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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의 비전 (단 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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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비전 (단 6:3-18)


‘교회의 비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 대답을 듣고 마음에 들면 교회에 합류할지 말지를 결정할 듯 한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지를 잘 몰랐습니다. 비젼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 두 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이후에도 교회의 비젼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저는 그때마다 이겁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비젼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두 마디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많은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교회의 비젼이라는 페이지가 있지만 그건 아무도 읽지 않는 페이지입니다. 아무에게도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그렇고 그런 말을 써놨기 때문입니다. 민족복음화니, 성도의 제자화니, 약간 미사여구에 불과한, 구호에 불과한 말들을 써놨습니다. 비젼과 구호는 다릅니다. 

군부대에 가보면 입구에 ‘초전박살’이라고 써놨지요. 그건 구호입니다. 그건 비젼이 아니에요. 심지어 숫자로 비젼을 표시한 교회도 있습니다. 333. 교인 3만 ․ 제자 3천 ․ 선교사 3백,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 대통령도 출마할 때 국가의 비젼을 숫자로 제시했지요. 747. 국가 경쟁력 7위 ․ 소득 4만 불, 이런 식으로. 보잉747이 소개된 게 몇 십 년 전인데 이제 와서 747입니까. 

그건 벌써 물 건너간 얘기입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오기 전에나 할 수 있었던 이야기라는 얘기에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이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비젼을 그런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사도바울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회의 비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는 분이 있다면 ‘제 설교를 들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한 육 개월, 일 년 꾸준히 설교를 들어보면 저희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저희 교회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문은 사설을 통해서 말하듯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비젼을 알기 위해서는 설교를 들어봐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게 된 이유는 제 자신이 스스로에게 물어봤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목회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고자 하느냐? 나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그래서 오늘 본문을 고르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신앙인이지만 성직자는 아닙니다. 그는 국가의 고급관료에 가깝습니다. 유능한 인물입니다. 분명한 자기 일이 있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로 저는 성도님들이 각자 세상에서 맡은 역할과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저의 임무는 여러분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요 여러분이 훌륭한 신앙인으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여러분 각자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지만 세속사회에서 사는 신앙인입니다. 세속사회에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서로 존중해 줘야 됩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이스라엘 땅의 흙을 자기 노새에 실어다가 본국에 가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스라엘 흙 위에 올라가서 예배를 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그에게는 신앙적인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한 가지 양해를 구합니다.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그 말은 나아만이 섬기는 임금이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자기가 섬기는 신전에 예배를 드릴 때 자기가 신뢰하는 심복 나아만의 팔을 의지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자기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고자 하지만 자기가 나라의 군대장관인 관계로 자기 임금이 섬기는 신당에 들어가 예배할 때 자기가 신뢰하는 군대장관의 팔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몸을 굽힐 때 신하인 자기도 몸을 굽힐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양해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이 부탁에 엘리사 선지자는 ‘평안히 가시오’ 이렇게 그를 축복합니다. 이 나아만은 세속사회에서 자기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전형적인 신앙인이에요.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을 지키고 자기 신앙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자기의 직업상, 자기의 사회적인 지위상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임금 섬기는 일을 그만두면 그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이 지금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섬기는 임금, 그 임금에게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속 좁으신 분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도 훌륭한 신앙인인 것뿐만이 아니고 자기의 직장에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바벨론의 임금이 그를 인정해서 전국을 다스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전국을 다스리게 했어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이 이방 중의 이방이 아닙니까. 그런 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이 최고의 공직자가 됐어요. 대단한 사실이에요. 세속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24시간을 교회에서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일이 있어요. 공부할 일이 있든 자기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들을 늘 교회에 붙잡아 놓으려고 할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는 것, 그것도 교회의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 중의 한 분이 토론토에 계신 목사님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제가 나이 열일곱 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 목사님이 제게 뭐라고 권면하였느냐면 목사가 되려고 하기 전에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넓고 기회는 많은데 공부를 하면 자네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목사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목사님은 잘했다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 되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인데 그분은 목사가 되기 전에 공부부터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것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를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제 인생에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목사가 됐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권면을 따른 것이 저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고 또 사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결국은 더 나은 목사가 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이 있다면 다니엘과 같은 인물이요 나아만 같은 인물일 것입니다. 신앙에 충실하면서 자기 일에도 유능한 사람 큰 안목과 비젼을 갖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양산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비젼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동시에 다니엘은 세속사회에 살지만 세속인은 아닌 철저하게 구별된 경건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누구에게 신앙훈련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을 아주 잘 받았어요. 그래서 자기의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다니엘을 닦달하면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누가 그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해서 그가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자기의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축구선수가 골을 넣은 후에 기도 세리머니를 하는 것을 가지고 시비가 많은데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이라는 것은 경건이 우리 삶의 일부가 돼서 숨 쉬는 것처럼 밥을 먹는 것처럼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안하면 벌을 받을 것 같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일부요 자연스러운 것이요 내가 원하는 것이요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되는 것 그것이 경건의 훈련인 것입니다. 

평소에 새벽기도를 안 나오던 분이 별안간 새벽기도를 나온다든가 금요심야기도회를 나오면 아마 주변 사람이 궁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집사님, 어디 아프세요?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아니 기도하는 게 뭐가 신기한 일이라고 평소에 안 나오던 사람이 새벽기도에 나오면 병원에서 뭐래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요? 왜 우리는 큰 문제가 생겨야만 기도를 하고 문제가 생겨야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다니엘은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기도는 그의 삶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왜 하느냐.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Why do you do it? Because I want do it.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없는 겁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에요. 경건의 일상화, 기도의 일상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보다는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매달려야 됩니다. 몸이 병들지 않았더라도 기도해야 됩니다. 흉년이 들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됩니다. 그게 진짜 신앙인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분, 점잖은 지위에 있는 분이 교회에 나오면 사람들이 곁눈으로 지켜봅니다. 남들이 아멘 할 때 저분도 아멘을 할까? 남들이 박수치고 찬양할 때 저분도 그럴까?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하면 아주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런 분도 교회에서 박수치고 찬송하더라. 가장 안 그럴 것 같은데 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사람들이 저를 접하면 안 그럴 것 같대요. 그런데 제가 교회에서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방언을 하고 방언통역을 하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놀랄 노자래요. 제 신학교 친구들도 제가 찬양 인도하는 것을 보더니 new you-새로운 너를 봤다, 아니 옛날 나는 뭐고 새 나는 뭡니까. 사람은 그렇게 겉으로 판단하면 안되지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니엘이 온 국가를 치리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경건한 삶을 살 수 없고 경건을 실천하지 못할 만큼 점잖다거나 체면을 차려야 된다거나 보수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주일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수요일 ․ 금요일에는 찬양을 많이 부르고 성령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방언도 하고 심지어 성도들에게 예언할 수 있는 기회까지 드립니다. 그것은 경건의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영성의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영성이란 것이 성경책 속에 갇혀있지 않고 우리 삶에 나타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영성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세 번째, 믿음은 제스처도 아니고 취미생활이 아니고 철학이 아니고 생사를 놓고 결단해야 되는 때가 옵니다. 그럴 때가 안 왔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가 늦게 왔으면 좋겠지만 결국은 옵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너 기도를 멈출래 아니면 사자 굴에 들어갈래? 이건 이론이 아니고 취미생활이 아니고 생사를 놓고 결정해야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신앙도 혹독한 테스트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 더 이상 추상적인, 멀찌감치 따라가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실존적인 면입니다. 

우리는 결국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어 가리우네’ 세월이 화살같이 빠르게 지납니다. 세상의 즐거움이든 영광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못 받아들이는 것은 가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잘 살고 성공하고 복 받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상급을 이 세상에서 다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믿는 사람이 진짜 신앙인입니다. 못 믿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너희 생명을 구하려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잃으면 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게 됐는데 수술 받기 전에 목사님이 심방을 갔어요. 목사님이 기도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사님, 이번 수술을 받고 나을 수도 있지만 낫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를 하고 나왔는데 수술이 성공적이었어요. 그 권사님이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병원에 가서 기도를 하면 낫는다는 얘기만 하지요.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안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을 수 있어요. 안 나을 수 있어요. 이게 끝일수도 있습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게 진짜 신앙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것, 이것도 교회의 사명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국백성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가 가야할 길이 우리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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