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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받는 교회의 특징 (대하 1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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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교회의 특징 (대하 15:8-15)

 
오늘날 모든 교회들의 관심가운데 하나는 부흥입니다. 몇 일 전 연구실에서 찬양을 듣는데 "부흥이여 다시 오라, AGAIN 1907"이라는 찬양이 들려 왔습니다. 찬양자는 간절하게 너무나도 간절하게 부흥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자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한결 같이 부흥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갈구와 부흥을 위한 노력가운데 우리가 혹시 빠뜨리고 있는 것,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없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받는 교회의 특징은 다른 말로 하면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특징을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씀의 가르침과 예언(15:2, 8)

사랑받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쪽인 15: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또 좀 전에 읽은 15:8절을 보면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뎃의 아들 아사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사왕은 마음을 강하게 하여 유다와 베냐민 온 산지에서 가증한 물건들을 모두 제하여 버립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단을 중수합니다. 유다와 베냐민 무리뿐만 아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족속의 사람들이 유다로 몰려옵니다. 이 모든 개혁과 부흥의 시발점은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이벤트나 어떤 특이한 프로그램으로부터 부흥과 개혁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받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갖는 첫 번째 특징입니다. 다른 어떤 것,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좋은 어떤 방법이 아니라 말씀이 가감없이 진실하게 선포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받는 교회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에서 첫 번째 가는 특징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이후에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제자들이 사람들앞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들이 무엇을 말했겠습니까?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제자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이 말들은 사도행전 2:11절에 보면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큰 일이란 바로 이어서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로 비추어 보건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에 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모여서 기도한 것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교회의 핵심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는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귀신이 물러가고, 옥문이 열리는 이적들이 나타났습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이적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들겨 맞고 돌에 맞으면서도 말씀을 선포하는 일,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이적만 행하면 훨씬 쉽게 사역할 수 있고, 인정을 받을 수도 있을텐데 그는 그 쉬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합니다. 이적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교회의 가장 핵심되는 것이 바로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07년 일어난 평양대부흥 운동의 시발점도 말씀이었습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하디 선교사를 주강사로 모시고 연합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가진 것이 평양 대부흥 운동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 성경사경회가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것의 진정한 출발점이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전의 유다 아사왕의 때에도, 2000년전의 초대교회 때에도 100여전의 평양대부흥운동때에도 말씀이 중심이었고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속에 사랑받는 교회, 사랑받는 공동체, 사랑받은 가족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까? 진정한 부흥을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앞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직하게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것을 간절하게 듣는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운데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말씀에 대한 순종(15:12, 15) : 하나님을 구함

사랑받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그렇게 선포된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아사왕이 보인 반응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예언에 순종해서 온갖 가증한 것을 다 없애 버립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릴 단을 새롭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을 모읍니다. 주의 백성들을 모아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맹세하게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친이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을 때에 그녀의 태후의 위를 폐하기도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주어졌을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말하는 바를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꼬?”였습니다. 그들은 불과 50일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에 “형제여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했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15:2절에 보면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선지자의 말씀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어느 대학에 진학할 지, 이 사업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그런 예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장래 일과 관련될 수도 있지만, 선지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선지자에 의해 선포된 말씀은 “너희가 여호와를 찾으면, 그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 백성들과 아사왕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사왕과 유다 백성들이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찾는다”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33:7절에서는 “여호와를 앙모한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고, 신 4:29절에서는 “여호와께 구한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시편 24:6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시편 9:11절에서는 “주를 찾는 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와 동일한 헬라어 단어는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동일한 찾는다, 구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찾는다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연관되어서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예배를 통해서, 기도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과 연관되어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우리의 예배가운데, 우리의 기도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 백성들과 아사왕이 순종해야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따라서 유다백성들과 아사왕은 하나님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15:2절에서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이 예언의 말씀을 받았고, 15:8절에서 왕앞에서 이 말씀을 선포했고, 9-15절에서 아사왕과 유다 백성들은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15절에 보면 “온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기로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받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말씀해 순종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이런 교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하나님께 나아오는 교회, 그런 교회가 우리 대학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순종의 결과(15:15)

아름다운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이 발견되고, 만나지고,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1) 발견되시고 만나지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을 보면 아주 재밌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만나주시고” 이렇게 되어있지만, 원어성경이나 영어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의해 발견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건데 하나님은 숨바꼭질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고, 우리를 발견하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런 적극적인 하나님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고 발견되시는 하나님, 만나지시는 하나님, 수동적인 하나님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 역대하를 기록하는 성경저자는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 단어 “발견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찾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찾으시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그를 전심으로 찾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발견되신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온맘을 다해 전심으로 찾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저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고 싶은 그 마음을 누르시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전혀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는 하나님이 우리가 전심으로 당신을 찾기를 간절하게 기다리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이 만나지는 경험, 당신이 삶가운데 임재되시는 경험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계십니까? 큐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운데 발견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운데 하나님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경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간절하게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 우리가 전심으로 당신을 찾기를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만나지는 경험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경험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쉼, 참된 안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5절 끝 부분에 나오는 “평안”이라는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안식, 쉼”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20:11절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에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라고 할 때에 “쉬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민수기 11:25절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것을 포현할 때 사용됩니다. 

이사야 11:2절에서는 “하나님의 강림하심”이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이 말 “평안을 주셨다”라는 말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쉼과 안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속에 진정한 평안이 없고 쉼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운데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경험하게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연구실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무릎 꿇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온 맘을 다하여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발견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참 평안과 안식, 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안식을 누리를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우리 대학교회가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을 경험하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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