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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삼고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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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삼고 (시 23:1-6)


예수를 잘 믿는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자기 친구들에게 전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친구들이 학교에 도착하기 전에 자기가 수업하는 교실에 들어가서 교실 앞에 부착된 칠판에다 정성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는 해답이시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친구들이 그 글을 읽고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칠판에 쓰여진 글에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자기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칠판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앞으로 걸어나가 백묵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는 해답이시다"라고 써 놓은 바로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가 해답이시라면 도대체 문제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때때로 삶의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전함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오늘날에는 더더구나 우리들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곳 하나님의 집이 우리 인생의 피난처입니다.  여기가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하나님의 집에 오신 여러분을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면서 육신이 병든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육신에 장애가 있는 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팔, 다리에 장애가 있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것은 드러나기 때문에 남들의 눈에 띠여서 인정이라도 받는데, 마음에 상처와 장애가 있는 것은 눈에 띠지 않기 때문에 인정도 못 받아 한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육신의 장애에는 보조기구도 있고, 치료기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관한 질병은 치료약도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에 관한 것은 아무런 처방이 없습니다.  그 영혼과 그 마음과 그 심령과 우리의 생명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면서 우리의 병든 마음, 상처받은 마음, 아픈 마음들을 다 치유하게 될 때에 녹아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게 정말로 힘든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회적인 불안전함에서 오는 어려움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마음의 무너짐입니다.  환경적인 불안전을 이겨낼 만한 내적인 강인함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사는 형편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마음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인생이 되어 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속 사람이 꺾이면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날마다 때마다 그 속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쉽게 대면할 수 있는 유명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이 시편을 교우들 가운데 누군가가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들의 병상 곁에서 이 말씀을 읽어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이 시편을 읽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마지막 순간에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시편 23편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바꾸어 본다면 "여호와는 내 인생의 해답이시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말씀은 인생의 문제들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해답이 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간단히 "여호와 로이"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로이'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시는 여러 이름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양과 목자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라고 했을 때 우리는 먼저 이것을 문화적인 배경에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에는 양이 흔치는 않기 때문에 그렇게 친숙한 동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을 관계지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편에 서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소설책이 아니고서는 실제로 목자가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수백 마리의 양을 지키며 때로는 피곤하여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리(wolf)로부터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목자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고 양과 목자와의 관계라고 했을 때 실감나게 알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으로서 그들의 대부분은 양과 함께 사는 목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양 한 마리는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양은 친숙한 동물입니다.

아마 이 시편은 다윗이 파란만장한 인생의 세월을 보내고서 인생의 뒤안길에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오셨는지에 대하여 과거를 회상하면서 장차도 평생토록 그렇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며 지은 시로 생각이 됩니다.

다윗도 뿌리깊은 대적 사울에 의해 그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며 쫓겼던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되돌아봅니다.  그 무수한 전쟁의 날들과 아들 압살롬의 반역, 밧세바와 우리아에 대한 쓰라린 범죄와 그 슬픔의 뒤안길을 회상해 보면서 그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항상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자신이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자신이 양떼를 돌보았던 목동이었음을 회상해 봅니다.  그때 그는 자신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양에 대한 목자의 관계보다 더 아름답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양에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양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가장 함축성 있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양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목자로서의 하나님이 완벽한 해답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고등학생이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물었던 질문처럼 하나님이 과연 해답이시라면 도대체 인생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인생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당신의 목자로 삼으셔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생의 문제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양이라는 동물은 매우 약한 동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양은 여러 동물들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양은 별로 자구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동물입니다.  양은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도 하나 없습니다.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도 없습니다.  힘센 황소의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도 할 줄 모릅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어떤 동물은 자기 주변의 자연의 색깔과 유사한 보호색으로 자신을 보호한다지만 양은 그것도 없습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혼자서도 존재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입니다.  조그마한 비탈진 길도 혼자서는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뒤에서 목자가 밀어 주어야 됩니다.  어린 새끼 양은 아예 어깨에 메고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털이 많기 때문에 시냇물 소리만 들어도 냅다 도망을 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양은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매일 먹는 풀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먹을 수 있는 풀인지 못 먹는 풀인지 구분할 줄 모릅니다.  독초와 목초를 구분할 줄도 모릅니다.

팔레스타인의 물은 급류입니다.  맹수는 많습니다.  산에는 온통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입니다.  길은 험악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이 땅에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맹수가 나타납니다.  도적떼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죽자 사자 도망을 가다가 언덕에 굴러 떨어져서 죽는 놈들이 있습니다.  도망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온몸이 찢겨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빠져 나오지 못해서 울부짖고 있는 놈들도 있습니다.  맹수가 덤비니까 앞뒤 보지 않고 지칠 때까지 도망갑니다.  더 이상 뛸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어 뒤로 발랑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하늘로 보고 바들바들 떨다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내장이 꼬여서 죽습니다.  이것이 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런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찾아올 지 모르는 사망에 대한 실존적인 두려움을 안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의 길에는 사망 그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사망을 알리는 사망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사고나 재난, 그리고 신체적인 질병들이 그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원래 원문에서는 "깊은 어두움의 골짜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이 처음 기록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특히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유대 광야 같은 곳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가파른 골짜기들이 도처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한 계곡의 길이는 무려 약 7km에 달하며, 양쪽 협곡의 높이는 450m 이상의 높이가 되고, 바닥의 폭은 3-4m나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바닥은 많은 경우 비로 침식되어 수령을 이루기도 합니다.  만약에 어떤 양이 발을 잘못 디디어 미끄러지면 이런 무서운 협곡에 떨어져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그림이 아니겠습니까?  인생 도처에 이런 골짜기, 이런 협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골짜기와 협곡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발달한 현대적인 산업이 바로 보험업이 아닙니까?  건강을 상실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의료보험이나 건강 보험에 듭니다.  집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주택 보험이나 화재보험에 듭니다.  생명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생명 보험에 듭니다.  자동차 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자동차 종합보험에 듭니다.  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암 보험에 듭니다.  유명한 축구선수들은 발 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저는 아마 주둥이 보험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기자인 다윗은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그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목자는 협곡에 빠진 양들을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로 건져 올립니다.  그리고 막대기로 양들을 위협하는 사나운 들개와 들짐승들을 쫓아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캄캄한 밤에 황급히 도망을 가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 양과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신이 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두렵지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에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에 해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기억하십시오.  양은 자기 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나약한 짐승입니다.  때문에 그에게는 목자의 보호가 있어야만 안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인간만큼 나약한 동물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태어난 그 몸 그대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절에 따라 옷을 입어야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총이나 칼과 같은 방어 무기가 없으면 결코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찮은 쥐나 개구리들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지각 변동을 감지하고 피신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지진이 일어난 이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더더욱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에 목자로 영접하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두려움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되십니다.

두 번째로, 인생의 문제는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양은 어떻게 보면 아주 깨끗한 동물처럼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양을 가까이 해보면 양이란 동물은 쉽게 더럽힘을 탑니다.  그리고 의외로 가까이 가게 되면 어떤 양은 지독한 냄새를 발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가축 가운데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어쩌면 가장 더러운 동물 중에 하나가 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간이 다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쉽게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변질되고 오염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닙니까?  멀리서 보면 다 선량하고 깨끗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별 수 없이 인간스러운 냄새가 때로는 악취가 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깨끗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냄새가 납니다.  덮어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후벼파고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양들은 특히 뜨거운 여름의 계절에 이런 지독한 오염을 걱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름은 파리와 벌레들이 극성을 부리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름은 피부병의 계절이요, 상처의 계절입니다.  산과 계곡을 통과하면서 양들은 거친 여행에서 상처를 얻게 되고, 피부염의 감염으로 온 몸이 더럽혀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피부질환이나 상처에 유일한 당시의 치료제는 기름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는 파리 중에서 가장 지독한 파리가 있는데 그것이 코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코파리는 코 속을 파고 들어와서 온 몸에 질병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코파리를 쫓고 피부병으로 이미 상처를 입은 양을 낫게 하고자 목자는 양에게 기름을 발라주고 상처가 심한 양들은 아예 양의 몸통 전체를 기름통에 넣어 잠기게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의 상처는 기름으로 어느 정도 치유되겠지만 영혼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가 되겠습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은 육체 이상으로 우리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온전한 소생은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우리의 영혼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 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원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흘리신 피를 보배로운 피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는 기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기 전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그렇습니다.  인생의 더럽혀짐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 문제에 대한 유일의 완벽한 해답은 바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인생의 문제는 방향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양의 문제는 결코 게으름이 아닙니다.  양은 상당히 부지런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양의 치명적인 결함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양은 자기가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그 길을 못 찾아옵니다.  개는 눈을 가리고 멀리 갖다버려도 제 집을 찾아옵니다.  심지어 소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개미는 자기가 다니는 길 바깥에 갖다 놓아도 제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이라는 동물은 자기가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어디로 다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간이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속도가 빨라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클릭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획득하고, 세상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현대인들은 여전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 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빨리 빨리 움직이는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뉴욕으로 출장을 간 한국의 회사원이 공항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가 처음 한 말이 무엇일까요?  "빨리 갑시다!"(Let's go. Hurry, Hurry-up)  택시가 빨리 달립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가야할 목적지 방향이 아닌 듯 해서 다시 묻습니다.  "기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 질문에 기사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손님은 빨리 가자고 했지 어디로 가자고 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요?  열심히 빨리 달려왔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잃어버린 인생,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오늘 길거리를 보십시오.  어디를 가야 하는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쉽게 포기하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절망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한 번 보십시오.  아니, 멀리 보지 말고 우리의 자녀들을 한 번 보십시오.  이 아이들이 과연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나 한 것입니까?  어쩌면 우리의 아이들이야말로 정말로 삶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방황하는 양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목자입니다.  목자만 잘 만나면 됩니다.  그가 양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의 주어는 "그가"입니다.  2절에 "그가 … 인도하시는도다"  영어 성경에는 계속해서 "그가"라는 인칭 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우리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그가 우리를 의의 길,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그는 마침내 인생 여정에서 우리를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가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어떤 길도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집,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길이 아닙니다.

빨리 달려갈 줄만 알았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방황하는 이 곤고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시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인생의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것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삶의 진정한 영적 체험을 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는 평생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풍랑에서도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부담이 되고 괴로운 것은 바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환한 길이고, 대로 같지만 결국에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눈을 뜨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인도에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형들을 만났을 때에 나를 이리로 보낸 분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불행과 행복을 가르는 경계선은 출생 신분이 아닙니다.  성별도 아닙니다.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경계선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그는 축복된 미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한 대학 정문에는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After that, What?)  이 간판의 유래가 있었습니다.  한 가난한 대학생이 많은 장학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 귀족 할머니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만일 장학금을 주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할머니가 반문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졸업하여 법률가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하며 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업도 하여 돈을 모아 할머니처럼 많은 사람을 돕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장가들어 결혼하여 가정도 이루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녀도 낳고 그들을 선량한 로마의 시민으로 키우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늙으면 대학도 세워 좋은 인재를 키우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청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을 합니다.  죽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유구무언인 그 학생에게 할머니는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나는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없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오면 자네를 돕겠네."  "어디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는 조용히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거나 크리스찬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청해보게나"

사랑하는 여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죽으신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제 저는 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어떤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여러 가지를 해 주지만 그 위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어서 아들 곁에서 성경 말씀을 읽어줍니다.  시편 23편을 읽어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돼.  네가 힘들 때, 아파질 때 이 말씀을 생각하거라.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하나님이 너의 목자가 되고 나의 목자가 된다면, 그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영어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이 다섯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이 다섯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들의 손가락을 이렇게 만지면서 이야기합니다.
"얘, 너의 다섯 손가락처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거야.  꼭 기억해.  The Lord is my shepherd.  하나님이 네 목자란 것을 기억해"

그런데 어느 날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준비했던 링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말합니다.  "네 번째가 제일 중요해.  주 여호와는 "나의, 나의, 너의" my, my shepherd, '너의 목자야.  하나님이 너의 목자다'  이것만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어느 날 아들이 몹시도 아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냥 자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보니까 벌써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 얼굴을 보고 손을 보다가 엄마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뜻밖에도 이 세상을 떠나간 어린 아들은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에 엄마가 늘 짚어주던 네 번째 손가락, 링이 끼워진 그 손을 잡고 숨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 저 영원한 천국으로 떠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셨습니까?  두려움에 잡힌 나, 죄로 더럽혀진 나, 방황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목자로 영접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죽음의 다리도 찬양하면서 건너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 분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나라가 복 받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한 생명의 힘은 온 집안의 식구의 힘보다 언제나 강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언제나 조건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일을 먼저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안전하고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목자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앞으로의 남은 생애도 그분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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