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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정체기 (수 1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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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정체기 (수 17:10-16) 


오늘 말씀은 우리 신앙이 어떤 경우에 정체기로 들어가게 되는가를 말씀드립니다. 신앙이 올라가는 것을 부흥이라 하고 ‘머뭇거리는 시점’을 정체라 하고 퇴보되는 것을 침체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은 한순간에 침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결정적인 죄나 유혹에 빠져 한 번에 엎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럴 때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신앙은 그 유혹이나 죄에 빠지기 얼마 전부터 열정이 식고 머뭇거리는 정체기의 시간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도 부흥기와 침체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90년대 10년이 정체기였습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30년 한국교회는 엄청난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세계 교회역사상, 이렇게 급격한 교회성장을 이룬 예가 없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는 여의도에서 전국 집회가 열리면 백만 백오십만 성도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때 목사 될 사람, 사모 될 사람, 선교사 나갈 사람 집회 때마다 손들고 헌신하고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울며 부르짖고 했어요. 

70년 80년 부흥의 계절에 그렇게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가 이렇게 많은 거예요. 그래서 천만 성도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와 한국교회는 정체기에 들어섭니다. 더 이상 전도가 안 되는 시점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2010년 지금은 전반적으로 볼 때 침체기에 들어갔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역사를 볼까요?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시대와 다윗왕국시대 이렇게 삼등분 해보면 여호수아 시대는 부흥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사사시대를 보십시오. 완전 퇴보, 침체기를 4백년 동안 겪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면서 다시 다윗과 솔로몬 부흥기로 올라갑니다. 여호수아 시대는 매우 영적으로 충만하고 강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시대 완전 침체기로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어디에서 정체기가 시작되었을까? 어디서 공동체 신앙의 머뭇거림이 있었을까요? 저는 이 머뭇거림을 바로 오늘 본문 여호수아 17장 요셉지파의 모습에서 찾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주목해보아야 할 이유가 뭔가? 제가 보니까 역사적으로 한 시대가 영적 정체기가 들어가는 때나,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이 정체기에 들어갈 때의 증상은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신앙이 정체기로 들어가는 증상 세 가지를 본문을 통하여 말씀드립니다. 세 가지 중 하나만 있어도 정체기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에서 신앙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조금 머뭇거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정체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체기를 방치했을 때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4백년간의 침체기를 맞이했습니다. 

첫째, 신앙의 정체기는 나보다 앞선 이들의 열정이 식어진 틈으로 옵니다. 

오늘 17장은 요셉지파가 하나님 주신 땅을 이제 정복하여 올라가는 모습을 봅니다. 요셉지파는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있었고 두 아들이 한 지파씩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 인생에서 큰 환난 속에서도 순종하고 쓰임 받았던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상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장면이 16장 17장 두 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런데 자기들 기업으로 주신 땅을 차지하러 가는데 잘 가다가 머뭇머뭇합니다. 

가나안 족속을 다 쫒아내지 못해요. 16:10절 그리고 17:12절입니다. 16:10절을 먼저 함께 읽어봅니다. 에브라임 자손이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립니다. 함께 살면서 종으로 부리기로 합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자손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입니다. 17:12절도 읽어봅니다. 므낫세 자손은 어때요? 여기도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므낫세 자손이 쫒아낼 결심을 못하니까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살기로 결심을 굳혀버립니다. 그래서 함께 삽니다. 

여러분, 신명기7장에 하나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이름을 거명하십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완전 진멸하라, 케렘입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확실히 쫒아내라, 어떤 언약, 결혼도 금한다, 왜냐? 너희가 가나안 자손을 남겨두면 너희가 그들의 더러운 우상 신앙을 본받게 된다, 그러면 마침내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그러면 너희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신명기 20장에 또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어정쩡하게 되는가? 왜 요셉지파는 그들을 쫒아내지 않고 함께 살기로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보다 앞서 땅을 정복하러 나갔던 유다지파의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15:63절 한절을 봅니다. 유다자손이 예루살렘 높은 곳 여부스 족속 쫒아낼 마지막 시점에서 엉거주춤 합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요셉지파의 눈에 자기보다 앞선 유다지파의 모습 중에서, 더 심령이 부흥하여 도전하고 앞으로 나가는 갈렙이 있었고 갈렙을 따르는 용사 옷니엘이 있습니다. 14장 보면 갈렙의 헤브론 정복이 나오죠. 그 헤브론에는 아낙자손들, 3미터가 넘는 거인 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 무찔러버리고 쫒아내고 헤브론 가장 높은 산지를 정복하는 갈렙 옷니엘이 유다지파입니다. 

그런데 이 유다지파의 모습을 보고 따르는 요셉지파 사람들은 가장 영적으로 부흥된 용사들을 보고 따르려고 하지 않고 가나안 여부스 족속을 쫒아 내지 않고 머뭇거리는 유다지파 사람들을 따라간 것입니다. 갈렙장군, 옷니엘 장군이 있는데 그분들을 따라가자! 그러지 않고 ‘아! 유다지파도 가나안 자손을 다 쫒아내지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자기 앞에 열심히 믿고 섬기는 사람을 잘 안보고 뒤에 쳐져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요. 유다지파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요셉지파가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 유다지파가 쫒아내지 못한 여부스 족속이 언제 진멸되는지 아십니까? 500년이 지나고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여부스 족속을 쫒아냅니다. 그 5백년 동안 여부스 족속이 강력해집니다. 다윗 군대가 쳐들어 올라올 때 업신여기고 비웃습니다.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그날 멸하고 그 산성을 다윗 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뒤에 쳐져있다면, 내 뒤에 오는 믿음의 식구들은 그걸 보고 신앙의 정체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믿은 자의 책임이 큽니다. 지금 나보다 뒤에 믿은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내 신앙이 정체기로 머뭇거리게 되면, 나보다 뒤에 믿은 사람들은 나를 보고 따라서 정체기에 들어섭니다. 미국이 기침 시작하면 한국은 감기몸살 걸린다고 그럽니다. 

엄마 아빠가 집안에서 대화가 없고 냉랭하면 아이들은 성격이 밝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 불화가 심하면 아이들은 거칠어집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싸우니까 내 성격이 점점 거칠어져!’ 그렇게 일일이 항의하지 않습니다. 이집에서 나가야지! 나중에 엄마 아빠 화해하고 잘 사는데, 어느 날 사춘기가 되어 아이가 집 나가버립니다. 

내가 예배에 조금 소홀했는데, 내 뒤에 오는 초신자는 신앙에 몸살이 나버립니다. 내가 좀 다운되어서 기도를 조금 쉬었는데, 초신자는 그것을 보고는 기도를 아예 놔버립니다. 술버릇도 처음에 누구한테 배웠는가에 따라 개망나니같은 주사가 되기도 하고, 술 먹으면 바로 조용히 자기도 한다고 합니다. 

초신자들은 말하지 않아도 보고 배웁니다. 내 신앙은 지금 조금 식어졌나? 이걸 주의하셔야 합니다. 유다지파는 설마 요셉지파가 가나안 족속 쫒아내지 않은 불순종이 자기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지만, 성경은 유다지파로부터 요셉자파로, 그리고 모든 지파에까지 열정이 식어졌고 꺾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앙의 정체기는 내 삶에서 감사목록이 허물어진 틈으로 옵니다. 

14절부터 잘 읽어보면 요셉자손은 하나님 주신 땅에 대한 감사가 허물어집니다. 여호수아에게 와요. 그리고 자기들 기업으로 받은 땅에 대하여 따집니다. 그들이 항의를 합니다. 요셉지파의 말을 정리해보면 이겁니다. 우리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 우리는 더 많이 갖고 싶다, 그런데 지금 너무 좁다! 이걸 해결해 달라!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은 왜 나를 이 정도로만 취급하시는가! 이 불만과 원망입니다. 

왜 내 삶은 지금 이렇게 흘러가고 있지? 왜 내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색하시지? 나에게 좀 더 후하게 대해주실 수는 없나? 에이 정말 생각하면 너무 우울하네! 이런 생각입니다. 요셉지파는 지금 이 생각의 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 우리 신앙은 꼭 정체기가 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풍성한 삶, 은혜가 떨어진 거죠. 요셉자손의 말입니다. 우리는 큰 무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유산으로 한 몫만 갖게 합니까? 이것은 요셉 지파가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감사를 잊어버린 증거입니다. 

하나님께나, 공동체에게 마땅히 가질 감사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무슨 감사가 빠졌나요? 열두 지파 중에서, 야곱의 아들 중에서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 갑절의 복을 받은 경우는 오직 요셉지파 뿐입니다. 야곱의 아들은 모두 한 지파가 됩니다. 요셉만 두 아들 므낫세 에브라임이 두 지파로 취급됩니다. 이건 특혜 중 특혜요, 축복중 측복입니다. 

여러분이 지도를 보시면 알지만, 므낫세 에브라임 두 지파의 땅을 합쳐보면, 다른 지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땅이 커요. 다른 지파가 이 이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지만, 거론하지 않은 것은 요셉이 이스라엘 구원역사에서 끼친 영향력을 인정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갑절의 축복을 받은 상태예요. 그런데 이미 받은 축복에 대한 황송한 감사가 빠지니까 뭐가 나와요? 불평입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도 많고 큰 지파인데 제비뽑기를 한번만 해줬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정체가 될 때는 언제인가? 내가 내 삶에 감사를 잊어버렸을 때입니다. 과분한 복을 받고 과분한 건강을 받고 과분한 직장을 받고 과분한 믿음의 동지들을 받은 목록을 세어보기를 실패할 때입니다. 감사와 순종은 그래서 영적 훈련입니다. 

어떤 형제는 요즈음 신앙이 부쩍 상승하기 시작했어요. 왜 그런가? 최근에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직장 퇴근하기 전에 A4용지에 기록해보고 있답니다. 마태복음 산상보훈에서 주님은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하늘 아버지께서 그 손으로 입히셨다고 하셨어요. 지 스스로 꽃 한송이도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참새 한 마리도 지 스스로 먹을 것 얻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여러분과 제가 오늘 아침 먹은 것, 오늘 입은 옷, 이 시간 예배드리러 사지 멀쩡하게 나와 앉아있는 것, 이것들을 내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했다고 믿고 있다면 우리에게 감사가 없어도 되겠죠.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신앙정체기에 들어가지 않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심령이 부흥하는 비결은 뭘까요? 감사를 충실하게 마음으로 해보는 것입니다. 한 주간 감사의 목록을 적어보십시오. 묵상해보고 그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 앞에 소중히 올려보십시오. 감사는 우리 신앙이 동력과 활기를 불러오는 엔진입니다.

 
셋째, 신앙의 정체기는 내가 자기합리화에 빠져있으면 그 틈으로 옵니다 

16절을 봅니다. 요셉지파에게 자기 합리화는 골짜기 가나안 자손의 철병거입니다. 15절, 여호수아가 요셉지파에게 개척을 독려합니다. 너희는 강한 족속이다, 산지로 올라가 땅을 취하고 골짜기로 내려가 가나안과 싸워 땅을 취하라! 그런데 요셉지파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산간지방은 좁아서 안 되고 골짜기는 가나안 거민들의 철병거 때문에 못합니다. 

철병거! 이것이 요셉지파가 영적 도전을 멈추고 자기 합리화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이유였어요. 현실적으로 철병거는 너무 어려운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무기는 거의 다 나무 목재예요. 가나안 족속의 무기는 철제무기예요. 막대기와 철병거 그러니까 하나님은 꼭 우리가 얼른 볼 때 말이 안 되는 상황을 주십니다. 

왜 철병거로 무장한 골짜기로 내려가 싸우라는 걸까요? 나무 막대기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꼭 그렇게 하다가는 다 죽을 것 같은 일들을 해보라고 하셔요. 골짜기의 철병거! 여러분 사사기 1장에 이 장면이 다시 나오는데 통탄할 일이 벌어집니다. 

요셉자손이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하자 나머지 아홉지파가 모두 자기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합니다. 이 정체의 도미노 현상이 다른 아홉지파에 퍼집니다. 스불론, 아셀, 납달리 모두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합니다. 마침내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이 결심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더 이상 올라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4백년간의 영적 침체가 옵니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여호수아 당시 믿음의 용사들이 죽고 그 다음 세대가 되었을 때, 그 세대의 특징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바알신에게 경배하는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급속도로 떠나버린 이스라엘,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매우 힘없고 미약하여 이방백성들에게 압제와 고통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극심한 영적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완전히 진멸하고 내어쫒으라 하셨지만 생각해봐! 세상에 이 철병거 가나안 사람들을 어떻게 다 내 쫒냐? 대강 그냥 함께 살지 뭐! 종 부리고 일 시키고 살면 되지 않을까? 이것이 신앙의 정체를 가져옵니다. 부흥된 심령이 곧바로 완전침체에 빠지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매우 조금씩 서서히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 중에서 영적으로 아주 심령이 부흥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뜨겁고 충만할 때 그 심정과 그 감사와 그 결단을 반드시 노트에 기록하라 그럽니다. 왜 그런가? 정체기가 올 때를 대비해서입니다. 어떨 때 매일 새벽기도 나오고 매일 저녁에 기도하러 나오고, 매일 큐티하고 큐티를 미니홈피에 올립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지가 않거든요. 기도가 조금씩 식어지고 영적 활동이 조금씩 둔해지는 때가 옵니다. 그걸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누가 그 정체 침체를 바랍니까? 그런데도 와요. 그때 문제는 뭔가? 내가 어떻게 해서 영적으로 치고 올라갔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너지는 자기를 멀건히 속수무책 바라보게 된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충만했을 때, 내가 결단하고 고백했던 내 믿음의 도전의 기록을 들쳐보라는 것입니다. 계속 남의 탓 하고, 내 바쁜 삶 핑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내 신앙은 정체기의 증상이 없는가? 살펴보기 바랍니다. 첫째, 나보다 앞선 분의 신앙의 모습, 저게 아닌 것 같은데 이 생각이 드십니까? 그럴 때 주의하십시오. 그를 바라보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내 앞에 하늘상을 향하여 죽어라고 달려가는 이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금 내 삶에 감사가 늘고 있는가 줄고 있는가? 진단해보십시오. 오늘부터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감사목록을 적어보십시오. 감사목록을 며칠만 성실하게 적어가는데도 내 신앙이 살아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어떤 합리화속에서 영적 부지런을 상실했는가를 진단해보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과제 하나를 결단하여 다시 일어나보십시오. 신앙의 정체기를 날려버릴 중대한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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