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 (엡 2:19-22)

  • 잡초 잡초
  • 267
  • 0

첨부 1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 (엡 2:19-22)


여러분에게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정광호씨는 “우화경영”에서 ‘솔개의 장수비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개의 수명은 70년입니다. 솔개가 40년쯤 살면, 입과 발톱이 날카로움을 잃고 무뎌지고, 털은 점점 불필요하게 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솔개 특유의 날카로움과 날쌤이 없어집니다. 이 때 솔개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살 것이라고 결심한 솔개는 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서 둥지를 틀고 바위에 자신의 부리를 사정없이 박는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부리가 완전히 깨질 때까지 계속해서 박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부리가 새로이 자라는데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솔개는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고통과 아픔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부리가 다 자라고 나면, 날카로워진 부리를 가지고 자신의 무뎌진 발톱을 모두 뽑는다고 합니다. 발톱이 새로이 나는데 또다시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발톱이 다 나고 나면, 발톱과 부리를 가지고 털을 다 뽑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깃털이 다 뽑힌 솔개는 볼품 없고 나약하고 초라해져 보입니다. 2개월쯤 지나면 솔개에게 새로운 깃털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 고난의 과정이 5-6개월쯤 지나면, 솔개는 새로이 태어나 남은 30년을 옛날처럼 찬란하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고 조류학자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개에게 자신을 갱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주셨다고 해서 모든 솔개가 그 지혜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솔개는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리가 깨어지고, 발톱과 깃털이 뽑히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을 잘 거치게 되면 솔개는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다음 주면 41주년을 맞게 됩니다. 참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나님이 ‘기뻐하나’는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저는 이번 우리 창립 41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여기서 안주 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비전의 날개를 펴서 주께서 주신 귀한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할 것인가를 분명히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도 당신의 관심이 하나 있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거는 대상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핏값으로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교회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신다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제자가 된 우리들은 얼마나 더 교회를 사랑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자연 이런 소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 이 교회를 그처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면 나도 한 생을 살 동안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지. 좋은 교회 에 다니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지.“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이요, 또 여러분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의 전제 조건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회의 공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다닐 바에야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송장과 같은 사데교회를 다니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아주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에 몸담고 싶어하겠어요? 평생 고생하면서, 그런 교회 누가 다니겠습니까? 이왕 다닐려면 빌라델비아나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를 다니고 싶고 그런 교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헌신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심정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냐는 우리가 몰라요, 주님이 평가하시겠지만 우리교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이 교회를 좋은 교회 만들어야 내가 삽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첫째가 함께하는 신앙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권속’은 그 의미가 가족과는 약간 다릅니다. 가족은 아버지, 엄마, 형, 누나, 동생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데, 권속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 즉 머슴으로부터 노예까지도 권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짝하여 살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의 권속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제 각각 성격이 다르고, 출신지가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만드시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나의 권속이란다. 함께 사는 공동체야!” 교회는 문턱이 없어야합니다. 지방색, 계층간의 벽, 세대간의 갈등이 없는 함께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엡3:6절을 보면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6절에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지 않습니까?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라는 이 말은 교회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이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말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무려 130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나무는 커봐야 2-30미터에 불과한 것 같은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나무가 엄청나게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어가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함께 하면 할수록 놀라운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시무시한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함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건강한 교회는 터가 견고한 교회여야 합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여기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신약성경,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은 성경말씀위에 굳건히 서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말씀의 기초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터가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맙니다. 지난번 중국 쓰촨성의 지진과 아이티의 지진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버렸고 남아있는 것이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무너져 버린 것과 함께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 무너진 땅 속에 다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또 순식간에 미래마져도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상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사라져버리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땅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터가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절망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터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터가 흔들리면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리위에 바로 서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 역시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바로서서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를 늘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 초대교회 예수 믿어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된 사람들은 신앙고백이 확실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만 예수 믿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고백 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에서 결코 복음을 위해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신앙의 색깔이 분명했습니다. 신앙의 고백의 터가 튼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말 가운데 재미있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어로는 붉다 라는 단어가 red라는 단어 하나를 쓰는데 우리나라에는 붉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붉다. 검붉다. 불그스름하다. 불그니 죽죽하다. 불구치치하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열 개 이상도 있습니다. 붉다라는 단어 찾아보면 열 개 이상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게 붉으면 붉은 것이지 표현이 다양하기 때문에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뭐 그렇게 좋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죠. 언어가 풍성하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정확하지 않은 어떤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붉어야 되는데 예수의 보혈로 붉어야 하는데 불그스름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붉어야 하는데 뭔가 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붉으티티하고 불그스름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색깔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이 와서 마구잡이로 성도들의 영혼을 훔쳐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던니즘이라는 사상이 사람들의 머리에 밖혀 있습니다. 이 포스트모던의 특징은 진리를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왜 지금 교회가 안팎으로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이 양보 할 수 없는 진리 때문에 타 종교는 우리를 편협 된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회 여론도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이 진리의 터를 포기하는 교회가 자꾸 생기기 시작합니다. 얼마 전에 청주 어느 교회에 새로 예배당을 지어 입당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 간의 화합 차원으로 성가대를 불교의 중들이 와서 해 주었고 천주교의 사제단이 와서 순서를 맡았는데 그 때 찬양대가 부른 노래가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고 합니다. 이때 신문이나 방송은 얼마나 이 상황에 대해서 종교 간의 화합을 이야기했고, 그 교회를 칭찬을 했는지 모릅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닙니까?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진리의 터 위에 바로 서서 오직 구원자 이신 예수를 붙잡고 세상을 향해 거짓과 이단에 빠진 영혼들을 주 앞에 나오게 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3. 건강한 교회는 성장해야 됩니다. (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자라나야합니다. 믿음이 자라야 되고 인격이 자라야 됩니다. 이는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라지 않는 발육부진의 자녀를 둔 가정에 둔 부모는 얼마나 고통이 큽니까? 발육이 멈춰버린 교인들만 그득한 교회에 가 보세요. 기도하지 않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로부터 어린이까지 계속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세요. 처음에는 다 잘 자랐습니다. 처음엔 양질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목회자도 병들고 자라기를 멈춰버리고 교회 안에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도 다 배가 불러 성장을 멈춰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가 안 나오나, 버가모나 두아디라교회처럼 세속화를 받아들여 문란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자기 쾌락을 즐기는데 정신이 팔린 성도들만 득실 득실거리는 교회가 되버리지 않나, 또 영적으로 죽어버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배가 불러 자만하며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열심히 다 식어버려서 주님이 보실 때는 다 토해내고 싶은 역겨운 교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장이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나는 주님이 서 계신 곳까지 가기 위해서 얼마나 성장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합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천리만리라도 달려갈 만큼 갈급한 심령이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쳐서 날마다 복종시킵니까? 아예 그런 노력 안하면 문제가 일어나요. 특별히 교회 안에 중직을 맡은 분들, 내가 직분만 맡으면 다 된 줄 알고 그 다음엔 성장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른 교회를 가면 그런 사례를 너무 너무 많이 봅니다. 직분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두가 자라나야 합니다. 성장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처럼 되는 그 경지까지 우리 모두 끊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교회는 41주년 창립을 준비하면서 새벽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10교회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번 새벽 특새를 시작하면서 저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교회의 새벽기도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부흥의 진원지가 되고, 온갖 퇴폐로 무너져가는 한국사회를 바로 세우는 영적 생수의 발원지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의 진자리 마른 자리를 통하여 갈급한 심령에 은혜의 물꼬가 터지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새벽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충심으로 부탁합니다. 나는 이번 두 번째 주간 모든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새벽걸음을 재촉하는 많은 분들로 이 본당이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그 현장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기를 바라며, 모두가 이사야처럼 불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으로 “믿음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