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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생활의 능력 (행 16: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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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계명 가운데 나오는 날입니다.  
서구교회는 맥추절의 전통을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정하고, 지난 반년동안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돌아보며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감사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입니다.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에 힘입어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어찌 감사가 끊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거듭나 새사람 된 자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며 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일에 소홀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바울과 실라는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을 보여준 신앙의 영웅들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전도 활동 중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을 만납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여인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소유했던 주인이 돈을 벌 수 없게 되니까 바울 일행에게 앙심을 품고 당국에 고발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밤중 쯤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는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6절,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 엄청난 광경 앞에 간수가 혼비백산했습니다.  
27절,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그런데 이 모습을 본 바울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간수에게 소리쳤습니다.  
28절,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결국 이 사건은 간수와 온 가족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된 것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종들을 통하여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조금 전까지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천한 존재였습니다. 패배한 사람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그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옥문이 열리고 옥사장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갔을 때에 이튿날 고을 상관들이 찾아와서 어제의 무례를 사과하고 빌면서 바울 일행을 정중히 성 밖으로 모셨습니다.  
이제는 당당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존귀한 자로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패자가 승자로 바뀌었습니까?  무시 받던 바울이 어떻게 존대 받는 자리로 옮겨졌습니까?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
로 이것입니다. 이 찬미가, 이 감사가 바울의 위치를 바꾸었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감사는 어떤 사건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입니다. 본문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는 감사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찬미를 신호삼아 지진이 일어나고 옥사장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사는 일을 합니다. 감사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감사를 가지고 큰 일을 행하십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의 감사 찬송이 어떤 역사를 이루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성도의 감사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역사를 이루십니까?

1. 성도의 감사는 초자연적인 역사까지 일으킨다.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린 바울과 실라의 감사의 찬미는 큰 지진을 불러왔고, 죄수들의 사슬이 풀어지게 했습니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 올리는 감사의 찬미는 이적의 역사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26절,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지금 바울과 실라가 처한 형편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무고히 매를 맞고 빌립보의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양발은 착고에 채워져 꼼짝할 수 없습니다. 매 맞은 자리의 아픔과 착고의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취한 행동은 고통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 고통과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거나 복음전도자로서의 회의와 좌절감에 빠졌을 법도 한데, 바울과 실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환난 날에 간구할 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부르며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주안에서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정 말씀대로 산 성도들이었습니다.  
시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들의 육체는 지하 깊은 옥에 갇혔으나 그들의 영혼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혼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신 영적 자유와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가운데서 그의 감동적인 고백을 발견합니다.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한 밤중 고요한 옥사에서 들려오는 찬미 소리를 다른 죄수들도 흥미를 가지고 듣고 있었습니다(에페크로온토). 바로 이때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매인 것이 모두 벗어지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26절,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여기에서 ‘움직이고’, ‘열리며’, ‘벗어진지라‘에 해당하는 동사들은 모두 수동태 동사들입니다. 신적 수동태입니다. 
이 사건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움직이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주의 종들이 주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길을 맡길 때 직접 나서셔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께 감사할 때 주님은 이적의 역사까지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셔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성도의 감사는 불신 영혼을 회개시킨다. 
   
주의 자녀들이 감사할 때 주님은 이것을 주변의 믿지 않는 자들을 회개시킬 기회로 삼으십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로마법에서는 간수가 죄수를 놓쳤을 경우 죽음으로 책임지거나 죄수가 받은 형량만큼 벌을 받게되어 있습니다.   
간수는 당연히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생각하고 자신이 받을 형벌이 두려워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대조를 보게 됩니다. 한 쪽은 괴롭고 처참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이고, 또 다른 한 쪽은 혼자서 자신의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결하려 했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간수의 마음이 열리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검을 빼 든 간수를 향하여 바울이 취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십시오.  
28절,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바울이 크게 고함을 친 것으로 보아, 바울 일행이 감옥을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이 기적적인 사건을 복음 전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입니다. 참 신앙인의 가치관, 믿음의 소유자가 가지고 있는 여유를 볼 수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일을 시작코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 간수가 얼마나 놀랐을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옥 문이 열려서 죄수가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는 순간, 죄수들이 그대로 감옥 안에 있다는 소리에 그 간수는 심장이 멎는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신학자 브루스(F.F. Bruce)는 간수가 바울 일행에게서 무언가 섬뜩한 신비를 느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외의 마음에 압도된 간수는 죄수 신분인 바울과 실라에게 ‘선생들’이라는 존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30절,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뜻밖의 질문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구원의 문제입니다. 간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 속에서 심하게 요동하는 자기 마음과는 달리, 지극한 평온을 누리고 있는 바울과 실라에게 마음의 참된 구원의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수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진리를 접하고 또 한번 놀라게 됩니다. 새로운 이름, 주 예수의 이름을 소개 받았고,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31,32절,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바울 사도로부터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가족의 구원에 대한 말까지 들은 간수는 가족 모두를 모아 사도의 말을 듣게 하였고, 자기와 권속이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33절).  
죄수를 사사로이 자신의 집에 데려가 치료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당시 로마 실정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수가 이런 일을 한 것은 바울과 실라에 대한 철저한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고, 영적 구원에 대한 갈망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4절,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크게 기뻐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앉아 있지 못하고 날뛰면서 기뻐할 정도로 ‘몹시 기뻐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모두 4회 사용되는데, 모두 인간적 기쁨이 아닌 하나님과 관계된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 간수가 보인 기쁨은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의 시각으로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인간 내면의 변화, 그것도 세상적 지위가 아닌 영적 측면의 변화가 자연인의 시각으로는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사도 바울의 감사는 이적을 불러왔고, 불신 영혼에게 회개의 문을 활짝 열게 했습니다. 간수는 하나님을 믿었고, 성령이 주신 기쁨으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감사 생활이 여러분의 불신 오이코스들로 하여금 구원을 사모하도록 만들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도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감사 예배를 드릴 때 한 여성도가 많은 양의 곡식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평소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던 그 여인이 많은 예물을 바친데 대하여, 목사님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성도님, 특별히 감사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사실은 제가 열살 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그 애에게 병이 났을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아이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 많은 예물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이제 회복이 되었나 보군요?”  “아닙니다. 일 년 가량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약속은 무효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  “아닙니다. 이제야말로 주님께 선물을 드릴 때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 아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셨고, 지금은 그 품에 안고 계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이 간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부시대 탁월한 설교자였던 크리소스톰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당하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전도하라고 이곳에 저를 파송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쉬지 않고 전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침내 크리소스톰은 사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평온하였고,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려고 할 때 갑자기 위에서부터 사형 집행 중지령이 내렸습니다. 
그때도 크리소스톰은 눈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   “주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더 남았다는 것입니까?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주님은 이런 사람을 통하여 이적을 베푸시고, 이런 사람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고,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요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는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일이 잘 풀리고 모든 것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워 떠는 간수에게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지진이나 옥문이 열리는 일이나 착고가 풀어지는 기적보다 간수의 마음이 열려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바울이었기에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는 불의에 맞서 담대하게 책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던 것입니다.   
35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당국자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이를 통해 갓 세워진 빌립보 교회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배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도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용기는 외적인 용기였을 뿐입니다. 사람을 잡아 가두는데 용감했고, 사람을 죽이는 데 가편 투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그는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어디에 가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놀라운 용기는 주님과 더불어 밀접히 교제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 앞에서 감사생활 하는 가운데 더해졌습니다. 바울 서신서에 ‘담대한’(파르샤)이란 단어가 아홉 번이나 나오는데, 거룩한 감사의 생활 속에서 이런 용기가 배양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맥추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감사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 생활을 통하여 이적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감사 생활을 통하여 불신 영혼이 주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범사에 더욱 감사함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놀라운 감격과 힘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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