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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힘입지 못한 삶 (삼상 27-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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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힘입지 못한 삶 (삼상 27-28장) 
 
 
여호와께 기름부음을 받은 두 지도자가 공존하는 상황은 27-31장에서 막을 내립니다. 먼저 27-28장에서는 하나님을 힘입지 못하는 두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째 살려주면서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하려는 자들은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26:19). 유대 땅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일임을 공개적으로 잘 말했지요(참조. 22:5). 그런데 정작 본인은 속으로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1)이라고 결정합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1). 오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가 약해진 것이지요. 이에 다윗과 “함께 있는 육백인”(2)은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3), 미친 짓까지 해가며 겨우 탈출한 기억이 있는 가드 땅으로 다시 들어갑니다(21:13, 15).

다윗의 상황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사울은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했지요(4). 이때부터 다윗은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일 년 넉 달”을 머물게 됩니다(6-7). 그리고 그 동안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했습니다. 옛적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족속들이었기 때문인데 하나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지요(8). 하지만 사람은 모두 죽이고 동물과 소유품들만 챙긴 것은 이스라엘에 해가 되는 족속들을 침노하는 습관이 아기스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9, 11). 다윗은 “유다 남방”지역을 중심으로 약탈한 것처럼 적당히 둘러댄 덕분에 점점 아기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10, 12).

시글락에서 다윗은 오랜 광야 생활에서 누리지 못한 평안한 삶(?)을 삽니다. 도망자 신세에서 왕의 신임을 얻으며 고소득을 올리는 삶이 되었으니 성공했습니다. 두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된 셈이지요. 하지만 아슬아슬한 이중생활 속에서 과연 마음이 평안했을까요? 이제 다윗은 여호와께 묻는 대신 “그 마음에 생각”(1)과 “그의 생각”(11)을 쫓아 행합니다. 이방 왕인 아기스가 더 순수해 보일 정도로 약삭빠른 꾀와 적당히 둘러대는 말로 살아갑니다. 거짓말이 탄로 날까 두려워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9) 모두 학살해버리는 잔인한 정치적 면모까지 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긴 했지만 전혀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모습이 되었지요.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윗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하지만 불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기중심적이고 말만 잘하는 말쟁이의 모습을 시글락의 다윗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삶, 오히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 거짓되고 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시글락 시절에 지은 시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당시 다윗의 영적 슬럼프를 잘 말해줍니다. 이처럼 성도는 당면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적절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백성다운 구별성, 곧 거룩성은 점차 상실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고비만 믿음으로 견디면 되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네 삶에도 이러한 순간들이 있지요.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일지라도 기복 없이 항상 모범적으로 살아내지는 못하니까요. 실컷 믿음의 말을 해놓고서 정작 자신은 속으로 두려워하기도 하고, 못난 자신의 모습이 미워서 더 반항적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지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는 말씀이 그래서 있나 봅니다. 연약해진 다윗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답지 못함을 지적하기보다 그의 옆에서 조용히 두 겹 혹은 삼 겹줄이 되어줄 사람들일 것입니다.

자기 꾀로 살던 다윗은 이제 자기 꾀에 빠지게 됩니다. 아기스가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할 때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도 “군대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지요(28:1). 승낙하면 장차 자기 백성이 되어야 할 하나님 백성과 싸워야하고 거절하면 지금까지 블레셋 땅에서 쌓은 모든 것을 몽땅 잃을 수도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일단 아기스에게 “당신의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2)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정치적 답변을 해놓습니다. 이제 다윗은 어떻게 될까요? 잔뜩 궁금한 시점에서 본문은 마치 카메라 앵글을 돌리듯 획 돌려서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진퇴양난에 빠진 사울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사무엘의 생전에 계속 당하기만 했던 블레셋 군대가 진격한 것을 보고 사울은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다(4-5).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지요(6). 잠언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나”(잠 28:9)고 했는데, 말씀을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울의 기도가 꼭 그러했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는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기서 언급되는데, 무척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이제라도 진실하게 회개했더라면 응답받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마치 혹시나 해서 기도해봤는데 역시나 응답이 없자 쫓아내었던 “신접한 여인”을 찾는 모양세지요(3, 7).

“엔돌”은 “수넴”의 블레셋 진영에서 불과 8km 떨어져 있습니다(4, 7). 하지만 사울은 “변장”해서 “밤에”(8), “종일종야에 식물을 먹지”도 못한 채 기어이 그곳까지 찾아 갑니다(20). 처벌이 두렵다며 사술 행하기를 거절하는 신접한 여인에게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10)라고 격려까지 합니다. 무지와 신성모독의 절묘한 조화였지요. 하나님께서는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레 20:27)라고 명하셨는데 여호와께서 용납지 않으시는 일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도록 권면했으니까요(신 18:9-14). 사울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이나 방법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사술은 하나님께서 인생과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자료를 분석해서 통계적으로 객관적인 미래를 예측함으로 끝내지 않고, 사람의 운명을 정하는 신비한 다른 힘과 그것을 수정할 수 있는 용한 술수가 있는 것으로 단정합니다.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신 진리를 모두 무시해버립니다(전 7:14; 잠 20:24). 사주, 관상, 궁합, 운세,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하는 것, 타로점, 행운의 부적 혹은 독특한 현상의 변화로서 장래 일을 점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하지요.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악령의 세력이 함께 있습니다.

영매가 “한 노인”(14)을 불러 올렸다고 했지만, 죽은 후에 낙원에 거하는 성도의 영혼은(눅 23:43), 신접한 자가 부른다고 해서 “땅에서 올라오는”(13) 일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눅 16:27-31). 다만 귀신들이 죽은 자를 귀신같이(?) 흉내 내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불신한 사울이 사무엘과 다음날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19)는 것도 맞지 않지요. 하지만 사울은 겉옷 입은 한 노인이라는 말에 사무엘로 간주하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15b)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선지자를 찾고 하나님께 물었더라면, 배울 기회들이 있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했었더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진즉에 생각하며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와서 모든 은혜의 통로들이 막힌 후에 신접한 자를 통해 배우려는 그가 참으로 딱합니다. 사울에게는 “심히 두려워함”(20)과 “심히 고통함”(21)만 남았습니다. 괜히 신접한 자를 찾았다는 후회도 되었겠지요.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울은 마치 예수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처럼 “그 밤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요 13:30; 25).

역대상 10장 13-14절은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윗도 말씀을 지키지 않고 여호와께 묻지 않은 때가 있었지만 사울에게는 일평생의 두드러진 특성이었습니다. 단 한번 여호와께 묻는 모양을 취했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경은 여호와께 묻지 않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했을 마지막 기회에 그는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했습니다(왕상 21:29).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는, 이처럼 심판을 자초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삶을 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귀머거리 같은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갖 죄로 범벅이 된 고린도 성도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고 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이며 가까이 계시는 때라고 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순간인 것이지요.

일반 윤리에 기준을 두면 본문의 다윗이 사울보다 더 악합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는 일은 도덕적으로 악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시면서도 사울은 더 이상 살려둬서는 안 될 것으로 판결하셨습니다. 성경을 윤리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위기에서도 사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넘어서서는 안 될 하한선이라면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묻고 순종하는 삶이 성도가 목표로 삼아야 할 상한선이지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낙심이 없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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