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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사랑하나? (엡 5: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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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하나? (엡 5:28-30)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에베소서 5:28-30

저는 지난주에 아세아복음주의연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온이 무려 섭씨 48도였던 것입니다. 목욕탕 온탕이 보통 43도 정도인데, 48도가 갑자기 저를 치니까 아찔했지요. 게다가 공기 중에는 먼지가 가득 했어요. 사람들이 그 먼지 속을 걸어 다니고 길바닥에 누워 잠을 자더군요. 6.25 때 우리를 도왔던 인도보다 지금 우리나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16개 참전국의 젊은이들과 우리의 부모님, 형제들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다. 특히 UN군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연합군의 북진을 가능하게 한 맥아더 장군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맥아더 장군의 조카가 국무성에서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당시 국무장관이던 덜레스 장관이 그의 집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의 부인이 받아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제 남편은 평일에도 집에 없고, 토요일에도 집에 없고, 일요일에도 집에 없고 심지어 지금 같은 밤중에도 집에 없습니다.” “남편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국무성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어요." 덜레스 장관은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네, 지금 뭐하고 있는가?” “전쟁 중이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네,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가정 전선이 무너졌어! 다시는 밤에 일하지 말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가정전선이 무너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까? 일에 너무 집착하면 가정전선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미 무너진 가정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6개월 동안 가정을 생각하고 가정을 위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해 주시는지 생각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족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는가? 본문에 “네 아내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변호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겠습니까?”라고 여쭸을 때 예수님이 “네가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둘은 같은 가르침입니다. 나를 제외한 내 가족과 모든 사람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29절). 우리는 우리의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각자 육체를 소중히 여겨서 매일 5-6시간 잠을 재웁니다. 하루 세 끼 좋은 음식도 먹입니다. 매일 세수하고 샤워도 하고 머리도 빗습니다. 옷도 단정히 입습니다. 어떻게든 나를 좋게 보이려는 노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형제들도 내가 나를 잘 돌보는 것처럼 돌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양육한다(기른다)”, “보호한다(지켜준다)”라는 두 단어가 있는데, 이 둘을 합해 ‘보양’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양육은 nourish, 즉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인다는 뜻입니다. 보호는 cherish, 즉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귀하게 돌봐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도 가정생활에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듯 잘 먹이고 잘 돌봐줘야 합니다. 

잘 먹이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것입니다. 입에는 맛이 있으나 해로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기름에 튀겨 놓은 음식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맛있지요. 시금치는 그렇게 맛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좋은 것을 잘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실 남자들의 먹는 것은 거의 아내에게 달려 있습니다. 남자들은 음식을 할 줄도 모르고 무엇을 먹는 게 좋은지 잘 몰라서 차려 놓은 것들을 그냥 먹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30년 정도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입에 맛있는 것만, 쉬운 것만 계속 만들어 먹였다면 우리 모습이 어떻게 될까요? 주부들에게 죄의식을 주려는 게 아니라 식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요리를 잘 해요. 제 딸이 저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엄청나게 큰 햄버거를 한 입 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요리 잘 하는 남편을 만나서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덧붙였어요. 남편이든 아내든 누가 요리를 하든지 가족들에게 영양분 있는 것을 먹여야 합니다. 제 아내는 맛있다고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영양가가 있고 몸에 좋아야만 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먹어서 조금이라도 몸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예 사지를 않아요. 저와 자녀들을 위해서 좋은 음식만 먹이려고 하는 아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몸만 잘 먹는다고 인생이 행복한가? 아닙니다. 마음의 양식도 좋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마음의 양식은 주로 눈으로 보는 것(책을 읽는 것, TV, 인터넷), 귀로 듣는 것(말을 듣는 것)으로 얻습니다. 그런데 몸은 매일 보약을 먹으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은 쓰레기 같은 것을 잔뜩 집어넣는다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하면 가족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영양가 있는 좋은 것을 골라서 봐야 합니다. 안 좋은 것이 보이면 얼른 돌려야 합니다. 계속 보면 눈으로 들어가서 마음에 박히고, 마음에 박힌 것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유명한 소설이라고 아무거나 마구 읽어 놓으면 좋지 않은 자세한 내용들이 머리에 박혀 정신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요새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쓰레기를 마구 쏟아놓는데 그것을 읽어서 무슨 도움이 됩니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마음의 양식도 깊이 상고하고 쓸데없는 것들은 아예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양식을 잘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헌신하고 자신을 살펴 잘못되고 더러워진 부분을 씻어내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정기적으로 조용히 자신을 살피는 이 예배시간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야 합니다. 자주 접할수록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건강해지고 육신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늘 말씀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공부하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길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인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살아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씻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말씀을 접하면 말씀이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얼굴에 묻은 티와 먼지를 다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말씀을 접하여 하나님 앞에서 때를 씻어내야 합니다.

언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언어와 죽음의 언어입니다. 죽음의 언어는 사람을 낙심시키고 분노하게 만들고 어지럽힙니다.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를 쓰도록 의식적으로 부지런히 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내 입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언어들이 나옵니다. 본능에 맡기다 보면 가정이 깨지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살리고 생명을 불어 넣는 생명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생명의 언어는 어떤 말들인가?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실한 말, 즉 진리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했으면 숨기지 않고 실수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실체)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Reality manifests itself. 거짓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집니다. 진실보다 더 ‘살리는 언어’는 없습니다. 우리의 말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오히려 화평의 말, 덕을 세우는 말, 은혜로운 말, 격려의 말, 사랑을 표현하는 말, 즐거운 말, 축복의 말, 겸손한 말, 지혜로운 말, 즉 생명의 언어로 사람을 살리고 힘을 불어 넣어줘야 합니다.

‘죽음의 언어’는 비판 비난의 말, 낙심시키는 말, 무시하는 말, 저주하는 말, 기분 나쁘게 하는 말들입니다. 더러운 말, 거짓말, 불행한 말, 슬픔을 일으키고 분노를 일으키고 속상하게 하는 말, 거만한 말, 뽐내는 말들은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어지럽게 만드는 ‘죽음의 말’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제일 먼저 다스려야 할 것이 ‘말’입니다. 

여러분 주위 사람들 중에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생명의 언어를 쓴 사람들입니다. 만났을 때, 사랑한다고 하고 좋다고 하고 괜찮다고 하고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또 만나고 싶어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낙심 중에 있다가도 힘이 납니다. 그런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죽음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만나면 비난하고, 속상하게 만들고, 찌르는 사람입니다. 이 생명의 언어와 죽음의 언어의 차이는 딱 한 가지입니다. ‘자존감(self-respect, self-esteem)’입니다. 

자존감이란 ‘사람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아내, 남편, 자식, 부모, 형제, 동료 등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이 우주를 다 합한 것보다 하나의 영혼이 더 귀하다는 생명의 존귀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디서 생명의 언어가 나오는가? 사람을 귀하게 여길 때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고 아내도 남편을 경외하라.” “경외하라”는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은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남편도 아내를 위해서 사는 시대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인간은 존귀하고 보배롭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핀 대로 “양육한다”는 것은 잘 먹인다는 것입니다. 영혼도 먹이고 마음과 육신도 잘 먹이는 것입니다. “보호한다”는 것은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물을 소중히 싸서 장롱 속 어딘가에 넣어 두는 것처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모든 사랑의 관계의 골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생명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막내딸을 잠시 만나고 왔는데, 헤어진 다음날 이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아빠 엄마를 다시 보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것은 생명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참 좋은 가정, 즐거운 가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지내는데, 내 주위를 보면 우리 가정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딸이 살고 있는 뉴욕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가정에 대한 만족함에 대해 쭉 썼습니다. 그런 편지는 백 번을 받아도 괜찮아요. 엄마 아빠를 살려주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부모는 답을 보냅니다. “우리도 너를 다시 봐서 너무 너무 기뻤다. 너를 보니 건강하고…” 그러면서 자녀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만족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언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특별히 가족들에게, 죽음의 언어가 아닌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렇게나 말을 해서는 생명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골라서 써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가족들이 ‘우리 가족이 나를 너무 소중히 여기는구나!’하는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격려하는 언어, 친절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골라서 꾸준히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언어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또 기도의 언어가 우리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사실 사람은 다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사랑을 체험하고 변하여 새 생명을 얻고 성령으로 깨끗케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이타적이 됩니다. “친구를 찾아다니다가 한 명도 못 만났다. 그러나 내가 친구가 되어 주려고 나갔더니 온 세상이 내 친구더라”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외롭다면 내 친구가 될 사람을 찾아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면 세상은 친구로 가득 차게 됩니다. 특히 가정에서만이라도 여러분이 먼저 다른 가족의 친구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려고 조용히 앉으면 사람이 객관적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앉으면 객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야 자기를 관찰하고 자기를 검토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전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때는 양심의 가책을, 어떤 때는 눈물을, 어떤 때는 회개를, 어떤 때는 새로운 결단을, 어떤 때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족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같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나의 뜻도 아니고 당신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제3의 길이 있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오랫동안 큰 교회를 목회하신 연세 많은 루이 에반스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함께 기도하는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우리를 묶어주는 접착제요, 또 우리의 굳어진 마음들을 용해시키는 용해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꼭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폴 트루니에는 “남편과 부인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후에야 비로소 부부는 참된 화합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참 화합이란 함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움직여서 하나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격이나 생각이나 취미의 차이가 가정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면 오히려 그 차이들이 우리 가정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접한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부부가 하나님 앞에 앉아 각자 조용히 자신의 결점을 살피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할 때 부부간의 문제는 사라지게 된다.” 어떤 때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자존심이 세서 잘못을 해 놓고도 인정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앉으면 하나님은 자기의 잘못을 아시기 때문에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인도에 가서 한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어느 분 자리에 이런 글이 붙어있었습니다. “가장 고상하고 멋있는 복수는 용서해 주는 것이다. "The noblest revenge is to forgive.” 정말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용서를 해줘버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용서는 어떻게 하라고 했나요? “쉽게 하자.” 여기서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또 배우자의 결점을 덮어주면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형제나 자식이나 결점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결점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있었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매일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지적합니다. 친구를 사귀었더니 친구가 지적합니다. 직장을 갔더니 상사들이 지적합니다. 그런데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더니 또 지적을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 자신의 단점 때문에 내가 죽을 지경인데, 결혼했다고 마치 나의 단점을 지적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합니다. 그런데 지적해 봤자 아무런 쓸데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지적해 줘야지 평생 알고 있는 것을 또 지적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을 좋아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안 보시고 영원히 그냥 끌어안으셔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기를 즐거워하고 편안해 합니다. 여러분도 가족의 단점을 너무 밝히지 말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밝히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밝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되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흔들어서 꾹꾹 눌러서 돌려준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너희가 먼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비판하면 바로 돌아옵니다. 비판과 비난은 죽이는 것입니다. 칭찬과 격려는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살리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결점이 있어도 결혼생활은 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자유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계속 아내의 트집을 잡고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아내가 남편에 대해 계속 그러면 도망가고 싶어요. 서로에게 믿음과 자유를 줘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의 성격과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가 되도록 만들어 주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가 되도록 하며,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창조한 자기가 되도록 자유롭게 마음껏 자기를 표현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 

제가 살면서 고맙게 생각하는 한 분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 신학교 교수일 때 그 대학의 총장님입니다. 그 총장님은 제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겁나는 이야기입니다. 전임교수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전임교수도 하고 목회도 했습니다. 바쁘기가 두 배잖아요. 그런데 그 총장은 우리 교회에 와서 축복하면서 마음대로 사역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 선생님도, 교회 목회도 마음껏 했습니다. 그 총장님은 나를 그렇게 편안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특별한 은사를 많이 줬으니 그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다른 학교 같으면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아서 겨우 가르치는 것 하나밖에 못했을 겁니다. 저는 그때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 이분은 나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구나!’ 지금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해라,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면 가정에 평화가 없습니다. 서로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서로에게 자유를 줘서 각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가정생활을 잘 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서로 생명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는 말, 단어, 표현, 감정, 나의 그런 말과 행동 때문에 가족들이 고마워하고 신나고 기뻐하는 그것이 생명의 언어입니다. 죽음의 언어로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 주셔서 우리가 생명의 언어를 써서 우리의 가족들을 존귀하게 여기며 감사하며 그들을 세워주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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