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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공식 (롬 4: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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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공식 (롬 4:17-25)


세계적인 패션 명품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패션 업계에서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샤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저는 디자이너가 직접 옷까지 만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재봉사들이고 디자이너는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라거펠드가 종이에 그림을 슥슥 그리고 색을 칠하고 여백에 지시하상을 갈겨쓰면 그것으로 디자인 작업이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디자인을 재봉사들에게 전달하면 재봉사들이 거기에 있는 그림대로 옷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지시사항이 애매하거나 글씨를 알아볼 때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재봉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합니다. 이게 뭐라고 쓴걸까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 그런데 라거펠드는 말하기를 ‘나는 그래픽 아티스트일 뿐이다. 내 책임은 여기까지다.’ 

정말 쉬운 직업도 다 있어요. 그렇게 하고도 월급을 받으니까.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에 천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샤넬의 명품 패션이 나오기까지는 디자이너의 천재적인 역할도 있지만 재봉사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재봉사들이 그것을 재대로 해석해서 옷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것이 작품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도 이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재봉사와 같은 입장에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분들, 사도, 선지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대로 그것을 기록한 것뿐인데 이제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이 자기가 쓴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들의 책임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고 그러다보니까 우리가 그 재봉사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이게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를 의논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설교하기 위해서만 그런 게 아니고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어요. 신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이게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 왜 이렇게 애매하게 말씀하셨을까, 왜 이게 어려울까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샤넬에 훌륭한 디자이너만 있는 게 아니고 훌륭한 재봉사들이 많이 있어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경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해석이 따라주지 못하면 작품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이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다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대로 읽어야 되고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언어에 능통해야 됩니다. 이건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고 인간의 언어에요. 

왜 신학생들이 헬라어를 배우느냐.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됐기 때문인데 굳이 원어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글의 상식, 문법 그리고 문장의 올바른 해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정확하게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좀 이상합니다. 만일 유언장을 읽는다고 할 때 그걸 그냥 건성으로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자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작성해야 됩니다. 우리가 한미 FTA를 협상할 때 글자 하나하나에 따라서 국가의 이익이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대해서 만큼은 건성으로 읽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과 무식함을 건너뛰더라도 우리의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선입관, 우리의 불신, 자격지심, 두려움, 죄의식, 의심 이런 것을 가지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내 생각을 주입합니다. 내 생각이 반영됩니다.

우리가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듣기 보다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내 생각대로 듣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의 말을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남의 말을 듣는 게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입니다마는 한 번 더 하면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성경구절이고 단순한 문장입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읽는지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로 읽습니다. 아니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으로 읽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고 하셨습니까. 되어야 된다고 우리가 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또 되라고 말씀하신다고 우리가 소금이 될 수가 있습니까. 얼마만큼 노력을 하면 소금이 될 수 있습니까. 얼마만큼 노력하면 빛이 됩니까. 이게 우리의 노력으로 좌우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셨어요. 문법적으로 말하면 명령어가 아니고 직설어입니다. 이와 같은 문법의 구별은 성경을 논할 때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명령어와 직설어에 대해서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을 말할 때만이 그 차이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언어의 규칙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로 읽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자격지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설마 내가 세상의 소금일리는 없을 거야.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해. 남들은 그럴 수 있겠지만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겠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에 대한 자격지심, 자기의 부족하다는 민망함, 죄의식, 불신 이런 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편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느냐. 매사에 이래라 저래라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그랬기 때문에. 부모님은 늘 공부해라, 빨리 일어나라, 학교가라, 뭐해라 명령하는 분이었지요. 유치원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더니 입을 크게 그렸어요. 엄마는 늘 잔소리하는 분이기 때문에 ‘엄마’하면 입이 생각나는 겁니다. 선생님도 그렇고 직장 상사도 그렇고 권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전부다 명령하는 분들이에요. 이래라 저래라 명령만 합니다. 타박하고 꾸짖고 야단칩니다. 

그러다 보니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다 우리를 야단치는 말씀이고 꾸짖는 말씀이고 명령하는 말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보면 그분의 말씀하시는 스타일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라’라는 말은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는 음성이 들렸을 때 그게 자기 스승 엘리 제사장의 음성인 줄 알았어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말은 어떤 신비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하셨어요. 신비한 음성 듣는 것을 말하기 전에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된다면 내 편견을 끄고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접고 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해야 됩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됩니다. 

운동 중에 유도와 레슬링은 비슷한 면이 많아요. 둘 다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넘어뜨리는 운동 아닙니까. 그렇지만 서로 다른 스포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유도를 했던 사람이 레슬링을 시작한다고 하면-프로 레슬링이 아니라 올림픽 레슬링-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다시 배워야 됩니다. 그래야 제대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어렴풋이 아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주워들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교제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면 지금까지 갖고 계셨던 모든 주워들은 것을 다 버리고 새로 배우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성경말씀부터 접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이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의미가 있고 여기에 비밀이 있고 지금까지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부터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안경을 쓰고 성경말씀을 읽으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소금이 됐으면 좋겠다, 왜 소금이 아니냐, 후춧가루냐 이런 말씀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표기도를 할 때 자주 하는 말이 ‘하나님은 저희보고 소금이 되라고 하셨는데 저희는 그렇지 못하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지만 세상이 짜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까.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고 소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왜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소위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 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나의 입지까지도 낮추게 되면 그건 불신이에요. 그건 의심이에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하나님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는 내 자격이 어떠하든 간에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래야지요. 받아들여야지요. 그게 아니고 ‘나는 그럴 자격 없으니까 나한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건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를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시면 내 경험이 어떻든 내 생각이 어떻든 ‘아멘.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누가 더럽다고 하겠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받아들이고 믿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추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건 겸손이 아니고 불신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priority-우선순위를 두어야 됩니다. 내 생각, 경험, 감정,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 이런 것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이 서로 불일치 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내 생각은 너의 생각보다 높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과 같이'' my thoughts-내 생각은 네 생각보다 높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도 직설법입니다. 명령어가 아니에요. "새로운 피조물이 됐으면 좋겠네", 아니에요. "되기를 원하네", 그것도 아니에요. "되거라"도 아니에요. "새로운 피조물이니라" 선포한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선포한 거예요. 

성경에 우리의 의로움 ․ 우리의 구원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모든 말씀은 희망사항도 아니고 명령어도 아니고 전부다 직설법으로 선포하는 문구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문법상의 문제인 것뿐만이 아니고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을 함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에요.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해야 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셨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셨고 믿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셨고 믿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인데 여기에 사람이 해야 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에게 요구한 조건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조건이 있다면 믿는 것밖에 없어요. 그 이외에는 전부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위요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은혜로 족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모든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을 강조하고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을 통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었으면 좋겠네’가 아니에요.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는 겁니다. 얻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올림픽 100미터 경주에서 미리 금메달을 주고 그리고 달리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과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우리는 천국가기로 정해졌어요. 그렇지만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금메달은 이미 정해졌어요. 그러나 경주는 해야 됩니다. 그럼 경주하다가 내가 넘어지고 늦게 들어가고 금메달을 못 따게 되면 어떡하느냐. 결과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최후 승리를 믿어야 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빛난 면류관은 이미 정해졌어요.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이에요. 할렐루야. 

아마 여러분이 여기까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과 내가 나를 보는 나의 참모습 사이에 괴리현상이 있잖아요. 주님은 나를 소금이라고 부르시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짜지가 않아요. 나는 아무리 봐도 그럴 자격이 없어요. 

괴리 현상이 있어요. 만약 여러분이 괴리현상이 눈에 안 보이신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괴리현상을 아브라함도 봤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장차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자체가 많은 백성의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위대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보면 자식이 하나도 없어요. 아들을 하나도 못 낳았어요. 나이는 백 살이 되어 가는데 몸은 늙어가고 아내도 늙어가고 자기의 현실을 보면 도저히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시고 많은 후손을 주리라고 약속하시니까 아브라함 마음속에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내 현실에 너무 차이가 많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짜 믿음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있는 중에 믿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 그게 진짜 믿음이에요.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내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고 부르실 수 있었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원리와 믿음의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열쇠가 17절에 있습니다. 17절 후반 절을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면 있습니다. 

불교는 없다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있다는 종교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까 빛이 있었어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니까 없던 게 있어요.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니까 죽은 자가 나와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고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니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럽고 불의하고 다 알지요.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그러면 없던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에요. 

우리가 거듭나는 길이 그거에요. 주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 긍휼을 받은 자니라,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역사하시고 믿음이 이런 식으로 역사합니다. 이걸 믿는 게 믿음이에요. 

어린이들이 부르는 찬양곡이 어른들이 부르는 어떤 곡보다 더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주소서’ 얼마나 깊이가 있는 찬양입니까. 주님이 내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약속이요, 보증수표요, 그대로 지불하십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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