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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손에 빠지다 (삼하 24:13-14, 행 1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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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손에 빠지다 (삼하 24:13-14, 행 11:19-21)


지난 주간 두 번째 시도한 우주선 나로호 발사가 또 실패하였습니다. 1단계 엔진 폭발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우주강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우주선이 궤도에 진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다음 발사는 2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합니다. 삼세번이라고 하니 다음에는 꼭 성공할 것입니다. 사실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중요합니다. 일이 잘 될 때보다 안 될 때가 더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매를 맞을 때,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가 인생에서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19명의 자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수산나의 교육원칙 가운데 보면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은 잘못은 반드시 벌한다’,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게 하고, 부모의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을 용서하되 무조건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벌을 받을 줄 알게 하는 것은 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으면 저주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만 꾸지람을 듣지 않고 벌을 받지 않고 자란 사람들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킵니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는 ‘치리와 권징’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치리란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치리를 영어로는 훈련(discipline)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교회에서 벌을 주는 것은 훈련이지 벌을 주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옛날 교적부에는 뒤쪽에 책벌부가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벌을 받을만한 이유가 전혀 아닌 것들로 벌을 받았습니다. 대낮에 술을 마시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이 출교의 이유이었습니다. 집사가 주일을 잘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책벌의 이유입니다. 자녀를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 결혼시켰다고 벌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치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고 봅니다. 벌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벌을 줄만한 권위를 가진 당회가 되어야 하고, 당회가 벌을 주면 벌을 받을 줄 아는 교인들이 있어야 좋은 교회입니다. 
  
‘혼나며 자란 아이 머리가 나쁘다’라는 어느 의사를 보고를 보았습니다. 아이를 주 1회 이상 체벌하면 IQ가 8이상 감소되고, 성격위축, 뇌손상 등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사랑 없이 혼내는 것이나, 홧김에 체벌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화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잠언 3:12에는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8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징계가 얼마나 큰 복인가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꾸짖을 수 있고 야단 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프랑스의 영성가 프랑수아 바리용은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면 그것은 벌을 주셔야만 하기 때문이요 그분의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은 정당한 것이고 감사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업적 과시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강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에 전쟁에서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에도 숫자가 많아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싸울 때도 숫자가 많아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간의 손에 의존하고 있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마음이 약해져서 군대에 나갈 사람들을 계수하고자 하는 유혹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회개하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벌을 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로 하였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므로 그 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서 24:14에는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손보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다윗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선택이었습니다. 벌을 받는 사람이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벌 받을 사람에게 벌이 옵션이라니 얼마나 이상합니까? 벌을 선탣하게 하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택하게 하신 벌은 첫째는 7년 동안의 기근입니다. 둘째는 원수에게 쫓겨 석 달을 피해 다니는 것입니다. 셋째는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이 돌게 하는 것입니다. 벌을 선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 14:21에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구약적 개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징계란 성경에서 말한 네 가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중 두 가지 즉 칼과 기근이라는 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과 함께 벌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벌은 축복입니다. 
  
고통이란 ‘차라르’란 말입니다.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세 가지 징벌은 다윗의 자랑을 꺾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자랑과 힘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이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손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 자비, 용서, 관용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징계, 책망, 용서하지 않음도 포함합니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때로는 용서하지 않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 1:6에는 “내가 다시는 이스르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은 용서받지 못하는 백성보다 더 마음이 아프십니다. 
  
오랜 전승의 수도원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도원에 앤드류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바보스럽고 머리가 나쁜 수도사였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원장이 좀 모자라는 앤드류를 사랑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원장이 광장에 수도사들을 집합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숙제를 내겠다. 새를 한 마리씩 잡아서 죽여라. 다만 아무도 그 새를 죽이는 것을 보면 안 된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이곳에 다시 모여라” 저녁이 되자 다들 죽은 새를 손에 들고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앤드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서로 수군거립니다. “바보 같은 앤드류, 뭘 하고 있어?” 늦은 저녁이 되자 앤드류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원장님이 앤드류에게 물었습니다. “숙제는 했느냐?” “원장님 죄송합니다. 숙제를 못했습니다. 새를 잡아서 계곡 위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다시 폭포 물에 빠트려 죽이려고 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는 곳이 없어서 죽이지 못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못을 용서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저의 동생이 한국에 있을 때에 경부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승용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동생은 늘 속으로 “하나님, 다른 건 몰라도 운전은 잘 하지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차를 전복시키시면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동생은 어쩌다 한번 교통위반을 하면 반드시 경찰에게 걸린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고 작은 잘못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교통위반해도 경찰에게 안 걸려 운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운이 나쁜 것입니다. 잘못은 용서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용서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존경받는 성군으로 세우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배반하는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이 죄를 물으셨고 기억하게 하셔서 완전히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반면에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치시면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면 사랑하지 않으시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람의 손에 빠지지 말고 여호와의 손에 빠져야 합니다. 

24:14하반절에는 “내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라는 말은 전쟁의 재앙 때문에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기근의 재앙 때문에 흉작이 들어 사회가 어려워지는 것보다, 불치의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하나님께 맞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선택은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형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에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사람에게 좋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얻는 것보다 부정한 방법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낫습니다. 
  
알버트 보그만은 “명성이란 초콜릿 무스와 같습니다. 맛이 너무 좋아서 한 접시 가득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그건 한낱 바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 뿐이죠”라고 했습니다. 명성의 덧없음에 대한 실망보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우리의 경건 생활을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인 워렌 버핏은 “명성을 얻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그러나 그것을 망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의 명예나 물질이나 인기를 얻으려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울왕은 자기 칼에 자기가 자살하였습니다. 악한 왕 아합은 자신의 병사와 옷을 바꿔 입고 전쟁터에 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합의 왕비인 이세벨은 왕비 호위병들에 의해 창밖으로 내어던져져 죽었습니다. 헤롯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벌보다 하나님께서 손보시는 게 훨씬 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손은 긍휼을 대신하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죽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미리 손보시는 게 훨씬 좋습니다. 
  
이스라엘 사사기에는 15명의 사사가 있었습니다. 웃니엘, 에훗, 삼갈, 바락과 드보라, 기드온, 아비멜렉,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엘리, 사무엘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500년 동안 하나님의 구원과 징벌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은 여지없이 이방의 손을 빌려 손을 보십니다. 그리고 나라가 위태할 때 사사를 통하여 구원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이방을 통하여 그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나 사사를 통하여 구해주시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코리니코프는 “마치 누군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저항할 수 없이 맹목적으로 끌려간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죄의 본성이란 악마 손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여호와 손에 빠져야 다시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손에 빠져야 하나님께서 건지십니다. 
  
베드로전서 2:20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명분 없는 매를 맞지 마세요. 여호와의 매를 맞으세요. 내 잘못으로 매를 맞거든 감사하세요. 매가 없으면 버림받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긍휼하심인 것을 믿으세요.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의 길이와 그 정도와 깊이는 다양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십니다. 아프지만 잘 자라게 하시기 위해 잘라내십니다. 잘라내야 나무가 자라고 가지가 자라고 잎이 무성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피에르 렌치니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Orphans Lead the World)고 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찰스 5세, 리슐리 추기경,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빅토리아 여왕, 골다 메이어 총리, 히틀러, 레닌, 스탈린, 에바 페론, 피델 카스트로 등이 고아 또는 사생아였습니다. 인생의 문제와 압력과 열이 석탄을 다이아몬드로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우리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고아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의 징계의 손이 느껴질 때마다 감사하세요.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손에 빠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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