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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요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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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요 15:1-11)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괜히 아담과 하와를 겁주려고 하신 것이 정말 죽게 하지는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죽음보다 훨씬 더 깊고 심오한 개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데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사데교회는 살아 있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삶과 죽음의 형상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실상입니다. 형상은 죽음이지만 실상은 삶인 경우도 있고, 형상은 삶이지만 실상은 죽음인 경우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형상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실상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죽음의 실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범죄한 세상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난 죽음의 실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의 실상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실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와 이전의 중요한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와 그 이전은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기 이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가까웠습니다. 하나님과 친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것이 죄의 삯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사망의 실상이었습니다.

범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이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마음도 생각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이고 사탄적인 생각이 오히려 납득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가까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과 세상은 점점, 점점 파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은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순절 날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거듭났더니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달라졌더니 세상은 아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환난도 있었고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천국 같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닮아가더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포도나무시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가지에서 맺습니다. 구원의 축복은 가지인 우리들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열매를 맺으려면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지가 절대적으로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절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에만 붙어있으면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 딴일 할 필요없습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에 붙어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열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삶이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겉만 무성하고 실속이 없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과 가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와 관계가 생각처럼 깊고 가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73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힘써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다. 시편 34:8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맛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맛 들여져 있는 상태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세상에 맛 들여져 있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여 조금씩, 조금씩 그 맛을 알아 가야만 합니다.

저에게는 아주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제게 좋은 친구란 말이 통하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말을 하면 내 말을 그를 통하여 듣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결혼을 할 때 하나님께 말 통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저는 말이 통하는 것이 부부 사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관계와 사이는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관계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영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공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밀접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려면 기도와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이 말이 통한다면 기도와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기도가 어렵습니다. 기도를 해도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에서 우리에게 들어주시기 어려운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통하지 않는 기도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다보면 기도가 재미없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줄이 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말씀을 읽어도 그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을리 없습니다. 말씀이 이해되지도 않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눈이 많이 온 겨울에 산엘 가보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찢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지만 찢어져 완전히 붙어있지 못한 상태로 겨우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혹시 저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하나님과 하나 되게 단단히 붙어있지 못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육간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는 그래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래도 습관적이나마 주일마다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정쩡한 상태 때문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을 맛보지도, 누리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또 한 발은 교회에 들여 놓은 채 양다리를 걸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도 백성들이 그랬던 모양입니다. 여호수아는 그와 같은 백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호수아 24장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올해 저는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육십이 되었습니다. 육십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을 계획하고 설계할 때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십에 힘써야 할 일이 있고 오십에 힘써야 할 일이 있고 육십에 힘써야 할 일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으로 많이 부족하지만 저는 지난 사십대와 오십대에 나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목사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지금도 그 즐거움을 알고 때문에 앞으로도 힘닿는 한 힘써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저에게 참으로 많은 일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하나님이 제게 맡겨 주신 일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저에게는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큰 일이 없는 한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육십을 넘기며 생기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삶’(For God)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냥 '하나님 안의 삶‘(In God)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을 욕심내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이런 저런 일들은 점점 젊은이들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깊은 기도 속에 하나님과 대화하며 깊은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열심히 일하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더 깊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과 생각에 공감하며, 공감을 넘어 전율하며 감동하는 삶을 살아가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서, 하나님의 생각이 좋아서 기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표현 것과 같이 하나님께 내 온 삶과 인생을 관제처럼 쏟아 붓는 순종에 이르고 싶습니다. 깊은 기도와 깊은 묵상과 깊은 순종을 통하여 무궁무진한 하나님을 배워가고 닮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 삶에 또 다른 꽃이 필 것입니다. 정말로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핀 꽃마다 또 다 다른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아주 많이 맺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좋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지고 멀어지면 죽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힘써 예수님께 붙어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 꼭 붙어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인지,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인지가 구별이 안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열매와 기쁨입니다. 육십이 넘어서도 아직 세상 욕심 버리지 못하고 세상 좇아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은 버리고 하나님 닮아 사는 데 욕심을 부리며 곱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야구 배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힘이 들어가면 홈런을 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빠져 살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너무 건성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께 들여 놓은 듯 하나 사실 그 발의 무게 중심은 하나님보다 세상에 더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살면 살수록 분명해 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왕 믿는 예수 한번 열심히 믿어 보십시다. 아주 깊게 믿어 보십시다. 그리하여 정말 예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까지 이르러 보십시다.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어 나무에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십시다. 그리하여 오늘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과 같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보십시다. 

그 풍성한 삶의 열매 때문에, 축복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 되어 그 충만한 기쁨으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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