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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다운 믿음 (요 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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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다운 믿음 요 4:46-54)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와 그의 몇몇 학자들이 함께 내놓은 책 가운데에 <당신은 하찮은 존재입니까?(Are You Nobody?)>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인간성숙의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성숙함이란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발전된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망설임의 단계라고 말하는데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때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렸을 때 자신만이 아는 비밀의 단계를 말합니다. 자라면서 자기만의 비밀을 남이 알지 못할 때 거기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가지고 있는 내 것에서 오는 행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혼자만의 착각의 단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좀 크면 이 비밀을 공유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절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끼리 밤낮 손가락을 걸고 우리의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을 하고 비밀을 공유하면서 아주 짜릿한 행복을 즐기는 겁니다. 나의 행복을 적어도 그는 알고, 그의 행복을 적어도 나는 알고 있다는 즐거움입니다. 이 단계를 우정이라고도 하고 혹은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 조금 더 성장하게 될 때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맹세하고 약속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초월적 존재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때의 비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무스페리온>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미스터리(Mystery)라고 번역합니다. 말하자면 신비라는 말입니다. 신비스러운 비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그런 관계, 그런 시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고 생각하면서 무한하고 신비로운 자기만이 가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이런 성숙한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것이 미성숙한 정도의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비밀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직도 미성숙한 상태로 나만이 아는 비밀정도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정도의 믿음으로 자랑삼아 살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봐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대단히 성숙한 한 신앙인의 믿음이 나옵니다. 어떤 왕의 신하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왕의 신하이냐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갈릴리지방을 다스리던 왕은 [헤롯 아티파스]입니다. 그 왕의 신하라는 자체는 그 신분이 상당한 것입니다. 

이 지체 높은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성장케 하시고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훌륭한 믿음으로 완성시켜 가는 그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자,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30세 밖에 되지 않은 청년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고 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까지는 그 동기가 여러 가지입니다. 전도를 받아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온 가족이 다 믿으니까 자연적인 동기가 되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가하면 막연하게 관심이 있어서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순탄한 경우입니다.

때로는 사업이 실패하고 막막한 심정에 허송세월하는 것이 아까워서 나온 사람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으로 인하여 쓰러지고 넘어져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긴 사람도 있습니다. 하여간 처음부터 영생을 알고, 구원을 갈망하고 신앙의 신비를 알고 나오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와서 깨닫게 되고 신앙생활하면서 감동하고 감격하고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왕의 신하 역시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었는데 백방으로 애썼지만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손쓸 겨를도 없이 죽음을 기다려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고 보니까 체면이고 지위고 할 것 없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아들이 병들었다고 하는 이 사건은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무엇 하나 아쉬울 것이 없을 만치 지체 높은 헤롯왕의 신하가 예수님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아들이 병들었다고 하는 사건이 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들이 병들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을 상대도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들이 병들었다는 것이 어쩌면 이 왕의 신하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실제로는 엄청난 은혜일 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기대가 다 무너지고, 기댈 데마저도 없어져서 깊은 한숨을 내쉴 때 정말 한 가닥의 희망이 있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 절박한 심정이란 이런 때를 말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왕의 신하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자,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면 사실 이것마저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왕의 신하와 같은 믿음이 아무에게나 있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와서 머리를 조아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당시 처한 상황이나 그의 신분, 지위가 걸림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야 주님 앞에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어쩌면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것들을 극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은 대단하거든요. 인생에 명예냐, 불명예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들도 여기에 매여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포기하지 못하고 사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극복해야하지만 정작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냐 말입니다. 

자, 오늘 비록 다급하고 인간의 방법이 다 끝난 한계에 왔다고 하지만 결정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간구하게 되기까지는 이 왕의 신하가 포기하거나 극복했어야 할 몇 가지의 인간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지 않고는 예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었고, 예수님의 그 주신 능력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이 되려면 적어도 왕의 신하가 뛰어넘어야 했을 이 정도의 것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의 한계가 무엇이냐 하면 감각적 한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의지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이 무엇입니까? 소문이란 내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본 것에 대한 이야기가 소문입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나는 못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꼭 보아야 되고 내가 경험해야 된다고 고집을 했다면 이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도 내 자신의 경험 속에 없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증거를 말씀으로 받고 그 사실을 사실대로 믿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보아야 되고 내가 손으로 만져야 믿겠다는 이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극복해야할 한계는 공간적 한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누워있는 곳은 가버나움에 있는 집입니다. 그래서 지금 빨리 자기의 집으로 내려와서 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과 그 집이라는 공간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계가 지금 숨 막히게 합니다. 빨리 가야하는데 거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가시지 않고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같이 가서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이런 장면인데 예수님은 그게 아닙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말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그런데 이 사람 믿고 갑니다. 이게 바로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저 먼 곳에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여기서 믿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단 말입니다. 정말 급한 일이 있으면 목사한테 전화해서 “목사님,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는데 꼭 좀 기도해 주십시오.”하면 되는데 이런 부탁 하나 하지 못하고, 그런 믿음은 하나 없으면서 일이 잘못되면 “심방을 왜 안 해줘서 섭섭합니다.” 

그러고 있으니 한심하지요. 아니 요청도 안하는 걸 어떻게 압니까? 터지기 전에 될 줄로 믿는 믿음이 중요한데.. 하여간 이게 믿음입니다. 공간을 초월하여 능력을 믿는 믿음, 이것이 오늘 신하의 아름다운 믿음이고요, 

세 번째로 우리의 믿음이 극복해야할 한계는 시간적 한계입니다. 
자, 이 사람은 지금 급한 마음에 예수님께서 즉시 내려오셔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주기를 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즉시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답답한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천하태평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것도 아마 이 시간적인 한계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많습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고, 조금만 더 알아보고 말해도 될 것을 그걸 못해서 급한 성질에 말을 뱉어놓고 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잘못 알았습니다. 잘못 전달 된 오해였습니다. 어떡할 겁니까? 한번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거든요. 너무 급합니다. 조금만 여유 있게 생각하십시다. 조금만 천천히 결정하십시다. 내가 아무리 설쳐보고 날뛰어 봐도 내 시간이 아닌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우리의 시간이 있고, 하나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급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입니다. 이 결정적인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내가 가진 초조하고 답답한 시간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그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왕의 신하는 이것마저도 극복합니다. 대단한 믿음이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52절과 53절입니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게 주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잘 안다고 괜한 고집부리고 잘난 척하며 서두르고 있을 그 시간이 이미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더란 말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서 행동으로 옮길 때 기적을 봅니다. 오늘 이 왕의 신하는 기적을 보고 간 것이 아닙니다. 믿고 갈 때에 기적의 소식이 들려 온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있는 약속의 말씀만 믿고 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다운 믿음이 있을 때에 머지않아 앞에서 기적의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극복해야할 우리의 신앙적 한계들을 능히 이겨서 그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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