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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위대한 삶의 순례(26) : 감람산 언덕 (눅 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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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26) : 감람산 언덕 (눅 19:41-44)


한국 민족을 가르쳐 우리는 ‘한의 민족’이라고 하고 한국 문화를 ‘한의 문화’라고 부릅니다. 정확하게 ‘한’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해답은 쉽지 않습니다. ‘한’을 영어로 번역하는 분들이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영어로 ‘han’으로 표기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많은 우리 한민족은 ‘한’을 설명하지 않아도 ‘한’을 이해합니다.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고 고통과 압제를 경험해온 우리에게 ‘한’은 실존적 경험이요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한’은 억제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 속에는 우리가 겪어온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한풀이 축제>가 늘 있어 왔습니다. 한은 갚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과거에 한국인이 모이는 곳에 언제나 볼 수 있었던 동네의 굿판, 놀이판, 씨름판은 언제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우리 나름의 희로애락을 해소하는 공동체의 한 풀이 축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축제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이 우리로 세계 사상 유래가 없는 거대한 월드컵 응원 문화를 창조해 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춤추고 싶을 땐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물은 과거의 한을 씻고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세 번에 걸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셨고(히5:7),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요11:35), 그리고 세 번째가 본문의 경우인데 장차 재앙을 면치 못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41절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우시며’라는 희랍어 단어 ‘에클라우센’(eklausen)은 단순히 ‘운다’는 의미이상의 뜻을 갖습니다. ‘소리를 내어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통곡하신 곳은 아마도 예루살렘 성이 잘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언덕의 한 장소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해 보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의 옛 성으로 내려오는 언덕의 길목(종려 주일의 여정, 베다니와 벳바게를 거쳐 감람산 정상을 넘어서 겟세마네 정원으로 내려 오는 길목)에 ‘눈물 교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곳으로 알려진 곳에 비잔틴 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1955년 이태리의 유명한 건축가 안토니오 벨루지(Antonio Berluzzi)가 새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교회 돔의 모양을 눈물로 만들었고, ‘주님의 눈물 교회’(Church of Dominus Flevit)(도미누스 플레빗-예수께서 우셨다)로 명명했습니다. 

해지는 석양에 이 교회당 내부에 들어가 전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는 것은 감동 그 자체라고 할 만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 때문입니까?


1.우리가 <알지 못한>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42절의 <숨겨졌도다>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44절의 <알지 못함>이란 단어입니다. 먼저 <알지 못함>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알지 못했단 말입니까? 

다시 43-4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사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40년 만에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AD 66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기 위해 저항의 봉기를 일으키자 3년 후인 AD70년 당시 베스파시안 로마 황제는 그의 아들인 디도(Titus) 장군을 파견하여 예루살렘을 3일 만에 토성을 쌓아 에워싸자 당시 유월절을 지키고자 각처에서 모여온 디아스포라들을 포함하여 일백만의 유대인들은 꼼짝없이 성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에 예수께서 예언한 그대로 디도장군은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명하였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려 110만명(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 다른 견해는 약 60만명)의 생명들이 학살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서쪽 벽을 제외하곤 돌 하나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이 재앙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땅의 백성들은 이 재앙과 심판이 다가 옴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가슴으로 그분은 울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의 알지 못함, 다가오는 재앙과 심판을 <알지 못하는> 그 무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동일하신 역사의 주되신 예수님께서 1950년(60년전) 초 여름 우리가 사는 이 한반도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니 당시 이 땅의 역사에서 일어날 참담한 한반도 전쟁의 비극을 알았더라면 울지 않았을 이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때 이 땅의 전쟁에서 한국군 희생자(사망, 부상, 실종)만 63만여명(사망자가 15만명), 남한 민간인 희생자는 99만명(사망자가 37만명), 유엔군 희생자가 15만명(사망자가 3만7천명), 미군 희생자가 13만명(사망자가 3만 3천명) 남쪽의 총 희생자는 191만명(사망자 59만명)에 달했습니다. 북한군 희생자는 80만명(사망자가 52만명), 중공군 97만명(사망자가 14만명), 북한 민간인 희생자는 150만명, 북쪽의 총 희생자가 327만명(사망자가 약 116만명), 남북 총 희생자가 무려 518만명(사망자 175만명)에 달합니다. 

그 외에 피난민 320만명, 전쟁미망인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천만 명을 낳은 6,25전쟁은 오늘 성경 본문이 그리는 유대-로마 전쟁을 능가하는 민족 전쟁사 최대의 비극을 남긴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전쟁을 왜 감수하느냐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없었다면 차라리 국가는 통일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땅에 15의 인구)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민족이 되어 오늘의 북한 주민처럼 언론의 자유도, 집회의 자유도, 주거 이동의 자유도 없는 철저하게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지는 독재 정권아래서 자유도 빵도 없는 동물 같은 생존을 이어가고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디도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 한 무리의 유대인들은 과거 6, 25전쟁 당시 중국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시작하자 무려 300만명의 북쪽의 동포들이 남으로 피난행렬을 떠났듯, 예루살렘에 살던 약 천 여명의 유대인들이 서둘러 예루살렘에서 남쪽 사해 바다 방향에 위치한 유명한 천연의 요새 산성 맛사다 언덕(해발450m)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거기서 로마의 실바 장군이 이끄는 10군단과 대치하며 3년간의 항전을 이어가다가 AD 73년 로마 군단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되자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페트릭 헨리의 스피치를 연상하게 하는 유명한 연설을 남깁니다. 

“동지들이여 지금까지 우리는 참돠고 의로우신 야훼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방인 로마의 손에 죽거나 아니면 항복하여 그들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동지들이여,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합시다. 우리의 아내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은 채로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됨의 지식을 모른채로 죽게 하십시다.”

그리하여 극적으로 죽음을 면한 2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제외한 960명 전원이 그들 중에서 10명의 남자를 선택하여 그들을 죽이는 임무를 맡기고 마지막에 그들 열 명도 서로를 죽이는 장렬한 집단 자결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 맛사다 언덕은 지금도 이스라엘 군인들이 임관할 때 이 언덕에 올라 “우리는 다시 함락되지 않으리라” (We shall not fall again)“고 외치며 조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천년 전 이런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로 살아갈 예루살렘 시민들과 동족의 운명을 아시고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 또한 오늘의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너무나 값비싼 희생의 피가 흘려진 땅인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건립된 한국전 기념공원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고. 그런데 아직도 이런 자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사는 자신과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이런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2.우리에게 <숨기 워진>것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숨기운 것-무엇일까요? 평화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한 것이 다가오는 심판이었다면, 우리에게 숨기운 하나님의 해답은 평화의 주님이셨습니다. 

42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 숨겨졌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평화의 해답으로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지만 그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일찍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시는 순간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눅2:14에서 전달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는 진실로 평화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갖고 오셨습니다. 문제는 그 백성이 이 평화의 메신저를 거절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23:37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평화의 주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화가 약속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의미는 본래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도시가 평화를 알지 못하고 평화의 주님을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평화의 도시에서 예수님은 거절당하고 계십니다. 최근 개봉되어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회복>이라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그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그 무엇으로도 이 간극을 메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가 받을 진노를 대신하시고 십자가에서 평화의 중보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나 공동체는 물론 한 민족에게 진정한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나라는 자본주의 국가도 사회주의 국가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조국에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 가까운 통치를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 나라의 오늘과 내일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부리시는 종이 되어 백성들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6.25직전 우리나라는 1945년 조국 광복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고도 그후 조국을 재건하는 일보다 남북의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으로 세월을 낭비했고, 당시 조국의 교회도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다하기보다 소위 에큐메니칼 논쟁으로 인한 교파의 분열로 날을 새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6,25전쟁은 이 땅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북한 정권의 남을 향한 적화 야욕에 경계와 긴장을 풀지 않으면서도 평화의 노력만은 지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남북 화해의 도구로 평화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남북을 향한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숨기운 민족 평화의 비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이 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평화의 주인 예수님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숨겨져 계십니다. 이 예수를 자신의 평화로 구원으로 희망으로 알지 못하는 남과 북의 이웃들을 인하여 예수님이 우셨던 것처럼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우리 민족의 오늘과 내일의 평화요 희망이십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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