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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체험 (행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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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체험 (행 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성령의 체험이 분명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성령을 체험하는 이 모든 신앙생활을 하나의 사상이나 사람의 생각, 의견이나 종교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믿는 것이 결코 아니며,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피조물의 당연한 의무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인 역사적인 계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감동을 받아 나타내는 인간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信仰告白, confession of faith]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를 체험되어지는 신앙생활을 해야만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존적이고 확신이 분명한 신앙이 되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속에 임재 하는 것을 체험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즉,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며,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을 통해 성경의 모든 말씀도 실존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요, 설교를 해도 기도를 해도 찬송을 불러도 실존적인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여러 가지 학파에 있는데 그 중에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으로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하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역사가들이 소위 암흑 시대라고 말하는 중세기에는 신앙심이 극도로 부패해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성, 역사의 발전, 신의 권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습니다. 

또한 전쟁의 체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고발 및 증언 앞에서 허망과 절망을 철학적, 문학적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하므로 극복하려는 인간의 욕구와 허무감을 이겨내고 휴머니즘을 재건하게 되었고, 종교의 부패성과 세상의 타락을 보고 마틴·루터(Martin Luther)는 교회의 부패를 공박한 그의 95개 조항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촉진시켰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종교적인 개혁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문학, 철학, 예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神)·이성(理性)·자연·인간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사상운동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예술·철학·정치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 중심’이었으며,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또 지식 자유· 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서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도교의 지적·정치적 체계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다시 프랜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험적 과학과 르네 데카르트, G. W. 라이프니츠, 뉴턴의 수학적 엄정성을 낳았습니다.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을 창조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이 부활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적인 문학이나 계몽주의 철학이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주장은 20세기 러시아 문학평론의 한 유파요, 특히 영국과 미국의 신비평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신비평도 때로는 형식주의라고 포함하였기 때문에 ‘형식주의[形式主義, Formalism]’ 내지는 ‘관념주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국 그들은 실제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며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 현실에 헛된 욕망만 심어준 ‘관념론 이상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념 철학에서 반발적으로 생겨난 사상이 바로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인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Existentialisme)’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Existentialisme)’도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실존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여 완전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이지만 세상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특별한 방법으로 개입하는데 유신론자들은 그들의 논거를 합리적인 논증에서 찾으며 경험에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 있고,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 사상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서양사상사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그들의 여러 주장들이 나타난 '유신론[有神論, theism]이 생겨났고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면서 목적에 따라 세계를 이끌어가는 신이 존재한다는 '유신론[有神論, theism]적 실존주의'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주장은 '샤르트르'나 '까뮈'나 '니체' 같은 신(神) 혹은 영적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입장으로 하난님의 실재(實在)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無神論, atheism]적 실존주의'가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10월 15일 ~ 1900년8월 25일)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리라.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무튼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Existentialisme)는 ‘현실적이고 체험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사상을 근거로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믿는 기독교의 신앙과 복음은 관념적이고 추장적인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신앙생활도 때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이나 교회(회당)에 가서 가르치신 것 등의 습관도 필요하고 배워야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회나 다니고 성경과 교리만 잘 알아서 관념과 사상을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기 쉽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증거가 있는 신앙생활, 즉,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는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성령님의 인도와 지도와 도구로 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위해 반드시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을 통한 체험적인 신앙과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와 영적 체험과 자원하는 헌신으로 감격적인 삶이 예배 때마다, 그리고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과 항상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뜨거운 감격과 교제와 신령한 받은 증거가 있는 체험,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은사와 축복받은 증거가 살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체험되어져야 그의 신앙은 확실하고 능력이 있는 신앙이 되고, 생명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믿던 하나님을 내 속에서 현실적으로 느끼고 체험되어지는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강권하여 거룩한 삶을 사며, 구별된 성도로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어떤 직분을 맡아서 잘해 나간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성경을 잘 알고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실존적이며 체험적으로 살아 움직여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물질과 목숨과 내 감정과 지식과 의지와 내 인격 전체를 기울이고 내 생명까지라도 투자할 수 있는 전인적인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전인적’이라는 말은 ‘영혼과 육체를 모두 포함한 총체적 인간’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종교인은 실존적인 신앙, 체험적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체험적이지 못하고 관념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에베소교회에 변화가 나타난 사건을 소개한 일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은 이전에는 기독교의 핍박자이었으나 이제는 성령의 인도함과 사로잡혀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의 사도가 되어 이방선교에 압장 서게 됩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니까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고, 찬송도 기도도 힘이 없고 생명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실존적인 체험이 없는 영적으로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였음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사람들은 교회에 모였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분들입니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성령충만한 사도 바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대답에 바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를 진정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반증한 것입니다. 즉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께서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눅 3:16).

그들은 교회생활에 열심이 있었지만 ‘성령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원래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학식도 많고 성경말씀도 잘 알아서 잘 가르쳤습니다. 아볼로는 설교도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아주 논리적이고 유창하게 잘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Apollos)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구약에 정통한 변증가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 부터 복음을 듣고 배웠t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행18:25절에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1)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볼로는 매우 중요한 것을 영적인 성령의 체험, 신령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정작 아볼로는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증언을 무시했던 까닭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전하고 잘 가르치는 성경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아볼로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의 아는 것이나 충실히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뜨거운 성령체험을 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비닐하우스 안에서만 자란 식물처럼 영적으로 아주 연약한 성도들이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파악한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 충만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에베소 교인들은 성령충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이 불붙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일군 여러분!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습니까?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확실히 믿는데 무슨 성령을 또 다시 받으라고 하느냐?’고 비난 하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강조하면 그것을 샤머니즘이라고 비웃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19:2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며 전도도 하며 섬겼던 제자들이 12명입니다. 그 외에 여러 여자들도 주님을 따라 다니며 일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어라고 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신앙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3년간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성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 보니까, ‘내가 너희를 떠나가야만 너희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자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하시고 기도 동산에 가셨다가 기도 하신 후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잡혀 십자가처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주 간곡한 부탁을 했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성령님의 큰 능력을 수없이 체험하였지만 그 능력은 자신들과 무관하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무능함, 영적 무기력함, 영적 성장을 포기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소원보다는 육신의 포로 됨을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변화를 경험하자 바로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 강하고 담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자 그들은 나가서 외치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3천 명씩이나 회개시키는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감옥에도 갖이고 두들겨 맞기도 하고 순교도 하였지만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시는 보혜사로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역동적이고, 능력 있는 신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고서는 영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습니다. 

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나 인간의 총명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속에 성령님이 활동하시고 계십니까? 성령님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주도권을 잡고 여러분을 지도하시고 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방법은 육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감화를 받을 때 순종하고 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믿고 나의 영혼에 심령 분만 아니라 삶속에 주인으로 다스려 주실 것을 고백하고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 아직도 영적 체험이 없이 머리만 큰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고, 기도하면 받게 되고 기도 응답까지 받으니 기쁨이 철철 넘칠 것이라고 요한복음 16장 24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이 왜 중요합니까? 성령 충만하지 못하니까 흑암의 권세에 붙잡혀서 울부짖는 영혼과 육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과 사단의 종 된 자리에서 자유하게 해 주려고 구세주로 이 당에 오셨고, 또 우리를 돕는 다른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자유하지 못하고 기쁨이 넘치지 못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령충만과 상관없이 자기 생각 충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시고, 성령의 체험을 간절히 사모하십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일평생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함과 성령의 은사를 날마다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초청하지 않아도 씨르 뿌리지 않아도 가라지가 나는 것처럼 찾아와서 정복하기 위해 역사하지만 사단의 역사를 의지적으로 물리치면 사단은 역사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인격적인 분이시므로 우리가 환영하고 사모하고 문을 열어 드리지 않으시면 내 속에, 삶속에 들어오거나 역사하실 수 않습니다. 

사탄은 불법을 일삼는 존재이지만, 여러분이 받을 성령님은 인격적인 신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찬송을 부를 때,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심령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의 밤낮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침노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며 상급이며, 성령도 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역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님의 강력한 도구로 사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오로지 성령 충만을 위해 전심전력하여 구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하여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성령충만의 체험이 지속되는 복 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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