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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군(平和軍) (마 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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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군(平和軍) (마 5:9-12)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1. 경쟁인가, 협동인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60년이 되었지만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휴전 중일 뿐입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재산을 잃은 이들의 가슴에 흐르는 피는 아직 마르지 않았고,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어야만 했던 이들의 참혹한 기억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교류와 소통의 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그 길에는 장애물이 많습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여전하고, 국지적인 충돌도 끊이질 않습니다.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이들을 보면 참담합니다. 북한은 세 번째 권력 세습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체제의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남과 북이 함께 월드컵에 나가 축구 강대국들과 힘을 겨루는 모습을 보면서 참 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단 현실을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거울 이미지였기에 씁쓸했습니다. 

사실 유사 이래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없었습니다.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에 사람은 늘 경쟁관계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경쟁은 갈등을 낳게 되고, 그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되곤 합니다. 전쟁은 인간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영장류인 침팬지의 전쟁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미국의 미시간대 교수인 존 미타니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침팬지도 인류만큼이나 조직적이고 목적 추구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미타니 교수 팀은 우간다의 키발레 국립공원에 사는 150마리 규모의 침팬지 집단을 장기간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평소 서로 고함을 치고 힘자랑을 하며 놀던 침팬지 수컷 20여 마리가 10-14일마다 한 번씩 줄을 지어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컷 침팬지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다른 침팬지 집단 영역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매복해 있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무 꼭대기를 샅샅이 뒤지곤 했습니다. 그들에게 붙잡힌 침팬지는 죽을 때까지 집단 폭행을 당하고, 새끼는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힘겨루기였던 것입니다.(한겨레신문 2010년 6월 24일자 21면) 

공격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동물은 존속을 위해 경쟁도 해야 하지만, 협동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 속에 있는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면서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협동하고 양보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라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는 것이 경건임을 가르칩니다. 예언자들은 사회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겪는 약자들의 고통을 보며 분노합니다. 성문서 기자들은 약한 이들을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사회 정의야말로 평화의 길임을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꿈

한국전쟁 60주년을 지나면서 평화의 길을 생각해보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인의 당연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시기에 이사야와 미가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세상,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시85:10-11)을 꿈꾸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우리의 꿈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저는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시120:6-7)고 노래한 시편 기자의 탄식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늘 긴장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답답합니다. 

이번 주간, 평화에 대해 묵상하다가 인권운동가이자 반전평화운동가였던 존 바에즈(Joan Chandos Baez)가 부른 노래 <예루살렘>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마치 읊조리듯 부르는 바에즈의 감성적이고 호소력 있는 음성은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는 믿네, 그날이 오리라는 것을
사자와 어린 양이 예루살렘에서
함께 눕는 날

거기엔 바리케이드도 없고
철조망도 담장도 없네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영혼에 깃든 증오도 씻을 수 있네

나는 믿네, 그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칼을 내려놓으리라는 것을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물론 ‘평화 세상’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이런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평화의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서만 옵니다.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님은 “개똥같은 내일이야/꿈 아닌들 안 오리오 마는/조개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꿈을 비는 마음> 중에서)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팔복의 말씀 가운데 한 대목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홀로 자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깨진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인간론>>에서 “오늘날 절망적으로 ‘이 세계에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라고 묻는 자가 있다면, 누구에게나 ‘너는 할 수 있으므로 존재한다’는 대답이 주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는 할 수 있으므로 존재한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3. 키아바의 미소

칼 노락이 《키아바의 미소Le sourire de Kiawak》라는 그림책에서 들려주는 에스키모 소년 키아바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낚시를 하러 가는 키아바에게 아빠는 ‘오늘은 네 새끼손가락보다 굵은 물고기를 잡으라’고 놀리듯이 말합니다. 키아바는 좋은 낚시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얼음을 깨고 낚싯줄을 드리웠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아 실망할 즈음, 갑자기 줄이 팽팽해집니다. 열심히 줄을 당기자 아주 커다란 물고기가 올라왔습니다. 키아바는 우쭐해졌지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방금 잡은 물고기가 자기를 보고 미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키아바는 차마 미소짓는 물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로 물고기를 풀어주었습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아빠의 놀림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소 짓는 물고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큰 곰 한 마리가 나타나 키아바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아빠는 겁을 주어 곰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무섭게 소리를 지를수록 곰도 점점 더 사납게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때 키아바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키아바는 곰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곰은 놀랐습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이, 더구나 화가 나 있는 곰에게 미소를 짓다니. 곰은 어찌 해야 할지 몰라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아빠는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키아바는 좋은 낚시꾼은 아니지만 마술사라고 말했습니다. 키아바는 여러 사람의 칭찬에 우쭐했지만 곧 잊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먼 곳에서 온 사냥꾼이 두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폭풍이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얼음집을 두껍게 쌓느라 정신이 없을 때, 키아바는 조용히 마을을 떠나 폭풍을 만나러 갔습니다. 불어오는 폭풍을 본 키아바는 무서워서 몸을 움츠렸지만, 곧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폭풍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폭풍은 그 어이없는 광경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너 같은 어린애의 미소가 나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폭풍이 호통을 쳤습니다.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잖아요?” 키아바의 대답에 폭풍은 어이가 없어서 웃기 시작했습니다. 웃느라고 바람을 불게 하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키아바는 마을로 돌아가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아주 편안하게 잠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동화 속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사나운 곰도 거센 폭풍도 키아바의 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키아바의 무기는 천진함과 무력함입니다. 오늘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천진함과 무력함은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속마음을 숨기는 교묘함이 필요하고,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창4:23)고 자랑했던 라멕의 노래가 세상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폭력도 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폭력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의 선의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을 과시하거나 힘을 사용합니다. 이게 세상 논리입니다. 그런데 힘들이 충돌하는 곳에서는 평화의 나무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샨티 세나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른 세상,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일하다가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온갖 비난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모든 폭력과 전쟁, 그리고 죽임의 세력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소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 경우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듯이,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것은 무조건적이고, 타협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기 전 예수님이 인류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평화 만들기는 기독교인들의 일상(full-time vocation)이 되어야 합니다. 헨리 나웬 신부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오늘날 누구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기독교인의 평화 만들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에게서 빠져나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려는 이들은 자기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이 치유될 때,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이 잦아들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 평화의 선물을 가져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지지 않고는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낀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평화 만들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제 목회의 꿈이 있다면 우리 교우들 모두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기쁨의 빛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완수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운동을 시작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평화를 꿈꾸는 이들이 무력하면 안 된다며 ‘샨티 세나’를 제안했습니다. 인도 말로 샨티는 평화이고 세나는 군대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평화군平和軍’이 되겠습니다. 그가 이런 조어를 만든 것은 베다 경전에 나오는 한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오 불행한 자들이여, 당신들의 말은 군대의 뒷받침이 없구나.”

이 구절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일 겁니다. 평화가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고, 또 그 일에 헌신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샨티 세나는 무언가를 행하기로 결심한, 또는 필요하다면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군대입니다. 일반 군대가 규율과 조직, 명령자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 위에 기초한다면, 샨티 세나는 가슴에 넘치는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평화의 군대로 부르십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발에는 평화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샨티 세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이들이 되십시오. 사람들 가슴에 숨어있는 착하고 따뜻한 기운을 불러내십시오. 성령의 바람은 골짜기에 누워 서걱이던 마른 뼈들을 일으켜 군대를 이루게 했습니다. 마른 뼈처럼 메마른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도 평화의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전쟁을 말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평화를 말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사랑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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