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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스캔들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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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스캔들 (고전 1:18-25)
 
 
오늘 설교 제목은 ‘십자가의 스캔들’ 입니다. ‘스캔들’ 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호기심은 있어 하지만, 만약 그것이 자기의 이야기라고 하면 누구도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캔들’ 이라는 단어를 웹스터 영어사전에서는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인한 수치, 도덕이나 예의에 벗어난 행동에 의한 나쁜 평판, 불명예를 가져오는 이야기나 악의에 찬 험담’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캔들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인 정의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의미가 좋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스캔들의 대상이 되는 것이나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예스럽지 못한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스로 절제하기도 합니다. 특히 인품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스캔들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며 남에게 이런 험담과 스캔들을 퍼트리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스캔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근데 이 스캔들은 감추고 싶은 스캔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스캔들이라고 말합니다. ‘쉬! 쉬!’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알려지지 말아야하는 스캔들이 아니라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스캔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십자가의 스캔들’ 입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가 스캔들이 될까요? 여성들 중에는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나 귀걸이를 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이천 년 전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흉악한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의 못 박히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죄수가 손과 발이 못에 박힌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자들에게는 이 십자가형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반역자나 노예에게만 이 십자가형을 가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죄수는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채찍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옷을 모두 벗깁니다. 이런 관습은 십자가에 못 박힐 죄수에게 ‘너는 수치를 당할 존재, 너는 모욕을 당해도 괜찮은 존재’ 라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 알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죄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죄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세워지게 되면 자신의 몸무게에 눌려 횡격막이 조여들면서 질식사하는 경우도 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게 되는 경우도 있으며 너무 아파 고통스러워서 기절해서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시체를 금방 끌어내리지 않고 한동안 십자가 위에 그냥 놓아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들이 와서 쪼아 먹게 되는 그런 죽음이 십자가에 달린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니 누가 이 십자가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이 메시아다!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를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요, 도무지 타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만약 한국에 오셔서 사형선고를 받으셨다면 어떻게 돌아가셨을까요? 우리나라에서 로마의 십자가형과 같은 사형방법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수형’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에 동학란을 일으킨 최제우가 혹세무민을 했다는 죄목을 받아서 잡혀 죽게 되었는데 그때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참수형은 죄수의 목을 잘라 그 목을 높은 성위에 걸어놓은 것입니다. 
 
로마제국아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한국적으로 표현한다면 참수형을 당해 목이 잘린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목이 잘린 그 모습보다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처참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으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백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참, 미친놈들이다.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저거는 엉터리다! 저것은 종교사기극이다.’ 라고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고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말도 안 되는 사설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정신 나간 행동을 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정신 차리게 때리고 감옥에 가둬두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단이고, 유대교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학식도 많고 종교적인 지식도 많은 인물입니다. 헬라의 대학도시였던 다소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철학과 문화를 배웠습니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아 문하에서 유대의 율법을 배웠고 유대교회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문화에도 정통했고 히브리종교에도 정통한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안에 구원과 생명과 진리가 있다는 그 사실을 처음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종교적인 이단 사기극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생각이 완전히 180도 바뀌어 지게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행하시는 일을 상상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변화였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변화를 본문 22절-23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러분!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말로 보면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스칼달론’ 이라는 말이 나중에 스캔들(Scandal)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거리끼는 것, 넘어지게 하는 것, 그것은 험담, 있을 수 없는 이야기’ 로 유대인들은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거리끼는 것으로부터 사도 바울은 아주 놀라운 십자가의 신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보면 신비롭습니까? 십자가에 비밀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십자가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은총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이것을 깨달아야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모든 비밀이 십자가 속에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기다리던 메시아는 수난당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수난당하는 메시아, 상처 입은 메시아, 저항도 못하는 메시아, 무력하게 죽는 메시아, 그것은 유대인들이 상상하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고,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악한 인물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였을까요? 
그들은 마치 모세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외국에서 노예로 고통 받고 있었던 민족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의 사람 그리고 홍해를 딱 갈라서 땅처럼 건너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많은 지도자라야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다윗 왕처럼 용기 있는 전사, 초인적인 힘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울 줄 아는 그런 인물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엘리아처럼 사백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강력한 예언자와 같은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아무 저항도 못하고 그냥 무너지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를 향해서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저것은 있을 수 없는 스캔들이라고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헬라인들은 어떠했을까요?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지혜란 이성의 합리적인 사고를 통한 철학적 이해였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철학적 전통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지식인이 있었는데, 나사렛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은 한 젊은이, 게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모순 중에 모순이며 미련한 것 중에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 믿는 것을 조롱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는 정치적 폭도로 반란을 일으키고 십자가형을 당한 인물이 아닐까 추측했을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로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인물의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에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한쪽은 이방인이라는 구분입니다.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할례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방인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어떻게 구분했을까요? 그들은 정치, 문화적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헬라인과 야만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헬라 말을 하고 헬라 문명권에 들어온 사람과 헬라 말을 하지 못하고 야만인에 속하는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느냐, 사탄의 자녀로 끝나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멸망 받을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십자가에 복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결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양자택일을 요청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확실하게 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복음으로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이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있었던 별 볼일 없는 일로 팽개치던지 결정하라고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는 중간지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적당하게 믿으며 한발은 교회에 한발은 세상에 담가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바에는 모든 것을 걸고 믿으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복음이란 가장 비참한 자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마다 마음이 뒤흔들리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네가 나 예수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네 인생의 주인을 네 자신으로 삶고 살던지 결정하라고 우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으라고 요청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내가 신뢰했던 재물, 내가 신뢰했던 돈, 내가 그렇게 추구했던 명예 권력조차도 아무 것도 아니라며 버려놓고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계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A.W 토저 라는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십자가를 두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밖에는 없다. 하나는 십자가를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삶이 온전히 죽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정말로 내 생명을 걸고 믿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도리어 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 큰 억압이 될 수 있습니다. 
 
평생 나병 환자를 위해서 자신을 내 놓으며 여수 애향원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 당하신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시대에 있었던 신사참배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만을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드린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하늘이 어찌 두 해가 있을 수 있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우주에 주인공이 어떻게 둘되겠으며, 십자가 그 외에 구원이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은 내게 없다.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큰 성인이나, 오직 내 구주는 홀로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 신을 섬길 수 있으며, 이외에 속죄자 어디 있으랴. 이 하나님을 위하여 아까울 것이 무엇이며, 이 주를 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랴.’ 
 
손양원 목사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참 소중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금도 울리는 그런 믿음의 선배 이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되면 부담이 생깁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담은 생명을 위한 부담입니다. 자유를 위한 부담입니다. 진리를 향한 부담입니다. 나의 새로운 사명을 주는 그런 부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선 부담입니다. 그때 그 부담을 떨치면서 결정해야 합니다. 결단해야합니다. 반만 결단하면 여러분의 짐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곱절로 늘어납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때 자유해집니다. 진리를 경험하고 기뻐합니다. 내 마음에 평안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지혜요, 참 능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두 가지 지혜가 있는데 하나는 세상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지혜 같지만 미련한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미련한 것 같지만 정말로 지혜로운 것이니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비밀이요, 신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스스로 큰 것을 뽐내지만 작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드러나고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감추어진 것은 무시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강한 것을 예찬하고 약한 것을 멸시합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드러난 것, 보이는 것, 더 강한 것, 더 높은 것만을 추구하는 그것이 세상 지혜의 특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지혜가 드러나는 곳마다 인간의 자기자랑이 요란하게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경쟁자만이 남게 됩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있어서 자랑을 하면 누군가는 없어서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시기와 다툼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달란트가 많다고 우월감을 가지면 그것을 옆에서 보는 사람은 열등감 속에 좌절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가 있는 곳에는 늘 인간이 비인간화가 되고 맙니다. 인간이 소외되거나 갈등하게 되고 서로 분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자기의 연약함을 알 줄 아는 지혜, 자기 부족함을 알 줄 아는 지혜입니다. 자신에게 교만이 있는 사실을 고백하는 지혜, 자기의 죄악이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알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인간이 자기가 잘났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순간, 거기에 나의 죄가 있습니다. 나의 무지와 천박함이 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속에서 나의 완악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무지함을 지혜로 바꾸시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교만을 우리 주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내 맘속에 겸손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십자가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보며 통곡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용서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위대하신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스캔들과 같은 십자가 사건을 용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모욕과 치욕을 사람들에게 받으셨습니다. 또한, 벌거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만큼 인간을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친히 그 스캔들의 모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스캔들을 자기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누구에게나 전하고 싶어했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스캔들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사건이 실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위대하신 은혜의 표본이라고 증거하고 또 증거하고 또 증거하고 싶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너무도 소중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앞에 내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연약함, 내가 가진 짐, 내가 가진 상처, 내 마음속의 답답한 소외감, 절망감, 좌절감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이 이 모든 것을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기쁨, 치유와 소망과 사랑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누군가가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물어보면 도망가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증거 할 줄 아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같이 완악하고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허물과 미련함을 담당하시며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상처와 우리의 무지함을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로운 능력 있는 자녀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생 십자가의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알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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