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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 교실의 교훈 (신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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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교실의 교훈 (신 8:1-10)
  

경북 봉화에 알고 지내는 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어려서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실명하게 된 이유가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눈병이 나자, 마을 어른들이 기름을 끓여 눈에 부으면 낫는다고 했고, 뜨거운 기름을 눈에 붓자 눈동자가 익어 신경이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무지가 가져온 비극입니다.

이처럼 무지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지식이 많을수록 세상을 사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지식만 많으면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3절은 두 가지 종류의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3절 중간부터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떡으로만 사는 인생>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떡으로만 사는 인생>은 지식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이 먹어야 산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명백한 일입니다. 

<명백성>,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특징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는 사람은 <나는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은 매사에 단언하는 습성을 갖게 됩니다. <아, 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난 그것을 다 배웠어. 그러니 자네는 잘 모르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내가 책임지지.>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자기 계산을 신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계산에 입각하여 미래를 예측합니다. 

우리가 늘 접하는 일기예보나 경기예측도 결국은 지식에 근거하여 내놓는 것입니다. 일기예보는 천문학적, 기상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내놓는 예측입니다. 경기예측은 경제학적, 경영학적, 재정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내놓는 예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측들은 거의 대부분 잘 들어맞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과연 전문가는 달라.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인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그들의 약점은 지나치게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떡만 있으면 산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단언하건대 사람은 떡만 있으면 죽지 않아!>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때때로 사람이란 떡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떡만으로 살 수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네 인생은 지식을 가지고 예측한대로 전개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강은 맞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인생은 전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출애굽 이후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인생이 예상대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습니다. 상식, 지식으로만 보면 그들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노예살이는 고단하고 힘든 것이다. 이제 애굽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고생은 없다. 

물론 얼마동안의 광야 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광야는 마실 물이 부족하고, 음식이 단순하고,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없고, 햇빛은 뜨겁고, 독충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러나 좀 참자.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불과 열 하룻길이다. 설령 중간에 좀 지체한다고 해도 몇 달이면 넉넉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라. 그 후에는 가나안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이게 그 당시 지식인들의 예측이었을 것입니다. 단순하고도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고개를 끄떡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불과 열 하룻길, 길어도 몇 달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광야 생활은 무려 사십 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사십 년은 치명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몇 달 정도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십 년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의 예측이 빗나갔을까요? 그들은 사람이란 지식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에게는 감정도 있고, 의지도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거기 감정과 의지가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감정과 의지는 지식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의 광야 생활이 사십 년으로 늘어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어 사십 일 동안 가나안 땅을 돌아보게 했는데, 돌아온 사람들 중 열 명이 매우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정탐한 날들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배회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가데스 바네아의 실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실수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기름지고 좋은 땅임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과일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면서 그 땅이 기름진 땅임을 증명했습니다. 또 그들은 가나안의 성들이 크고 견고하고, 주민들도 강하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것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실패는 그들이 지식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온 것이었습니다. 그 때 차라리 지식을 무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비록 적들이 강하고 성읍이 크고 견고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정보를 무시하는 게 더 나았습니다. 차라리 지식과 정보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준다. 내가 그 땅의 모든 백성을 물리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져서,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전진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보내지 않고 가나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지식도, 정보도 없었다면, 그 지식과 정보를 무시해 버렸다면, 그래서 <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야.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뿐이야!>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때로는 지식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이란 말이 생긴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면서 정말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본문 2절-3절 상반절까지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낮추어졌습니다. 노예살이를 할 때보다 더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음껏 먹지도 못했습니다. 늘 만나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정말 고단한 광야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 생활을 통해서 배우는 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십 년을 통해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치길 원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3절 후반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이 두 번째 종류의 인생을 배우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떡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떡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떡만으로 사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도 있어야 하지만, 인생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때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면 가면 됩니다. 지식을 가지고 분석하고 따져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타당성, 논리성, 합리성 따위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합리적이지 않아도, 타당성이 없어도 가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믿음이 있었다면 가데스 바네아의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갔다면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허송하지 않고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죽지 않고 가나안에 발을 디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지식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죽은 지식으로 남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에 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예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잘 알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식 때문에 저지른 가장 치명적 실수는 메시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 여러 군데에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런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9장 6-7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메시아가 왕의 모습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정사를 메었고>라고 했는데, <정사>란 정치와 행정에 관한 일, 통치권, 주권. 권력을 의미합니다.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운다>는 등의 표현은 <메시아는 왕>이란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메시아가 왕처럼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성경 지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는 확실히 왕이십니다. 그 분은 나라를 세우시고,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분이 메시아로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화려한 왕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의 보잘것없는 목수였습니다. 그들은 <이건 아니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오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란 말씀과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란 말씀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사를 메시고 왕이 되시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려면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부활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예수님은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메시아는 자신들의 눈앞에서 바로 왕이 되실 것이라고 성급한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지식에 입각하여 판단함으로써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따르지 않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오판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식 보다 더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 현재 당신의 모습이 나사렛의 목수에 불과하지만, 저는 당신을 만 왕의 왕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고백을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렛의 목수를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우리의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믿어야 삽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믿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당부했습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6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의 명령, 그 말씀대로 지키고 순종하는 것,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무시하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 이게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 포장지에 담아 보낼 때가 많습니다. 때로 환란과 시련을 만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지식적 판단이 벽에 부딪힐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럴수록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지금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군사전문가, 정치전문가 등의 견해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암운이 드리워 있습니다. 우리 나름의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북한의 동향을 예측해 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 때 지식을 가지고 분석하는 분들은 열심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나라를 맡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국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지식과 정보로 판단하면 영도에서는 교회가 부흥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인구는 줄고, 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떡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는 존귀케 하리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남종과 여종에게 내 신을 부어 주리라.....> 
이 말씀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오히려 눈이 열려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도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지식이 많은 서기관, 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부족해도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 들판의 목자들, 성전의 경건한 노인 시므온은 그 분이 메시아임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삼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도 알아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구했습니다. 가버나움의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알아보고 그 분의 옷자락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그 분을 알아보고 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그 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았고,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 두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걸어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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