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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창 21: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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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창 21:22-34)


창세기 21:22-34
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모든 사람에게는 향내가 있습니다. 특별히 민족 간에는 민족 고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의료선교차 인도에 간 일이 있었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코를 자극했던 것은 카레 냄새였습니다. 공항뿐만 아니라 인도를 떠나는 내내 그 카레 냄새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동남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향신료(고수) 냄새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 향신료 냄새는 음식뿐만 아니라 호텔 침대와 수건에도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민족들 특유의 이런 냄새들을 맡으며 저는 한국 사람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물어보니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하긴 우리나라의 모든 음식에 마늘이 빠지질 않으니 우리 몸속 깊숙이 이 냄새가 배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늘 가까이 하고 늘 즐겨 먹는 것은 이처럼 은연 중 우리 안에 들어와 냄새나 향기를 만들어 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신앙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냄새가 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4-15)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있습니까? 그 향기는 자기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우리 이웃들은 금세 알아차립니다. 오랜 세월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의 향기가 낫습니다. 22절입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브라함을 지켜보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자기 민족에게 임했던 불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그것을 기도로 풀어주는 아브라함의 능력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 90세 된 사라의 몸에서 자녀를 잉태하는 도무지 불가능한 기적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진정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곳곳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런 칭찬과 인정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삭에 대한 아비멜렉, 아마 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때의 아비멜렉이 아닌 그 아들일 것인데 그 아비멜렉이 이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5,26).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과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모두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같다.” “저 사람은 정말 믿는 사람 같다.” 이런 인정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마땅히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어야 할 칭찬이요 우리가 풍겨야 될 향기들입니다. 어느 날 전혀 뜻밖이었다는 듯이 “너도 믿는 사람이었어!” 하고 의아해한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커녕 정반대로 우리 안에 탐욕과 무정함과 이기심과 근심과 두려움이라는 세상에 속한 냄새만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향기라는 것은 그가 평소 가진 생각이 무엇이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서 몸과 영혼에 배고 그래서 밖으로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사망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망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곧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하면 생명과 평안의 열매가 주어집니다.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가득 찬 인생이 되고, 이처럼 기쁨과 감사가 있으면 축복은 절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그 얼굴만 보고도 알아야 합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절친한 친구가 어떤 사람을 대통령 비서로 추천한 적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친구의 인격을 믿었기에 그 사람을 채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 사람을 면접하고는 그 자리에서 되돌려 보냈습니다. 친구가 이에 대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링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을 보니 진실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40세 이전까지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입니다. 그러나 40세 이후는 자기가 만든 얼굴입니다. 우리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뇌와 짜증과 허무의 얼굴입니까? 감사와 기쁨과 평화의 얼굴입니까? 사람은 그 안에 품고 있는 것들이 은연중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얼굴을 만들고 향내를 풍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은 이유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23절입니다.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영향력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임을 깨닫고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언약, 달리 표현하면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기와 자기 자손 대대로 아브라함과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입니다. 

지금 아비멜렉은 군대장관도 거느리고 있는 블레셋의 도시 국가의 왕이고 아브라함은 그곳에 우거하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먼저 찾아와 자기 땅과 후손들에 대하여 후대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면서 그를 보호하시고 복을 주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우리를 우습게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세상에서 멸시 받거나 업신여김 받는 것을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선지서들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못지않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아람이나 앗수르나 에돔이나 애굽이나 바벨론에 대한 심판도 함께 언급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무엇입니까? 복수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나1:2)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들에게 대해서 복수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열방 가운데 이스라엘을 높이십니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은 열방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땅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는 이유는 그 짠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맹자』 <이루 상>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우리가 모욕을 받는 것은 상대방의 힘이 세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속지 마세요.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고 세상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심으로 찾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높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언약

이제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평화의 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23절의 아비멜렉의 말을 다시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여기 하나님 앞에서 그대가 나와 나의 아이들과 나의 자손을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그대가 나그네살이를 하는 우리 땅에서 내가 그대에게 한 것처럼, 그대도 나와 이 땅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앙숙관계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미래의 역사를 내다보며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할 것입니다. 현대 중동의 화약고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이에도 본문의 말씀과 같은 평화의 언약이 맺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항상 긴장관계였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의 시대에는 블레셋이 가나안 지역의 패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쟁 관계가 됩니다. 사사시대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다 다윗 왕조가 등극하면서 블레셋은 완전히 정복당합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AD 70년과 AD 135년 두 차례에 걸쳐, 로마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싸웠던 독립전쟁 이후입니다. 

단단히 화가 난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가나안 땅에서 모두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 명칭도 유대에서 팔레스틴이라 바꾸어 버렸습니다. 팔레스틴은 블레셋에서 나온 말로 이 땅을 모욕하기 위해서 부른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칭만 그렇게 바뀐 것뿐이지 민족적인 의미의 블레셋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블레셋 민족은 이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쫓겨난 팔레스틴에는 떠돌이 아랍계 인들이 몰려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로 흩어졌던 유태인들은 반유태주의 분위기 속에서 근 2천년 동안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나고 집단 학살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2차세계 대전 중 독일에 의해 홀로코스트라는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최대의 비극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고난의 대가로 유태인들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지지 하에 1948년에 팔레스틴 땅에 독립 국가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땅에는 이미 아랍계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근 2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2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의 땅문서를 들이대며 이것이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세력이 들어와서 자기 땅을 강제로 빼앗고 쫓아내버렸습니다. 마치 우리가 옛 광개토 대왕 시대의 문서를 들이대며 만주가 우리 땅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간의 역사적 분쟁의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백만의 팔레스틴 주민들이 갑자기 자기 땅을 빼앗기고 떠나야 하는 일도 이해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후 이스라엘은 여러 번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그 영토를 확장했고 150만 명의 팔레스틴 사람들은 좁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 지구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 외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요르단과 시리아와 레바논 등 인근 나라로 흩어져 비참한 난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죽거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작가 엘리야스 샤쿠르는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기록한 『피를 나눈 형제』라는 책에서 팔레스틴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유럽에는 히틀러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는 오래전에 유대인들을 죽였지. 남자, 여자, 할아버지, 할머니, 심지어는 너희 같은 어린아이들까지도. 히틀러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죽였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심하게 상처를 받았고 결국 그들은 집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마을로 올 거라고 한단다. 며칠 안으로. 그들 중 몇 명은 우리 집에 머물게 될 거야. 아마 일 주일 쯤. 그리고 나면 그들은 이동할 것이야. 그들은 기관총을 갖고 있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특별히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하며 그들이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로부터 2주일 후,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스라엘 군인들은 우리 마을에 찾아왔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총을 들고 찾아온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양을 잡아 구어 주었고 차를 태워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친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군인의 대장인 듯한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했다. 우리 정보에 의하면 이 마을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집에 머무는 것은 위험합니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열쇠는 우리에게 맡긴 다음 여러분은 언덕 위로 가서 생활하셔야 하겠습니다. 물건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떠나십시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인 대장의 말에 나와 부모님은 순순히 따랐다. 우리는 아무런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곧바로 집을 나와 언덕 위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지내야 했다. 밤에 내리는 이슬도 그대로 맞아야 했고 밤이면 떨어지는 기온 때문에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게 바깥에서 생활을 한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도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는 살금살금 언덕을 내려와 동네로 들어갔다. 그런데 동네의 모든 집들의 대문이 열려 있었고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집안을 보았을 때 살림살이는 모두 부수어진 채 내동댕이쳐진 것을 보게 되었다.

골목에 들어서자 총을 든 군인들과 마주쳤다. 군인들은 나와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아버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울면서 쫒아가는 나를 밀치고 아버지를 군인 트럭의 적재함에 태웠다. 그리고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 아버지는 테러리스트야. 이제 네 아버지는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아.’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은 나에게 뒤로 돌아 언덕을 향해 달려가라고 얘기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 언덕을 향해 내 달리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군인은 나에게 겁을 먹으라고 했는지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후로 영원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들이 느꼈던 현실입니다. 지금 팔레스틴과 이스라엘 갈등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점령촌을 건설하며 자꾸 땅을 확장시켜 갑니다. 점령촌을 건설한 후에는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고 그 점령촌에 이르는 도로 폭 50-70m 주변은 경작도 어떤 건물도 짓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콘크리트 분리장벽입니다. 이스라엘은 무장세력들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지난 2002년부터 팔레스타인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분리장벽을 쌓았습니다. 이 높이가 8-10m에 이르는 거대한 장벽으로 총길이가 730km에 달하는 현대판 만리장성입니다.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자신들이 2차세계 대전 중에 ‘게토’라는 분리장벽 안에 갇혀 지냈는데 그것을 앙갚음 하는 꼴이라 할 것입니다. 이 안에서는 물이 2주에 한 번 정도만 공급되고 전기도 제한적으로 공급됩니다. 실업률이 50%에 달하고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보다 못해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들은 땅굴을 파고 이집트에서 물자를 공급하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중무장 병력이 지키고 있는 체크포인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한정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립된 가자 지구를 돕자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 지난 5월 31일에는 가자 지구에 물과 의료품등 구호물품을 공급하려던 비무장의 구호선단 6척에 이스라엘 무장 특공대가 난입을 하여 9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을 부상시키는 테러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공해상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태로 유엔 인권이사회가 열렸고 이곳에서 국제 조사단을 만들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국은 반대를 하고 우리나라는 기권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번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인권사항을 개선하자는 결의안을 낼 때마다 기권을 하고 미국은 반대를 합니다. 미국은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하며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던 우리의 모습을 궁색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일관성이 없으면 인권은 단지 정치도구만 될 뿐입니다. 인권은 하나님을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자기 인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권도 보호하고 존중하는 정의로운 국가, 도덕적으로 탁월한 국가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의 구약 말씀에 친근하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이 행하고 있는 잔인함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고통들을 충분히 상쇄할 정도이고, 이제는 또 하나의 억압자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중동의 분쟁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과 블레셋 사이에 맺어졌던 이 평화조약의 소중함이 절실해집니다. 서로 평화가 필요합니다. 서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서로 후대하고 친절히 할 것을 맹세하는 평화의 조약을 맺듯이 그런 평화의 조약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제와 힘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높이 쌓은 콘크리트 장벽은 마치 어떤 부자가 자기 집 주위에 둘러쳐 놓은 높은 담장을 연상케 합니다. 스스로도 불안하며 이스라엘은 늘 중동의 이방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비공식적으로 핵무기까지 보유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당당한 아브라함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아브라함의 당당한 태도입니다. 서로 계약을 맺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빼앗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이었는데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종들이 그랬고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변명을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계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 땅의 나그네 아브라함 사이에 맺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맺는데 필요한 양과 소를 아브라함이 다 댑니다. 여기에 더하여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더 내놓습니다. 앞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자기가 팠지만 값까지 지불함으로써 후환을 없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처럼 당당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여기 말고도 여러 번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포함된 도시국가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을 네가 취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자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3) 당당하지요. 혹시 나중에 딴소리 할까봐 물품을 다 돌려준 것입니다.

또 23장에 보면 사라가 죽은 후 그 묘지로서 막벨라 땅을 구입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헷 족속이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23:6) 하며 무상으로 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13)하며 은 400세겔을 주고 그 땅을 삽니다. 이 땅은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부부가 묻히는 영광스런 조상의 묘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당당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33절에서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곧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복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들 또한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성경의 약속과 축복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성취되고, 또 우리 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비굴하지 마십시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기업이고 우리 소망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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