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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 (롬 1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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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 (롬 14:13-23)


세상에서 가장 변화가 쉬운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가장 변화가 어려운 것도 사람의 마음입니다.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변화,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변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이 변화라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시대에 사제의 길을 가고 있는 제가 깊게 깨닫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하고,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절대로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30년, 40년을 살아오면서 보지 않습니까?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는 그 순간에도 끝까지 안 변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의 눈길 한 번 안 주고 눈 딱 돌리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멀리 볼 것이 아닙니다.  내 가정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내 자식이 변합니까?  내 남편, 내 아내가 변합니까?  변해라, 변해라고 말하지만 변화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에는 어떤 공식이 확실히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깊어지고 믿어지면 우리 모두는 뭔가를 그 분을 위해서 바꾸고 싶어하는 가느다란 욕망과 희망이 신속히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진전되고 회복되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상대를 갑자기 기쁘게 해주고 싶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은 그런 욕망의 불꽃,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오늘 여러분 속에 이 아름다운 불꽃이 타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불꽃이 점화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 속에 어떤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을 단번에 무장 해제시켜 버리는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불꽃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세계는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던 그 심령에도 성령이 임하시면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변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영혼을 사모하는 일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맑은 영혼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맑은 영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변화라는 것이 일어나도 좋고, 안 일어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믿음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은혜를 받아서 그 심령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에 저들이 기도하다가 심령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진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심령에 감화와 감동과 떨림이 오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식구들이나 파트너를 주신 것은 화풀이의 도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간혹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화풀이 대상을 붙여주시지 왜 아내와 자식을 붙여줍니까?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가족들을 내 화풀이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도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서 자신의 화풀이의 대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동물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아주 나약한 동물입니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태어난 그 상태로 평생을 살다가 죽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기댈 사람이 필요합니다.

목사라고 언제나 억센 게 아닙니다.  목사가 늘 힘차게 살아가니까 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저도 알고 보면 한없이 나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제발 속썩이지 말고 부족한 목사가 이 목양의 사역을 보다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써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엄마가 서 있을 때 치맛자락을 붙잡고 기대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청년들이 사랑에 빠져서 등을 맞대고 밤이 새도록 별을 바라보면서 있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다 기댈 곳을 찾고 있습니다.  기댈 곳을 주지 않으니까 다 넘어지는 겁니다.

공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어질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자와 두 이(二)가 합성된 한자입니다.  그래서 어질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어질 인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주위에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 사람 주위에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그러나 내 것만 고집하는 사람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의 주위에는 시베리아의 찬바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칩니다.  그런 사람 곁에 누가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것만 고집하지 마십시오.  자기 방식만 고집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도 정답을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보면 꼭 정답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심령을 콕콕 찌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인생의 문제는 학생이 학교에서 치루는 시험지가 아닙니다.  시험지는 정답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답을 말하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정답을 말하면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말씀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우리는 옳은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옳은 것도 사실은 덕을 세워야만 옳은 일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요, 또 나 자신에 대해서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꼭 옳은 일이 되고 덕이 되는 일일 수는 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에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옳고, 그 자체가 진리요, 하나님 앞에서도 옳게 생각이 될지라도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것은 부득불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덕만 세우겠다고 사람에게만 좋게 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의가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의 마음속에 신령한 은혜와 신령한 기쁨이 사라져버려도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는 옳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옳은 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가 음식입니다.  보십시오.  내 입에는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에게는 맛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너는 옳고 내가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옳으면 그만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덕을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선행이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 선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나 자신에게 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덕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세움'이라는 단어입니다.  '덕'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번역하면서 서로 세워주는 것이 아름다운 덕이라고 믿어서 우리말에 '덕'이라는 말을 포함시켰지만 본래 원문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세움'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쓰여진 '세움'이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 '오이코 도메'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오이코'는 '집'이라는 뜻이고, '도메오'는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웃을 섬기는 일은 마치 이웃의 집을 세워주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종종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에 대해서 하는 중상이나 비난이나 험담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우리는 마치 그가 이웃을 파괴할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이웃의 집에 불을 질러 태우는 방화범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이웃을 허는 자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세우는 자이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세우는 자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이웃을 세우는 자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무엇보다 서로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 14장 13절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앞서 선행하는 1절부터 12절까지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할 수 있는 삶의 영역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 이하에 보면 특별히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먹는 문제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특별히 제사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초대교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여러 가지 명절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러한 날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것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종종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이런 문제들로 논쟁을 하다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깨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보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논쟁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깨어지는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교회가 교인들이 열심히 헌금을 해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봉헌한 후에 깨어졌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당 뒤편에 커텐을 하는데 커텐의 색깔을 어떤 색깔로 할 것이냐?  붉은 색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까만 색으로 할 것이냐?  그래서 붉은 색깔파와 까만 색깔파로 나뉘어져서 교회를 세우다가 분열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실제로 있었던 교회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라는 것이 교회당 안에 장식해 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을 해마다 해왔는데, 갑자기 어느 날 몇몇 교인들이 그것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본래 따지고 보면 그 기원이 이교도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교도의 풍습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당 안에 마땅히 크리스마스 트리를 철거해야 한다.  그래서 열심히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정성 들여 만든 사람들도 열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제자리에 원 위치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또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또 원 위치시키고.  두 파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 법정에 호소를 해서 신문에 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문제를 사도 바울에게 가지고 와서 물어본다면 바울은 어떻게 대답을 할 것 같습니까?  아마 바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닌 문제를 가지고 신경을 쓰네.  당신들 마음에 좋을 대로 하세요."

로마서 14장 1절부터 12절까지 먹는 문제와 날에 대한 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바울은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한 마디로 말해서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어서 형제들 앞에 시험에 들 일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형제의 마음에 근심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든다면 그것은 우리가 논쟁하고 있는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 속에 우리가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형제를 낙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2)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찮은 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주 앞에서 은혜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는 삶의 도상에서 이웃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먼저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을 보면 좀더 적극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런 행동을 보이지 말라, 또 상대방이 마음 상할 이야기나 일들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을 비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꾸만 마음 상할 것을 갖다놓으면서 사랑해 달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결코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그것만 건드리면 터집니다.  그러면 그것을 비켜가야 합니다.  절대로 거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혹 교인들 모임이 있을 때에나 어떤 자리에 번쩍번쩍 요란하게 차리고 가지 마십시오.  다이아반지 끼고 가지 마십시오.  이것도 헝제에게 거치는 것이 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로 구제하는 것만 봉사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판단하지 말라, 뿐만 아니라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은 두지 말라, 그런 것은 말도 말고, 보이지도 말라.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의미에서 혹 내 마음이 괴롭고 언짢은 때에라도 너무 그렇게 죽어 가는 얼굴로 나타나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 어두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어서 기도하는 중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위해서 웃으면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에 혹 나에게 문제가 많이 있더라도 반가운 얼굴로 나오는 것이 교인들에게 크게 구제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웃는 얼굴이 보통 구제가 아닙니다.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구제는 반가운 얼굴로 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대한 방긋이 웃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형제와 이웃을 세우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두 번째로, 믿음이 강한 성도가 양보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숭배할 때에 고기를 제단에 바쳤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식당에서 팔렸던 대부분의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를 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이것을 우상의 제물이라고 해서 먹지를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기가 우상의 제물일 것이라고 해서 그들은 채소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것이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사의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먹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믿음이 없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배려하고 세워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 앞에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배려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사 음식의 고기를 먹을 수는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가 믿음이 약한 성도를 위해서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20절과 21절의 말씀입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그 자체가 어떤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립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소유하면 깨끗한 것이고, 더러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행할 때에만 좋은 것입니다.  사랑에서 떠날 때에는 악이 되는 것이고, 부덕함이 되는 것이고, 속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마침내 이런 결론적인 제안을 합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2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러니까 본문의 메시지를 적용한다면 제사 음식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제사 음식의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고기를 거리낌으로 대하는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고기를 포기했다.

이것을 이런 경우로 바꾸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사택에 아름다운 예술적인 누드화를 선물했다고 하십시다.  그래서 현관 거실에 걸어놓았습니다.  저는 예술적인 조예가 없지만 그래도 선물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 작품을 하나님의 창조의 미적 관점에서 감상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 어느 교우가 저희 사택에 들어와서 "어머머머.  목사님 댁에는 망칙한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리고 시험에 들어 가실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한국 사회에서도 예술과 외설 사이의 문제가 종종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라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외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과 외설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유머가 있습니다.
보고 나서 눈물이 나면 예술이고, 군침이 돌면 외설이다.  애인과 함께 볼 수 있으면 예술이고, 친구와 보는 것이 편하면 외설이다.  보고 나서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예술이고, 몸의 변화가 생기면 외설이다.  비디오를 빌려주어서 돌아오면 예술이고, 안 돌아오면 외설이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땅히 신앙이 약하거나 혹은 예술적 감상의 능력이 없는 약한 형제가 이것으로 인해서 시험을 받는다면 당장에 그 그림을 뜯어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누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것을 통해서 내가 형제에게 시험이 되느냐, 덕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언제나 믿음이 강한 사람이, 혹은 보다 감상의 능력이 높은 사람이 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양보를 하는 것이 신앙적인 원칙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세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형제를 세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원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이웃을 세워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세 번째로,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가 신앙의 논쟁의 자리에 있다 보면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껍데기를 가지고 논쟁을 하다가 열을 올리고, 열을 받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남자들은 본질적으로 정치 감각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 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초증고등학교의 무상급식문제가 화제에 올려질 수가 있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무상급식을 모든 초중고등학교에서 실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반면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는 진보적인 성향의 교인들과 보수적인 성향의 교인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도 있고, 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들의 거룩한 영적 교제에 상처를 주거나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피해가지 않으면서 우리의 교제에 깊이를 더해 갈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것들은 나라의 문제요,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관심이기 때문에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제가 더 깊어지고, 우리가 서로를 세우는 진정한 일을 추구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적인 대답은 우리가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본문 17절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먹고 마시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문제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을 본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가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어떻게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살아갈 수가 있는가?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의와 평강과 기쁨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느냐?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본질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와 평강과 희락 이 세 가지가 함께 해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빠져도 안됩니다.  모두가 온전히 성취되어야 합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평강이라는 것은 서로 서로 화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도 불편이 없는 화해, 온전한 화목이 평강입니다.  또 희락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안됩니다.  나 자신에게 먼저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는 의가 되고 이웃에게는 화목이 되고, 모두에게 은혜가 되고, 내 마음에도 충만한 기쁨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의입니다.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화평입니다.  이기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즐거움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으로 있을 때보다 대통령 이후의 삶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망치를 들고 헬멧을 쓰고 집을 짓고 있는 그에게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소감이 어떠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 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가치나 소망은 대통령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대통령 후에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고 세워주는 일을 더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 가치는 단순히 대통령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어떤 자리에 앉기보다는 그 이후에 그가 이웃과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고 세워주는 일에 더 큰 인생의 보람과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와 사회와 나라에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있는 나라의 백성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은혜와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는 사람이 마지막날에 누리게 될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영광, 자신에게는 기쁨,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결론에서 말씀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서로가 서로를 세워 가는 인생을 사모하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들은 새로운 인생의 집을 지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내 의견보다 하나님의 사업을 먼저 생각하고,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그 속에 진정한 나의 기쁨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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