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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으라 (막 13: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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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막 13:28-37)


어제 저녁은 참으로 기분 좋은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제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좋아하는 경기가 있어도 그것을 지켜보지를 못했습니다. 마음이 떨려서도 그랬고 제가 보고만 있으면 이상하게도 제가 응원하는 팀은 이길 때보다 질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좋아하는 경기는 애써 외면하고 나중에 결과를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녹화된 경기를 보곤 했습니다. 지난 202년 월드컵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제 마음을 바꾸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바심을 버리고 감사하며 승부가 아닌 경기 자체를 즐기기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제의 경기를 보았습니다. 기가 막히게 한 골이 터졌습니다. 이것이 역전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잠깐 머리를 스쳤습니다. 하지만 바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앞서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왕이면 더 기쁜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내가 항상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같이 즐기자고. 그 말대로 이번에는 당당하게 같이 중계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 2:0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기쁘지만 가뜩이나 나라도 어려운데 월드컵 첫 경기에서 진 그리스는 정말 마음이 아프겠지만 이거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두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두 군데를 다 갈수는 없습니다. 그 길은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애써서 이를 부인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에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생과 저승으로 갈라서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다 하늘로 들림 받아 하늘나라 천국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그동안의 주를 섬긴 수고를 따라 상급과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지옥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십니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아주 가깝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열매를 다 수확할 때쯤 이른 비가 내립니다. 

이는 곧 겨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늦은 비가 내리는 것은 곧 여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겨울 동안 무화과나무는 활동을 멈춥니다. 가지의 색깔도 짙어집니다. 하지만 여름이 시작이 되면서 새 잎사귀가 나오게 되고 가지의 색은 연해집니다. 당연히 이제는 여름이 시작되는구나 알게 됩니다. 그건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지면서 온 세계에는 온갖 지진과 재앙들이 계속이 될 것이라고 했고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서로 대립하고 전쟁과 기근과 재앙이 끊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데 이 모든 약속의 말씀들이 오늘날 우리 세대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재앙들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계의 평화가 정착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이라크에서 여전히 회교도 무장단테들과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고 수없는 폭탄 테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회교도에 의한 이 테러들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고 아직은 평화롭다고 하나 어쩌면 우리나라도 여기에 포함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국내에 잠입했던 테러분자들이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아니 우리들에게는 그보다 더 위험한 테러분자들이 북쪽을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은 계속해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나라는 계속 전쟁상태입니다. 휴전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것이지 끝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자연 재해입니다. 태풍 홍수 지진 화산 폭발 해일 등의 자연 재해와 더불어 기근과 가뭄 역시 우리들 세상을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마지막 때가 가까워졌음을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깨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지난 60년간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미군 때문인 줄 아십니까? 

북쪽 이스라엘을 수시로 괴롭히던 나라가 바로 아람입니다. 오늘날의 시리아입니다. 그 당시는 수리아라는 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있을 당시는 그들이 쉽게 쳐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침략 계획을 짜서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어느 새 이스라엘 군대가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엘리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들의 작전계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가리켜서 요아스 임금은 이스라엘의 군대와 마병이라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을 앞섰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아주 엄청나게 훈련된 막강한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들이 전면전을 벌이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건 바로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많은 성도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휴전선을 지켜 주셨기에 그들이 감히 남쪽을 침벌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무장공비를 보내 남한을 흔들어 놓으려고 몇 번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던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인 것이요 그 배후에는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모든 세상의 돌아가는 일들이 주님이 오실 날이 아주 가까웠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시느냐 그 날과 그 때를 비록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아주 가깝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서 주님 다시 오시는 모습을 볼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더 깨어 있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곧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러냐?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높은 수준에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근본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는 성도 곧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거룩한 존재들이었습니까? 그들의 실상은 바울이 시기, 다툼, 분쟁, 음행을 없이 하라고 경계하는 것처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저들은 전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신분상으로는 거룩한 존재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히려 거룩하라는 부르심 가운데 이루어져가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갖는 이중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미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변화되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미치지 못한 팽팽한 역설적 긴장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어야 할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마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족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변화의 걸음을 걷는 인생을 가리켜 성경은 진실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 거룩한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온전히 거룩하지 못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거룩하다고 하면 우리는 아무런 실수도 허물도 없는 존재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온전한 거룩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리니까 여전히 실수와 허물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아울러 거룩이란 구별되었다는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옷가게에 많은 옷이 걸려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골라서 돈을 지불하게 될 경우 우리가 그 옷을 가리켜 내 옷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가게 주인의 옷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내 옷입니다. 

그러니까 내 옷이라는 말은 내가 산 옷이라는 뜻도 됩니다. 아이들을 입히기 위해서 샀다고 해도 그건 내 것입니다. 왜냐 하면 내가 이미 그 값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입지 않았다고 해서 내 옷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소속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알아도 그 하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 하나님은 이제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죄의 자식 멸망의 자식이었지만 그런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보십시오. 아버지를 졸라서 미리 유산 상속을 해 달라고 해서 그 돈을 가지고 멀리 떠났던 아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더 이상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나를 그저 일꾼의 하나로라도 써주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동구 밖까지 나와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아들을 보고 달려갑니다. 끌어안습니다. 아들은 거지꼴입니다.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 저에게 새 옷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잔치를 벌여라.” 이 변함없는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바로 이렇게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자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씻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던 날 애굽 온 땅에 죽음의 재앙이 덮쳤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첫째는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은 것은 오직 문설주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라고 한 명령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른 집과 다른 점은 딱 하나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예수가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마치 문설주에 피를 바르듯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나에게 발라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재앙이 우리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중생했다 또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동시에 구별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의 옷이 덧입혀졌습니다. 죽음의 재앙이 우리를 지나쳐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문제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우리는 변해가고 있습니다. 마치 배추를 소금에 절인 다음 여기에 온갖 양념을 하면 맛난 김치로 바뀌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점차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온전한 자가 아닙니다. 여전히 문제투성이입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주님이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마치 밥솥 안에서 그저 쌀과 물로 있었던 것이 잘 익은 밥으로 바뀌듯이 그렇게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금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신분상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온전하지는 못한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것을 언제든지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 하지만 아직 온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즉 거룩한 자라고 불리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는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여전히 허물과 실수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점차 온전한 자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결이라고 합니다. 마치 밥을 뜸을 들이듯 그래서 좋은 밥맛을 내듯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먹다가 이윽고는 이유식을 거쳐 밥을 먹어가며 커가는 것처럼 우리 역시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저 잘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우리가 직접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은 중요한 구절은 외우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뜻을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두고 되새김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제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의미를 잘 모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순종입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아요. 그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이가 자기 힘으로 안 되면 엄마를 찾습니다. 무엇을 할 때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엄마 눈치를 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허물과 실수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서 점차 자라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 안에서 이렇게 자라가야 합니다. 

왜 순종해야 합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잼잼도 시키고 곤지곤지도 시키고 그럽니다. 짝짜꿍 짝짜꿍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의미 없는 행동 같은데 그런 것을 따라 하면서 아이의 지혜가 발달해가게 되고 기능이 활성화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도 그렇게 자꾸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 그것마저도 온전하지 못하던 말이 점차 의미를 알아가게 되고 정확해져 갑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이처럼 말씀과 기도의 사람 그리고 순종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게 우리의 복입니다. 그게 우리가 사랑받는 비결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순종은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어린아이 때에는 온통 섬김만 받습니다. 하지만 자라가면서 점차 섬기는 사람으로 바뀌어갑니다. 대접 받기 위해서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섬김에도 두 종류의 섬김이 있습니다. 엘리야를 섬겼던 사르밧 과부는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섬기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저가 가진 것은 아주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 먹을 것조차 없어서 마지막 빵 한 개 만들어서 어린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누구하나 도움의 손길조차 없었습니다. 누구 도움이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이제 마지막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고 죽으리라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명령대로 순종하였더니 죽음의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중간에 아이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안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의 몸 위에 세 번을 엎드렸더니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르밧 과부 그가 가진 것은 아주 보잘 것이 없었지만 먼저 나를 위하여 빵을 만들어오라는 그 명령대로 따랐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가뭄도 죽음도 저를 두렵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엘리사를 섬겼던 수넴 여인은 누구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원해서 엘리사를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나이 많도록 낳지 못했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잘 크던 그 아이가 갑작스럽게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 하더니 어머니 품에 안겨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그 아이를 다시 살리십니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7년 가뭄의 때에 저로 가뭄을 피해 있도록 미리 알려주시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 모든 땅과 소출을 다 되찾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섬기는 자의 복입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는 것은 나의 형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잘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기쁨으로 섬기되 더 좋은 것은 자원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이 주의 사자를 섬겨서 복된 자가 되었다면 동시에 또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길 수 있어야 하고 부모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많은 것으로 섬기고도 남도록 우리의 삶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그런데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섬기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그것이 비록 보잘 것이 없어도 기쁨으로 섬기며 순종하여 섬기며 자원하여 섬기면 그것이 내게 복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순종하여 섬겼고 수넴 여인은 자원하여 섬겼습니다. 누가 더 복된 자입니까? 둘 다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나는 보잘 것 없다고요? 그래요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어떤 역사를 일으켰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자그마치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보잘 것 없어도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섬겨도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은총은 엄청난 것입니다. 

실수투성이면 어떻습니까? 허물만 가득하면 어떻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실수 우리의 허물이 아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순수한 열정을 기뻐하십니다. 순종하는 그 모습을 기뻐하시고 나누고자 하고 베풀고자 하고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십시오. 나는 못해도 주님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안 되던 일도 주님 안에서는 가능해집니다. 허점투성이 우리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허점투성이 말썽꾸러기 자녀들을 돌보는 부모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살펴주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나의 허점투성이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보잘 것 없는 허점투성이일지 몰라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나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심을 믿으십시오. 보잘 것 없는 밀가루라 할지라도 좋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라도 좋습니다. 그것으로 섬기고 주님 앞에 드리고 내어 놓으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아멘하십시오. 나는 안 된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심을 믿으십시오. 넘어지면 어떻고 쓰러지면 어떻습니까?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나는 안 된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신다고 믿으십시오. 나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그러니 주님이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렇게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것은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돼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시니 나는 할 수 있어. 이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가 되심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항상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의 길을 걸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프랑스의 화학자로 세균 연구, 예방 접종 등에서 신기원을 이룬 대학자이며, `살균(pasteurization)'이란 말이 그의 이름에서 나왔을 정도로 만은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발견과 연구가 계속되던 중의 파스퇴르 자신의 몸은 반신불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신체장애가 연구 생활을 도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각자의 연약함이 오히려 더 크고 귀한 열매를 이룰 수 있다는 불굴의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 여러 성도들이 계속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일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들이 지도자를 잘못만나 저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면서 탄식도 하고 아파도 하고 안타까워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저와 교회를 사랑하시는 군요. 더 엄청난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만만하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이 우리 모두의 감사와 찬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을 담아 항상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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