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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길을 택하라 (신 3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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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을 택하라 (신 30:19-20)


어떤 청년이 성경을 보는데, 전체적으로 보는 법이 없고 꼭 한 절씩만 봅니다. 성경을 보기는 봐야겠기에 꼭 한 구절씩만 보는데 아무 데나 점치듯이 딱 펼쳐 봅니다. ‘예수께서 가시니라’ ‘그래, 나도 가야지’, ‘예수께서 주무시니라’ ‘그래 나도 주무셔야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성경을 딱 펼쳐놓고 보았더니 마태복음 27장 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영 찝찝한 기분이 들은 청년은 아무래도 한 절을 더 봐야겠다 싶어 또다시 성경을 펴보았더니 누가복음 10장 37절이 나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더 곤란해진 청년은 다시 한 번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3장 27절이 나왔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스라엘에는 삼대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학정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의 첫 걸음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그 첫째입니다. 이날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모든 백성들의 첫 아들과 모든 짐승의 첫 것을 다 죽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이 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고 버티던 애굽의 바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서 속히 떠라나고 오히려 재촉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 유월절이라면 그로부터 오십 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이라고도 하며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난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받은 날입니다. 아울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이 날, 보리와 밀의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라고 해서 초실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곧 말씀을 주심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을 새기는 날입니다. 아울러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수장절 또는 장막절로 부르는데 가을걷이를 다 끝내고 난 다음 이 모든 것들을 창고에 들이고 난 다음 지키는 절기라 하여 수장절 또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밖에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한 주간을 지내며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지켜주심을 감사한다고 해서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맥추 감사주일로 지키게 되는데 맥추 감사절에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떤 농가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는 풍향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향계의 끝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집 주인인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풍향계처럼 변한다는 뜻입니까?” 그랬더니 그 농부가 하는 말이 “그런 말이 아니고 바람이 어떤 방향을 가리키든지 간에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람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고난의 바람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표현할 때에 ‘하나님의 상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고통도 당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고통을 당하시면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는 십자가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야 그 사랑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먼저 감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받은바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에서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는 우리들의 삶을 구분 짓는 두 고리입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복을 선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누군들 죽음을 좋아하겠고 누군들 저주를 좋아하겠습니까? 그 누구라도 생명의 날을 더 기뻐할 것이며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한데 문제는 마음으로는 누구든 생명과 복을 원하는데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사망과 저주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학생들치고 공부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 잘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공부에는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사실 공부보다 재미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상한 것이 공부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공부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하필이면 지금 기말고사를 봐야할 때인데 월드컵 경기가 벌어지고 있지를 않나 공부보다는 더 신나는 게임이나 노래나 놀거리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마찬가지로 많은 분들이 말씀합니다. 목사가 이야기하기 전에 스스로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하면 된다”고요.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핑계거리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피곤해서 안 되고 직장 일이 힘들어서 몸을 위해서는 쉬기도 해야 되고 이런 저런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 이것만 해결하고 나서 하자고 했는데 마음처럼 빨리 해결이 안 돼서 또 뒤로 미루고 그러다보니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가는데 마음처럼 기도할 시간을 얻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건 곧 자기희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소위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까? 먹을 것도 줄여가며 시간을 내서 열심히 운동하지 않고서는 살이 빠지지를 않습니다. 살좀 뺐다 싶다가도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도로 쪄버립니다. 우리 몸은 이토록 간사합니다. 하물며 영적인 싸움이야 더하지 않습니까? 아마 새벽 시간을 기도와 말씀의 시간으로 갖고자 하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꾸벅꾸벅 졸면서도 밤을 지새웁니다. 아이가 아프다 싶으면 그것도 위험스럽다 싶으면 몇 날이라도 그 곁을 지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를 회복케 하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물론 병원과 의사를 통해서도 하나님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의사의 손이 기적의 손이 되고 그 처방된 약이 기적의 약이 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연약한 육신에 새 힘이 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가 광야 로뎀 나무 밑에서 낙심으로 가득한 채 쓰러져 있을 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시고 평안케 하시며 생명과 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 어떤 희생도 감당하겠노라고 결단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기쁘게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새 힘을 주시고 마침내 생명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복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마음의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어떤 희생도 감당하겠노라고. 그리고 먼저 깨어 일어나 하나님께 그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명령을 하셨지만 우리들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억지로 불순종을 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우리들이 하나님을 늘 무시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수치와 부끄러움에 덮이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적게 사랑하는지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남들의 간증을 듣기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별로 바라지 않습니다. 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무서워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면 그 일을 하든지 아니면 안하겠다고 하나님께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들이 주님의 종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그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즉,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고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자신의 생각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해왔는지를 깨닫게 되면 자신의 무관심과 완고한 마음이 드러나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환희의 기쁨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오랜 경멸 때문에 망쳐지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그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305장은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입니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라는 귀한 가사를 만들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만일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뉴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절대적 필요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을 따라 살겠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네 현실에서는 다릅니다. 다 안다고 합니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 나도 잘 안다고 합니다. 한데 정말로 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더 이상 내 생각대로 내 편한 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하고 싶은 대로 가는 길은 결국에는 사망이요 저주입니다. 그 길을 돌이켜 생명과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지식과 그 어떤 가르침이 아무리 옳게 여겨지고 좋게 생각되어도 결코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세상의 지혜는 사망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어떤 세상의 지혜로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합니다. 그리고는 안 믿다가 망하고 맙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무엇이 옳다 싶으면 다른 것은 다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부모 가운데는 문제가 많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제대로 된 부모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보다도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아주 희생적인 부모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녀들이 싫다고 하는데도 해야 된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먹기 싫다고 하는데도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놀고 싶다고 하는데도 아니라고 공부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면 안 되는가요? 하지만 그것이 참된 부모의 자식 사랑입니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까 나처럼 살도록 하면 안 되겠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특히 자녀들에게 강조를 합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복된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아마 공통된 부모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복된 삶,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부분이 바로 신명기 28장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하면서 이어서 14절까지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큰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엇이 믿음입니까? 순종입니다. 그것도 세상의 학문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청종은 곧 귀담아 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떤 말씀은 마음에 달게 여겨지고 어떤 말씀은 마음에 쓰게 여겨지기도 하며 어떤 말씀은 마음에 시원하게 여겨지고 어떤 말씀은 마음에 아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씀 안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풍성하게 누리도록 만들어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습니까? 먼저 사랑하십시오. 먼저 베푸십시오.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섬김을 받고 싶습니까? 먼저 섬기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그것은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다시 말해서 모든 칭찬이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께로부터 찾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째 그러냐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둠을 밝혀주기 위해서 자신을 태우는 등잔불이 되어야 하지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고 베드로 사도도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여야 한다 그래야 너희도 비판받지 않고 정죄 받지 않으며 용서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 역시 “비방하지 말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비방하기가 쉽지 그런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내 뜻만 주장합니다. 하지만 내 뜻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합니다. 

오히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비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감싸 안으십시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난거리를 하나님께서 다 없애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새롭게 빚어져가는 모습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사 중일 때 어떻습니까? 온통 난장판입니다. 발조차 제대로 딛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내팽개쳐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공사하다가 다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사람이나 다치게 하는 이런 건물은 필요 없어 그러니 허물어 버려야 돼” 그럽니까? 하지만 이윽고 공사가 마무리 되고 난 다음에 보면 한 마디로 “와 예쁘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면 당연히 화목을 이루기 위한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쉽게 다투고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화목을 이루고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수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 힘만 가지고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내 힘으로 안 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주님이 우리를 도와 하나됨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겠다고 마음에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모든 복을 다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옛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한 용감한 젊은이가 나이 많고 지혜로운 추장에게 가서 “추장님. 저에게는 작은 쌍둥이 강아지가 있는데. 하나는 갈색이고 다른 하나는 얼룩이에요. 나는 이 두 놈을 싸움 붙이려고 해요. 추장님은 누가 이길지 알아맞히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네가 밥을 많이 먹인 놈이 이기겠지.” 그 추장 노인의 말은 성경에서 얻은 해답은 아니더라도 그 실제적 적용은 성경과 일치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서로 싸우는 두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매일의 경험에서 우리가 잘 먹이는 쪽이 이긴다는 것은 예측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헌신적이며, 거듭난 신자일 수 있으며, 심지어는 어떤 특별한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옛 성품이든 새 성품이든 우리가 먹이는 성품이 더 강해지며 다른 성품을 지배한다는 것은 정해진 사실입니다. 매일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옛 성품을 굶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찬양과 기도와 성장하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새 성품을 먹여야 합니다. 그 열쇠는 경건의 시간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삶이 금과 은 같은 인격으로 발전될 것이며. 우리가 승리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결국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시고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에게 온전히 사로잡히게 하신 것은 말씀 안에서 성령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을 때 우리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성령님이 만들어주십니다. 누구에게 그 능력이 나타납니까? 순종하는 자에게 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순종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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