25일이 6.25 발발 60주년이었습니다. TV에서 여러 가지 특집방송을 했는데 그 중에서 어떤 한 특집 프로그램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6.25 때 참전해 우리나라와 싸우러 왔던 외국인 참전용사들 이야기였습니다. 6.25 때 UN 안보리의 결의로 우리나라에 참전한 국가는 모두 21개 나라고 총 1,754,400명이나 파병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미국이 가장 많은 160만 명을 파병했고 그 중에 36,492명이나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뿐 아니라 영국, 캐나다, 터키, 심지어 필리핀과 태국, 인도, 지금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파병을 해서 총 40,896명이 남의 땅에 와서 전사했습니다. 이제 6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용사들 중에도 대다수가 사망했고 이제 80 넘은 노인들 몇몇만이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대부분이 지금도 그 60년 전을 생생히 기억하며 한국이라는 나라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왜 생전 와보지도 못한 나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셨냐”고 물으니 한 참전용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와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당신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한국을 기억하고 자기들이 그렇게 피 흘려 지킨 한국이 그토록 발전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기쁘고 뿌듯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전후세대로 6.25를 모르지만 요즘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은 그 전쟁을 모를 뿐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어른들 중에도 관심 없는 사람 많습니다.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무관심한데 생판 알지도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당신들도 내 형제라며 남의 땅에 와서 피 흘려 죽었습니다. 왜요?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디 억지로 될 일입니까? 그들의 가슴 속에 불타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한 일이랍니다. 자랑도 아니랍니다. 물론 60년이 지난 지금도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알아달라고 할 만큼 내세울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도하며 아무리 수고했어도 자랑할 것이 조금도 없음은 부득불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안 전하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고, 복음을 전하면 그 큰 상이 주어질 것인데 누군들 안 전하겠냐는 것이지요. 다 할 일인데 내가 했다고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이쯤 되니 정말 사도 바울은 전도의 프로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정리해 봅니다. 전도는 누구나 예수 믿으면 다 해야 하는 것인데 거기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단계가 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단계인지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 단계는 전도하라고 하니까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는 단계입니다. 전혀 전도를 안 하는 분들은 아예 이 단계에서 뺐습니다. 두 번째는 전도의 기쁨이 있고 상이 있음을 알고 기꺼이 하는 단계입니다. 전도왕을 그토록 사모하는 분들은 이 두 번째 단계까지는 온 것이지요.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아예 당연히 여기는 단계입니다.

상도 필요 없고, 인정도 필요 없고, 전도왕도 필요 없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니까, 생명을 구해야 하니까, 저 사람도 내 형제니까 당연히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갈 때 당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나도 당연히 해야지요. 누가 좀 안 알아주면 어떻습니까? 그저 주님만 알아주시면 되고, 누가 상 안 주면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께만 상 받으면 되고, 상주시며 잘 했다고 수고했다고 하시면 “아닙니다. 무익한 종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고백하는 단계인데 이 단계까지 오면 우리는 전도의 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전도의 프로 단계가 되어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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