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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 (마 6:9-13,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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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마 6:9-13, 마 18:21-35)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 주님은 우리가 매일의 생활에서 범하는 죄를 용서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주기도문에 담긴 죄사함 또는 용서라는 주제를 두 가지 관점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남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호칭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진정으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는 이 사실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는데 거부감이 없다면 주기도문은 나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할 때 죄사함은 자녀가 아버지께 구하는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은 것과 주기도문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때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았고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이 살았던 나의 삶이 죄로 충만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죄는 내 능력으로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만 가능함을 인정하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 나의 죄는 사함 받았고 나는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거듭남입니다. 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의롭다’고 불러준다는 말입니다.   

나에게는 의롭다 할 그 어떤 능력이 없습니다.  결코 의롭지 못한 내 속에 의로우신 주께서 찾아와 주셨고 그 의를 힘 입어 내가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를 선언하는 것처럼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나를 죄 없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받은 은혜의 선물 죄사함 또는 용서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고백하던 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 맘을 쏟아놓고 용서를 구할 때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구역 모임에서 ‘풍요로운 삶’ 교재로 성경공부하는 분들는 제2권에 나오는 ‘옛 사람을 이기는 법’이라는 주제를 기억하실 겁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새 사람의 성품이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성품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입니다 (롬8:17).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고 거룩하신 아버지를 닮아 거룩한 삶을 살려고 힘씁니다.  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았던 방탕한 행동과 더러운 생각과 욕심을 무서운 죄로 여기고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성품을 가진 성도의 변화된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는 한 여전히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옛 사람의 타락한 성품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성품이 우리를 옛날로 돌아가게 유혹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육신의 즐거움과 순간의 욕심을 따를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고약한 옛 사람의 성품이 튀어나오는 순간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형제를 이해하고 용납하지 못하며 분노와 미움을 나타냅니다.  양심이 무뎌지고 성도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부끄러운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나에게 있는 새 사람의 성품이 그 옛 사람과 싸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게 합니다. 미움이 긍휼과 사랑으로 변합니다. 성급하고 쉽게 분노하며 이기적이었던 행동을 뉘우치고 형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사랑으로 바꾸게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두에게 이런 두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혹은 고의로 범한 죄를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합니다.   자신의 과실을 시인하고 회개할 줄 아는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오직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런 삶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처음 예수 믿을 때처럼 또 다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아니냐의 차원에서 회개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은 자녀들이 나의 옛 사람에게 붙들려 범한 일상의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옛 사람의 욕심을 따라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어지게 만든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라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잔치집에 초대받은 사람은 집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가는 것이 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던 길에 발에 먼지가 묻기 때문에 잔치집 하인이 주는 물로 발을 씻고 잔치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녀들은 이미 십자가의 은혜로 온 몸을 깨끗하게 씻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도 그의 발을 씻음으로 매일의 삶에서 범한 죄를 그 순간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일상의 회개를 혼동하면 예수 안에서 나의 죄가 단번에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세요’ 합니다.   이미 목욕을 하였는데 또 온 몸을 씻겨달라고 매번 몸을 내미는 격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 없이 죄책감에 눌려 불안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의지하며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두번째 주제에서 좀 더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반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용서의 도리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한 번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또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고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 역시 필요 없다고 합니다.  혹시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는 말씀(요일1:9)을 교묘하게 해석합니다.  자백, 즉 자수하면 용서받는다는 확신입니다.  자백과 회개를 서로 다른 것처럼 취급하는 이상한 해석입니다. 그리고는 기도할 때마다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자신있게 죄 짓고 삽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일상의 범죄가 나의 구원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어디까지나 오해일뿐이고 그런 무책임하고 잘못된 확신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자기 확신으로 회개를 가볍게 여기면 나는 이미 온 몸이 깨끗하니 발도 씻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셈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요13:8)

주기도문의 용서 역시 처음 주를 믿을 때 나의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며 회개했던 것처럼 상한 심령으로 죄를 자백하는 회개로부터 오는 용서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녀임을 망각하고 무심코 저지른 죄와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욕되게 하였으며 아버지와 관계를 깨뜨렸음을 슬퍼하며 또 다시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겸손하게 구하는 상한 심령이어야 합니다.

이런 뼈아픈 회개의 과정 없이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면서 예수께서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셨으니 나의 구원은 보장되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사람이며,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멸망의 자식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옛 성품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우리는 육신의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부단히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수고를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지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으니 걱정없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포함한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옛 사람의 성품이 남아 앞으로 또 범죄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한한 나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죄와 싸워 이기도록 도우시며 부르신 나를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십니다.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은 또한 거룩한 삶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삽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화라고 부릅니다.  칭의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며 완성을 향하여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죄와 맞서 싸우며 날마다 거룩한 삶을 힘써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죄사함, 용서의 두번 째 의미로 넘어갑니다. 주기도문은 자녀의 기도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기도입니다. 용서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서 뿐 아니라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와 100데나리온 빚진 자 비유는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쉽게 설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자비로운 임금이 한 신하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값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빚을 진 신하를 불쌍히 여기고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길을 가다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을 때 그의 목을 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곧 갚을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통사정하였지만 이 비정한 사람은 친구를 즉시 옥에 가두고 끝까지 빚을 갚도록 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산상설교집’에서 이 비유를 예로 들면서 만일 누군가 이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형제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자신의 의로움 혹은 선한 행동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가 나의 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또 남을 용서할 여유도 없습니다.

오늘의 기도를 무심코 읽으면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였으니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나의 선한 행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용서가 따라온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전혀 잘못된 해석은 아닙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형제를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용서하셨습니다. 더 큰 용서 받은 사람으로 또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살도록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용서와 자유라는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가지고 나로부터 용서와 자유를 얻어야 할 친구와 가족에게 나누며 살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아무리 나누고 베풀어도 다함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더 많이 나눌 수록 기쁨이 갑절로 풍성해지고 또 가볍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언젠가는 자기 힘으로 갚아야 할 빚으로 여기며 삽니다.  내 능력으로 그 빚을 갚으려니 엄두가 나질 않고 마음의 부담만 더합니다.  그런데 마침 나에게 마음 빚을 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무서운 얼굴을 하며 그 친구의 목을 붙들고 당장에 갚으라고 괴롭힙니다.   마치 그 돈이라도 받아 임금의 빚을 갚는데 보태야겠다는 식입니다. 

이처럼 내 사전에 용서라는 단어는 없다는 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조차 짐이 되어 기쁨을 잃고 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음에 하실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며 이웃에게조차 나누지 않는 그 사람이 제 스스로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십니다.  물론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하고 자손대대로 갚아도 다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이니 영원히 감옥에 갇혀야 할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결국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의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용서받기 전에 겪는 불안과 죄책감, 두려움과 불편함의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함으로 그에게 자유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실천하는 순간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체험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둔 이 사람은 임금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용서받은 사실에 대한 확신과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결과입니다. 임금에게 진 빚을 자기 힘으로 다 갚지 않는 한 언젠가 임금의 마음이 변하여 다시 옥에 갇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입니다.

이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용서 받음의 기쁨과 자유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임금이 이 사람을 다시 감옥에 가둔 것은 임금의 자비와 용서가 가짜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임금이 베푼 무조건적 용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신하가 자신을 그 엄청난 빚더미에 스스로 얽어 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면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내 맘에 구원의 기쁨이 없으니 나 역시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비정한 사람으로 살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라는 말은 내가 형제를 용서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셔야 된다는 조건부 용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누리면서 내 형제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 저의 과실을 용서하시고 나도 남을 용서함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나의 것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형제를 용서할 때 나의 과실 역시 용서를 받습니다. 아니 벌써 용서된 것을 재확인 한 것입니다.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어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동안 나의 과실 역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죄사함은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 구원 여부를 따지는 조건부가 아닙니다.  아버지께 이미 받은 용서를 형제에게 나누어 줌으로 아버지의 자녀답게 믿음으로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성찬식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생각합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사랑에 동참하는 고백적인 행동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합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형제와의 불편한 관계와 미움의 앙금을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나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떡과 잔이 우리를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은혜와 능력이 됩니다.   이런 결단과 고백 없이 먹는 떡과 잔은 슈퍼마켓에서 늘 사먹는 음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만큼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를 형제에게 나눌 것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자유를 누리는 만큼 이웃의 죄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보다 더 큰 용서를 감히 이웃에게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정말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형제를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며 그 용서를 확신하는 사람이고 또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은 비로소 나와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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