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너진 왕조 (삼상 31:1-6)

  • 잡초 잡초
  • 375
  • 0

첨부 1


무너진 왕조 (삼상 31:1-6)
  

최근에 서울 롯데 백화점 사장 앞으로 현금이 든 봉투와 A4 한 장 분량의 편지가 배달됐습니다.
사연을 쓴 이는 얼마 전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던 중 생각지도 않았던 10년 전의 죄가 떠올라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용기를 내 편지를 쓰게 됐다고 했습니다.

“백화점 사장님께

저는 10년 전 백화점에서 가방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 땐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살았지요. 저는 잊고 지냈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죄이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모른 척 덮어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수록 너무나 또렷하게 그날의 현장을 기억나게 하셔서 견딜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대수롭지 않았던 조그만 죄였는데 이후에는 엄청난 죄로 압박을 느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부터 이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디 이 돈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세요.”
백화점 사장은 이 편지와 돈을 회사의 ‘신우회’에 넘겨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이 글을 읽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얼마나 그 삶이 맑아지는지, 고상해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1. 사울 왕조는 어떻게 몰락했습니까?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사울의 아들들이 전사했습니다.
2절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 왕 자신도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블레셋 군사들에게 붙잡혀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호위병에게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호위병은 자신의 주군인 사울 왕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자결했습니다.

그 내용이 4절입니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 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병사들의 죽음과 사울의 세 아들의 죽음은 1, 2절에서 간단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반면, 사울 왕의 죽음은 3,4,5절에서 그 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다룹니다.
이것은 초대 이스라엘 왕으로서 사울의 실패에 대하여 성경이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여 40년간의 사울 왕조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2. 사울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은 사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선 외모로 볼 때 사람이 준수하고, 키가 컸습니다.
삼상9:2절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그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0:21절 “사울이 대답하되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나는 부족해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이란 영어로 ‘humility'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humus'에서 왔습니다.
‘휴무스’라는 말의 뜻은 ‘땅’입니다.
겸손이란 허리도 아니고, 무릎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아주 땅까지, 땅처럼 낮아지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사울은 성경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누가 보더라도 지도자 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망가졌습니다.
그의 왕가가 몰락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사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3. 그런 사울 왕이 왜 몰락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밀쳐내고 그 마음에 다른 것으로 채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울 왕은 다윗이 나타난 후 평생 그를 향한 시기심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전하고 개선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길가에 도열한 여인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상18:7절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때부터 사울 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삼상18:8절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을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사울 왕의 마음에 시기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은 그 시기심을 제거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키웠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예측하고 또 예측하고, 과장하고 또 과장하고, 집착하고 또 집착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이것이 사울 왕이 몰락하게 된 원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울 왕도 몹쓸 죄를 졌고, 다윗 왕도 몹쓸 죄를 졌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몰락했고,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 왕의 마음에는 평생 시기심의 대상인 다윗이 있었고, 다윗 왕의 마음에는 평생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했습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묵상한 다윗의 시가 아닙니까?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분노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억울함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섭섭함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미움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극복하지 못한 과거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반복되는 죄의 습성을 끊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질기고 질긴 악의 뿌리로 그 마음을 폐허로 만듭니다. 
혹시 우리에게 하나님 대신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래서 엘리오트(G. Eliot)는 인간은 ‘다섯 가지 감옥’ 속에 갇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평생 이런 감옥 속에 갇혀 살면서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첫째는, 이기주의 감옥입니다.
이기심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보이는 게 없습니다.
이웃도 안보입니다.
친구도 안보입니다.
형제자매도 안보입니다.
그들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기 가족만을 위한 감옥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둘째는, 근심의 감옥입니다.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 정도면 살만한데도 근심이 떠나지 않아요.
‘근심도 팔자’라는 말처럼 근심을 얼굴에 달고 삽니다.

셋째는, 과거입니다.
불행했던 과거, 상처받았던 과거, 실패했던 과거에 그 마음이 점령당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날 것 같지만 과거 때문에 웃음을 잃고, 자신감을 잃고, 밝은 내일의 꿈을 잃었습니다.

넷째는, 남의 것만을 좋아하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누구의 집은 어떻고, 누구의 남편은 어떻고, 누구의 자식들은 어떻고, 누구의 직장은 어떻고.......
이렇게 되면 감사하는 마음이 싹 가십니다.
자기 가정이 좋은 줄 모릅니다.
자기 직장이 좋은 줄 모릅니다.
자기 교회가 좋은 줄 모릅니다.
자기 국가가 좋은 줄 모릅니다.

요즘 ‘참여연대’란 단체가 안보리 회원 국가들에게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하는데에는 문제가 많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 이익과 관련된 문제니까 국내에서 지적하든 말든 해야지.........
그것을 바깥으로 들고나가면 참여연대는 도대체 누구의 권리와 유익을 위해 일하는 단체입니까?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은 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 반대할 것이다.”라고 일갈합디다.

의식 속에 반대로 꽉 차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움, 시기, 질투의 감옥입니다.
이제는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유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평생 갖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를 웃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울게 합니다.
휘파람을 불 수 있는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숨짓게 합니다. 
행복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4.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교훈은, 하나님 없는 삶은 몰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속회공과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링컨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링컨이 9살 되던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링컨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매일 성경을 읽어라.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네 삶의 기준으로 삼아라.”
어머니의 유언대로 산 링컨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중등교육은 작은 도둑을 만들고, 하나님 없는 고등교육은 큰 도둑을 만든다.”
‘하나님이 없는 교육’이라는 말이 우리를 섬뜩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해답입니다. 
그 삶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어보지요.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갔어요.
창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비옥한 요단 뜰을 포기하고 헤브론 산지를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창 13:3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결국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세상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갔던 그는 하나님과 땅과 자손을 얻게 됩니다.
반면, 롯은 돈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13: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마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돈을 따라간 사람이라면 그결과 거부가 됐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게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롯은 잃게 됩니다.

재산을 잃은 것은 물론, 사랑하는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만듭니다.
창19: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은 많이 후회했을 것입니다.
삼촌 아브라함의 선택에 대하여 많이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그의 삶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20세기의 기독교 최고의 사상가락 말할 수 있는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조준하라. 그리하면 땅을 얻게 되리라.”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 아시지요? 
이용규 선교사는 서울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중동 지역학 및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안락한 미래의 보장을 전부 내려놓고 척박한 땅인 몽골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의 부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느 곳으로 보내시든지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 우리에게 가장 맞는 곳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미국이든 한국이든 제 3세계 어느 국가든 어디에서 살든지 생활의 편리함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되 지 않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부르는 ‘나는 믿는다.’라는 뜻의 ‘아니마인’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들이 회당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입니다.
이 노래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2절에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보다 늦게 오신다.”
이들은 이렇게 똑같은 가사를 반복적으로 부릅니다.
이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한 유대인은 이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도우시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서,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서 그 남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믿음을 포기한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십시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이것이 사울 왕가의 몰락이 주는 교훈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