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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로 이 사람이다 (삼상 16: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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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사람이다 (삼상 16:1-3, 11-13)


대학시절, ‘사회학’을 접하게 되면서 ‘社會變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나란들 예외가 있겠습니까만, 우리나라는 그 어느 나라보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은 나랍니다. 해방 후, 남북분단, 6․25전쟁을 거치면서, 아직까지도 좌우이념 충돌이 존재하고 있는 나랍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나라는 세계가 다 놀라는 고도의 경제성장(압축 성장)을 이루어내기도 했습니다. 

빈곤의 시대였던 30여년 전만해도, 경제적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교육이었습니다. 다 공부할 수 없던 시절, 공부하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절엔, 공부를 하기만 하면, 출세는 ‘따 놓은 堂上’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못합니다. 경제력이 되다 보니, 너도 나도 다 공부합니다(대학진학율, 85%). 교육, 공급과잉시댑니다. 10여 년 전만해도, 사법고시를 패스하기만 하면 최고의 성공을 보장받았습니다(동네 어귀에, 祝 司法考試合格 현수막). 요즘은 로스쿨 時代지만, 로스쿨이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는 시댑니다. 시대가 변한거지요. 

이스라엘도, 시대변천을 맞습니다. 백성들이 요구해서 맞은 시대변홥니다. 그런데, 시대변천 과정에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시대변화의 기준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주변국가들(아말렉, 블레셋, 에돔, 모암, 암몬, 수리아 등)에게서 변화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주변국가를 벤치마킹하면서 찾아낸 人物이, ‘사울’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울을 자기들의 왕 삼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원했던 사울은, 軍事的 能力이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주변국가 어떤 왕, 장군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將軍狀, 外貌와 身長에서 이스라엘 최고의 인물).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기 손으로 제비 뽑아 세운 王 사울이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겁니다(외모는 괜찮았는데).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어찌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집권초기(왕이 된 지, 2년 만에) 하나님께 결정적으로 버림당하고 맙니다. 이유는 그의 中心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 1절(다윗의 시)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안 그런 척 하면서 은근히 하나님을 무시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면서도, 자기변명을 하던 사람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 卿(Sir)이, “미래의 제국은 마음의 제국이다”(The empires of the future are the empire of the mind)”는 명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당하자, 사무엘은 너무 낙심하여 눈물로 날을 보냅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희망이 꺾어버린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울에게 닥칠 개인적인 비극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폐위로 또 다시 혼돈에 빠질 이스라엘의 將來가 염려스러웠던 거지요. 사무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눈물로만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언제까지 네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낸다. 이유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나를 위한 한 王을 보아두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셨습니다(삼상 16, 1하).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령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서슬 퍼런 사울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데, 사울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입니다. 사무엘이,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오해받지 않을 좋은 방도를 일러주십니다. “암송아지를 끌고 이새의 집으로 가서, 내가 여호와께 제사 드리러 왔다” 하라시면서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으라”하셨습니다(삼상16, 2-3).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나를 위한 한 왕을 보아두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새의 가문을 주목하여 보고 계셨다는 말일까요? 언제부터 여덟 아들들 中 하나를, 하나님을 위하여 눈여겨보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어느 순간에 갑자기 보시고, 결정하신 일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준비가 철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언제부터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한 집, 이새의 집을 주목하고 계셨습니까? 士師時代, 하나님을 王으로 섬기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時代, 하나님의 눈은 계속해서 사람을 찾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찾은 집, 그 사람이 누굽니까? 기억하시지요? 사사시대 중,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은 人物이 누굽니까? ‘오벳’이라는 人物입니다. 그 ‘오벳’이 어떻게 태어난 인물입니까? 나오미의 큰 며느리, 異邦女人, 모압 사람 ‘룻’ 아시지요. 그 룻이 자기 고국 모압과 고향, 모압의 神 ‘그모스’를 버리고, 어머니의 나라 이스라엘, 어머니 고향 베들레헴으로 와서,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긴 女人 아닙니까? 

‘룻’이 베들레헴에 와서 만난 베들레헴의 有力한 者(이쉬 깁보르 하일) ‘보아스’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룻과 오벳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믿음을 가졌던 사사시대의 대표적인 人物입니다. 그 집안에, 그 후손 중에, 그 위대한 믿음의 系譜가 綿綿히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오던 그 믿음의 계보를 주목하셨던 겁니다. 混沌의 時代, 하나님 버리고 각각 자기 所見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시대에, 하나님 敬畏하던 룻과 보아스의 집과 그 家門을 왜 주목하여 보지 않으셨겠습니까?(라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이새의 집에 간 사무엘이, 이새와 그 아들들을 스스로 성결케 한 후에, 화목제사의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화목제사는,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몫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제물은 제사 드린 사람에게 되돌려주어, 그 제물로 잔치를 열어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제사입니다. 그 화목제사 자리에서, 택한 자에게 기름 부어 왕을 세우라는 특급비밀을 이행해야 했습니다. 이새의 아들들 중에, 기름 부어 왕을 선택하는 일은 이새도, 그의 아들들조차도, 성읍 장로들조차도 전혀 모르던 일입니다. 사무엘도,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입니다. 제사가 끝나고 잔치 음식 먹을 시간이 되자, 사무엘은 잔치 진행을 멈추게 하고는, 이새의 아들들을 그 자리에 한 사람씩 부릅니다.

제일 먼저 이새의 長子, 엘리압이 왔습니다.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이 속으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者가 果然 主님 앞에 있도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합니다(7). “그의 容貌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外貌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사무엘조차도, 사람 보는 눈이 자기 時代 이스라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도, 外貌를 重視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다지만, 旣往이면 다홍치마라고, 따질 건 다 따지잖습니까? 우리 시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大衆文化, 精神, 價値, 우리도 중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시대의 大衆文化, 가치기준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義를 구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4일, ‘광부의 딸’ ‘줄리아 길러드’라는 여성이, 호주 歷史上 첫 女性總理가 되었다고 합니다. 길러드는, 그녀는 영국 웨일스에서 탄광 광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4살 때, 기관지폐렴을 심하게 앓았는데, 딸을 위해서 아버지가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 이민 간 곳이 호주랍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영국계이민자입니다. 광부의 딸 출신입니다. 그녀가 호주 역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있잖겠습니까?(출신국적, 출신집안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지도력이 중요한 것)

사무엘조차도, 사람을 外貌로 판단하고 왕 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새의 집에 오기 전까지도, 하나님께 버림 당한 사울 때문에, 애곡하며 지내지 않았습니까? 한번 실패를 경험하고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기준을 버리지 못했던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일러주신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은, 외모가 아닌 사람의 中心을 보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안 사무엘은 즉시, 그때까지도 버리지 못했던 ‘자신의 기준’을 깨끗이 포기합니다(포스트모던시대의 感性中心의 信仰도 매우 위험;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감성도 중요하지만, 지정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 결핍 되면 망합니다). 말씀을 받자 사무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누군지에 집중합니다.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즉시,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다”합니다. 이새가 ‘삼마’로 지나가게 합니다. 역시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사무엘이 말합니다.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다.”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는 이미 사울의 군대용사로 뽑혀 참전 경험을 가진 자들; 이새의 집안에서는 대내외적인 입지가 분명한 자들) 

그렇게, 일곱 아들들이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없었습니다(“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다”). 사무엘이 묻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말째가 남아 있긴 한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보시겠다면야 상관은 없으시지만, 크게 기대할 것이 없는 아입니다. 그래도 그 아이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런 뉘앙스의 말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급한 마음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命합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자리에 앉지 않겠다”합니다. 다윗이 오기까지 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리겠다합니다. 왜, 사무엘은 이새의 말째 아들, 다윗을 데려올 때까지 식사자리에 앉지도 않겠다했을까요?(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구하기 위함이지요) 

다윗이 올 때까지 얼마 동안이나 기다렸을까요? 다윗이, 양 치며 지내던 곳이 어딥니까? 거친 유다광야입니다. 유다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양과 더불어 지냈습니다. 유다 광야 어디쯤에서 양을 쳤는지는 알 순 없지만, 베들레헴에서 유다 광야까지는 상당한 거립니다. 사무엘과 이새, 베들레헴 城邑의 모든 長老들이, 몇 시간이나 기다렸을까요? 대여섯 시간 이상은 족히, 기다렸을 겁니다. 

기다리는 시간, 사무엘과 이새, 모인 베들레헴 城邑 모든 長老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 기다리는 시간을 대단히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자리에 앉지 않겠다”는 말로, 그 기다림의 시간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새 집안의 말째 아들, 다윗? 그는 牧童 아닌가? 아직 어린 아이가 아닌가? 이 집안에서도 크게 인정 못 받는 아인데…(별 생각). 여러분 牧童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아십니까? 목동은, 한 폭의 牧歌的인 그림을 연상시키는 낭만적인 직업이 아닙니다. 

목자는,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不淨한 일을 행하는 者입니다. 사람들로부터 不信의 對象으로 취급받던 사회적 弱者입니다. 賤民입니다. 다윗이, 이새의 집에서 그런 대접 받던 말째라는 얘깁니다. 형들 입장에서 보면, 말째(끝 동생)입니다. 집안분위기로 보나, 사회적인 분위기로 보나, 다윗은 아웃사이더(outsider)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말째를 기다리느라, 이새의 온 집이, 베들레헴 城邑 모든 長老들이, 화목제 잔치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대여섯 시간 흘렀을까요? 헐레벌떡 부름 받은 다윗이 달려왔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땀 냄새로 찌든 옷 그대로), 상상해 보세요. 양 치다 말고 뛰어온 목동 다윗, 흙과 양털로 범벅 된 옷 입은 채, 영문도 모르고 불려온 다윗 말입니다. 그 다윗을, 하나님도 오랜 시간 침묵하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무엘도/ 이새도/ 베들레헴 城邑 모든 장로들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니 온 이스라엘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던 그가 왔습니다. 그때 무슨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다윗이 오자, 곧바로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했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바로 이 사람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했습니다(행 13, 22). 하나님의 이 말씀이, 쉽게 나온 말씀이겠습니까? 성경은, 사무엘 앞에 달려와 선 다윗을 가리켜,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말합니다(미켈란젤로, 作 다윗상). 그러나 이 말이, 요즘 쓰는 말처럼, 다윗이 얼짱이고, 몸짱이었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 속에는, 그의 兄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 중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하는, 다윗의 중심에 가득 찬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믿음,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다윗의 삶을 그리는 문학적인 표현 아닐까요?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누굽니까? 사무엘서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 합니다. 여호수아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우상을 버리고 주님만 섬기는 사람’이라 합니다. 

왜 이런 사람 찾으실까요? 다윗과 같은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섭니다. 우리는, 세상이 찾고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침묵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인지요? 이새가 기다리던 아들인지요? 유다 성읍 모든 장로들이, 숨죽이며 기다리던 그 인물인지요?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사는 자인지요? 약속의 땅을 일구며 사는 자들인지요? 하나님이 찾고 기다리시는 자가 누굴까요? 아멘. 

하나님, 우리도 다윗 같이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고,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자 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정결케 하옵소서. 우리의 삶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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