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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련한 사람들 (잠 2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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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사람들 (잠 26:1-12)


사람들이 “미련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 곰을 비유로 들곤 합니다. 그래서 “미련 곰탱이”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어리석고 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곰이 미련할까요? 곰이 정말 어리석고 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곰은 영리하고 민첩합니다. 예를 들어 곰은 연어가 산란을 위해 강으로 올라오는 시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어를 잘 잡을 수 있는 목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물속에 담그고서는 튀어 오르는 연어를 맨손으로 잡습니다. 

그 뿐 아니라 추운 겨울 먹이감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겨울 잠을 잡니다. 미리 체중을 충분히 불려놓고 겨울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곰은 시속 50키로 이상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도망가는 멧돼지를 추격해서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결코 곰은 미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동물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영리하고 민첩합니다. 

그런데 왜 곰을 미련한 동물의 대명사로 여기게 됐을까요? “곰탱이” 때문입니다. 곰탱이라는 말은 곰의 잠자리를 말합니다. 곰은 습성 상 잠을 잘 때 풀을 말아서 방석이나 침대처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웅크리고 잡니다. 자기 나름대로 안락하고 포근한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로 이 곰의 잠자리, 곰이 자기 나름대로 편안한 잠을 위해 머리를 써가며 만들어 놓은 이 곰의 잠자리를 곰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곰탱이가 사냥꾼에게는 너무도 좋은 사냥의 길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곰은 영리하고 민첩하기 때문에 산 채로 사냥한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곰은 꼭 이 곰탱이에 와서 잠을 자니까 사냥꾼들은 어렵지 않게 곰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눈에는 이 곰이 아무리 영리하고 민첩해도 곰탱이 때문에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냥꾼들이 “미련 곰탱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말 때문에 공연히 곰은 미련한 동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영리하고 민첩해 보여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해 보입니다. 곰이 나름대로 영리하고 민첩해도 사냥꾼의 눈에는 미련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냥꾼의 눈에 곰탱이가 있어서 곰이 미련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인간에게 곰탱이와 같이 미련한 구석이 있어서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의 미련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 26:1-12를 보면 “미련한 자”라는 말이 무려 11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2절만 빼고 매 절마다 미련한 자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련함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발 이 미련함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람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눈에 미련하게 보였을까요? 우리가 이점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미련함을 벗어버려야 하겠습니다.

첫째,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가장 미련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가장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간단합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지혜를 만들어 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자기 지혜만을 고집하니 미련할 밖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게 됐을까요? 전해 내려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친한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의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 이 친구가 소크라테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 뿐 인데 어떻게 저런 신탁의 말씀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를 두루 다니며 자기보다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과 함께 델포이 신전으로 가서, 왜 그런 신탁을 내리셨는지 신께 묻고자 했습니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먼저 가장 지혜롭다는 정치가를 찾아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얻은 결론은 저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이 잘 안다고 착각하며 정책을 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가장 유명한 시인을 찾았습니다. 역시 이 시인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자신들이 썼던 시 내용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시를 애송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더랍니다. 그는 자기 시가 가장 많이 읽히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이번에는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을 만났습니다. 역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오랜 작업 끝에 얻은 작은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이유는 상대적 지혜로움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어떤 부분에서 지혜로움을 인정받게 되면 자기가 모든 부분에서 다 지혜로운 줄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보다 지혜로우면 자기가 모든 사람들보다 지혜로운 줄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미련함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부분에서 상대적으로 지혜로울 수 있으나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으로 지혜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중에 상대적으로 지혜로울 수 있으나 모든 사람들 중에 절대적으로 지혜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결단코 지혜로움을 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미련함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욥의 고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욥 42:3-4를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자신이 스스로 지혜로운 척 했었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묻고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스스로 어리석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자기가 미련한 짓을 하고 그것이 미련한 행동임을 깊이 뉘우치고 나서 또 그 미련한 짓을 반복하는 사람이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비유가 정말 리얼합니다. 개가 먹은 것이 잘못되어 토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 속이 편해지면 그 토한 것으로 다시 가서 냄새를 맡습니다. 그리고 다시 핥아 먹습니다.     저는 어려서 개를 보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개들은 일을 보고 그 냄새를 맡습니다. 사람 같으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을 보고는 돌아보고 싶지 않을 텐데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습니다. 어떤 때는 심지어 그것을 다시 먹기까지 합니다. 어린 마음에 이래서 “개로구나”라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한 번 잘못해서 크게 뉘우치고 나서 다시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이 마치 개의 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 범한 실수, 특히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그 잘못은 다시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믿음의 선진들도 때론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 계획을 세워 아내 사라에게 강요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의 동일한 구원 역사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징계하시기 위해 주변 나라들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위기를 모면케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내용을 확인하게 될 때 가슴이 답답합니다. 왜 이토록 미련할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도 지금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미련하게 보일까요?

그러면 어떻게 이런 반복되는 잘못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런 미련함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을까요?

첫째, 괴로워해야 합니다.

롬 7: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리고 7:2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연약한 육신 때문에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정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반복되는 잘못에서 벗어나려면 이를 진실로 괴로워해야 합니다. “다 그런거지, 나만 그런가...”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용납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적당히 반성하고 또 흐지부지 넘어가면 안됩니다. 정말 괴로워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해야 합니다.

둘째, 돌아봐야 합니다.

바둑의 고수들의 경기를 보면 바둑을 두고 난 뒤 꼭 복기라는 것을 합니다. 패착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왜 그런 패착을 두게 됐는지 그 원인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그 때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찾아봅니다. 그래서 다음에 그런 상황이 올 때 또 다시 그런 패착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런 복기가 바둑의 실력을 발전시켜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복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반복했을 때, 도대체 왜 그 잘못을 반복했는가를 자세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그런 상황이 올 때 또 다시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경건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롬 8: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물리치고 싸워 이길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거기로부터 해방될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이끌어 주실 때 반복해서 잘못을 범하는 일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을 잃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과 같으니라” 미련한 사람들은 결코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잠시 영광을 누리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그 영광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에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여름은 매우 덥기 때문에 눈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추수는 우기가 지난 때임으로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에 비가 온다면 농사는 다 엉망이 될 것이고, 사람들의 삶 자체는 망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미련한 자에게는 복이 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유 없는 저주는 없다는 것입니다. 참새가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것처럼, 제비가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떠나는 것처럼 이유없는 저주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자에게는 이유없는 저주가 찾아오지 않겠지만 미련한 자에게는 저주가 이유가 있어서 찾아든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3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마부가 말을 몰 때 채찍을 사용합니다. 말이 마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때 말은 채찍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는 통제를 따르지 않을 때 재갈을 물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는 매를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하나님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주가 찾아들게 됩니다. 더 심하면 매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인생이 고달프고 힘겹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초청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우리가 미련한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 보실 때 미련한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속히 하나님 보실 때 미련한 부분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미련한 점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지적해 줍니다. 하나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지혜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을 괴로워하고 잘못의 원인을 찾고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복되게 살려면 속히 미련함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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