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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고향세(故鄕稅)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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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고향세(故鄕稅) (히 11:13-16)


출향인사(出鄕人士)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은 고향을 떠나 사회적 지위나 사회적 활동이 많은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제 고향 면사무소에 들릴 일이 있어 갔더니 제 이름이 출향인사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출향인사라는 말을 들을 때 저에게 제일 먼저 와 닿는 일차적 감정은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고 댓가를 지불하고 가야 된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일종의 고향세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향의 자원을 이용하여 타향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소득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른바 고향세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강제성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학교 동문회비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 대한 학문적, 사회적 책임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김학은 교수의 '고향세'라는 수필에서 문제는 자원을 얻은 쪽과 빼앗긴 쪽 사이에 정산의 가능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양봉업자와 과수원의 예를 들었습니다. 세계는 미국 유학 때문에 자국의 우수한 인재가 미국으로 유입되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상이 가장 심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인도라고 합니다. MIT 대학의 인도출신 경제학자 바가와티가 이들에게 유엔세를 부과하자고 제안한 것이 벌써 70년대부터였다고 합니다. 

고전문학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남원 고을에서 춘향과 함께 선정을 베풀고 옛날보다 잘사는 고을을 만들든지 아니면 서울에 머물면서 남원 고을에 고향세를 보내야 경제학적으로 들어맞는다고 했습니다. 
세, 혹은 세금은 조세(租稅)원칙에 의해 강제성이 수반됩니다. 그렇다면 고향세는 강제성이 불가피한 납세의무 보다는 고향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좀더 오늘 설교와 가까운 정의를 내린다면 고향에 대한 거짓 없는 양심적 감사와 혹은 신앙적 보은의 발로(發露, 겉으로 드러남)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Ⅰ. 아브라함의 고향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1)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했을 때 그는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즉시 떠난 곳이 하란인 것을 감안할 때 우르라고 단정 짓기는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우르와 하란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2) 혈육에 대한 사랑입니다. 
창세기 12장 5절에 『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골육과의 평화를 위하여 양보의 미덕을 보였습니다(창 13:8-9). 조카 롯이 소돔 땅에서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야음을 타서 집에서 기르고 연습한 318명의 정예 수하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가서 인민과 빼앗긴 재물을 찾아왔습니다(창 14:14-16). 

3)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3-14절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지시한 산,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진행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했습니다.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 『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고 했습니다. 

4) 내 고향 내 족속에 대한 신앙적 우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 3-4절에 『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부를 보기 위해 자신의 늙은 충복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을 자기 혈통과 결혼시켜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의 방종한 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족속들의 도덕적 문란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심은 가나안 땅에서 자부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우상 숭배하는 가나안인과 혼인을 금지했습니다(출 34:16; 신 7:3). 신약에 와서도 불신자와의 결혼을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고전 7:12-24; 고후 6:14). 하란 지역은 비록 혼합주의 신앙이긴 하지만 가나안 지역보다는 신앙이 좋다는 아브라함의 판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지역을 내 족속이라고 한 것은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립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살고 있지만 자기 고향의 신앙을 인정하는 아브라함입니다. 

Ⅱ. 이삭의 고향세는 부친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 는 것입니다. 

1)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창세기 24장 6-7절에 『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이삭이 엘리에셀과 함께 온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인 것은 이제부터 리브가에게 새 안주인으로서 모든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삭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효자였습니다. 이삭이 탄생할 때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창 17:17). 사라가 죽었을 때 이삭의 나이가 37세였습니다(창 23:1).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3년 동안 애도했다는 결론입니다. 왕을 포함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의 죽음도 30일, 70일이 애도 기간인 것(창 50:3; 민 20:29; 신 34:8)을 감안할 때 모정에 대한 이삭의 지극한 효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이삭은 장남 에서의 결혼을 마음에 근심했습니다. 
창세기 26장 34-35절에 『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고 했습니다. 
족장시대에는 40세가 결혼 정년기인 것 같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의 결혼이 못마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순수한 영적 순결을 저버리고 가나안 헷 족속 여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7장 46절에 『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의 당시의 고민과 걱정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일부다처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이방 문화에 오염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3) 이삭이 차남 야곱의 결혼을 위해 고향 밧단아람으로 보냈습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고 했습니다.
이삭은 혈통의 순수성과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800km가 넘는 고향인 밧단아람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Ⅲ. 야곱의 고향세는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부친 이삭의 하나님, 곧 자신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1) 야곱은 신앙의 아내를 얻기 위해 부모님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28장 10절에 『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12장 12절에 『 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라고 했습니다. 
그곳의 삼촌 집에서 20년 세월 동안 고생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용단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서원했습니다. 

창세기 28장 20-21절에 『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의 20년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 앞서 보냈습니다(창 32:3). 

원한에 사무친 에서는 야곱의 소식을 접하고 사백 인을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먼저 얍복강 나루에 건너게 했습니다. 야곱은 그날 밤에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창 32:24).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 사람이 날이 새려 하니 나를 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창 32:25-26). 

야곱은 그 곳에서 그 사람에게 '이스라엘'로 개명(改名)을 명받았습니다(창 32:28). 그 곳에 나타났던 그 사람은 신약에 나타날 제 2위 되신 성자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32장 30절에 『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고 했습니다. 마침내 야곱과 형 에서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2)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장사할 것을 유언했습니다. 
창세기 49장 29절에 『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고 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장사된 곳입니다.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장사된 곳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도 그곳에 장사했습니다(창 49:31). 그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입니다. 야곱이 임종시에 자신의 거처에 대해서 유언한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후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의 고향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약속의 땅 가나안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후손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네 자손이 사 대 만에 이 땅에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창 15:16). 
창세기 46장 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고 했습니다. 

Ⅳ. 요셉의 고향세는 증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조부 이삭의 하나님, 부친 야곱의 하나님, 곧 자신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해 골을 가나안 땅에 장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5절에 『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요셉의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뼈를 40년 광야 여정 동안 메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요셉의 뼈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약속의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32절에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고 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와서 하몰의 아들들에게 땅을 샀습니다(창 33:18-19). 
요셉이 자신을 가나안 땅에 이장하도록 당부한 것은 그의 깊은 신앙심 때문입니다(히 11:22). 
요셉은 훗날 자신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서 그곳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창 15:1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족장들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라고 했습니다(창 23:4). 야곱은 바로에게 나그네 길,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이라고 했습니다(창 47:9).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한사코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이 아닌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하늘나라가 궁극적 고향인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충복 엘리에셀을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보내면서도 이삭을 동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고향을 영구한 고향으로 생각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 땅의 고향만을 생각했다면 머나먼 이국 땅, 가나안에 묻히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나안, 곧 하늘나라를 생각하고 약속의 땅에 묻힌 것입니다. 이들의 고향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습니다. 돌아갈 영원한 고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곳을 가리켜 더 나은 고향, 즉 더 좋은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평생에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고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히 11:10). 

우리는 출향인사들입니다. 출향인사는 고향세가 있습니다. 세금은 징수하는 강제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납세의무가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키워준 고향, 언젠가는 돌아가야 되는 고향에 대한 보은과 감사입니다. 

①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것은 책망의 대상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요 6:38-40).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약속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확인할 뿐이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② 우리의 고향세는 우리의 거룩입니다. 회개하는 자가 거룩한 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미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시편 7편 12절에 『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장 5절에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2장 16절에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절에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고 했습니다. 

③ 우리의 고향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곧 교회운동입니다. 우리의 고향이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때 이 말은 비약된 것이 아니고 많은 말이 생략된 표현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세금은 자발적이 아니면 물리적인 강제성이 따르게 됩니다. 누가복음 14장 23절에 『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했습니다. 

④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세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말라기 3장 9절에 『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⑤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늘나라에서 온 출향인사들입니다. 출향인사들은 고향의 요구에 충족한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 아쉬워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무슨 정보를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우리를 통해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기도해서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의존한다는 표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연보생활입니다. 언제나 고향은 출향인사들의 무한한 발전과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될 영원한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눅 10:20) 것도 일종의 고향세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는(마 6:33) 그것 또한 고향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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