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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삶을 위하여(3)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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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하여(3) (눅 15:11-32)


가정 - 아기의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멋진 화음을 이루는 곳.
따뜻한 심장과 행복한 눈동자가 서로 만나는 곳.
상함과 아픔이 싸매지고 기쁨과 슬픔이 나누어지는 곳.
어버이가 존경받고 어린이들이 사랑받는 기쁨의 공동체.
조촐한 식탁일지라도 왕궁이 부럽지 않고 돈도 그다지 위세를 부리지 못하는 곳.
사랑이 무엇이며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맨 처음 학교.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곳.
이렇게 좋은 곳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두 주간에 걸쳐 본문을 통해 아버지의 입장과 자녀들의 입장에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가정의 모든 문제들을 다 다루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부부 사이의 문제와 형제 자매들 간의 문제 역시도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부모의 도리, 자녀의 도리 이상으로 부부의 도리와 형제 자매간의 도리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 주간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하나를 보고 있습니다. 일명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정의 불화입니다. 가장 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가족 관계가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갈라졌습니다. 형과 동생이 갈라졌습니다. 이 가족관계의 파괴는 인생들이 흔히 겪는 큰 아픔입니다. 사업이 망해도 우리는 버텨낼 수 있습니다. 친구가 나를 배신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파괴되면 버티기 힘듭니다. 그 중에서도 자녀들의 탈선은 부모의 심장에 못이 박힙니다. 

오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도 아니고 첫째 아들도 아닙니다. 무너져내리는 마음 때문에 도저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어서 문밖에 나가 서성이며 괴로워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제목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아파하는 한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악한 청을 순순히 들어주었습니다. 아예 큰 아들까지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연약한 아버지입니다. 자식들에게 져버린 아버지입니다. 순하디 순한 아버지입니다.

이 순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처럼 패역한 아들이 나올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너무 순해서 아들이 버릇없이 컸기 때문입니까? 이 아버지는 정말 인자한 아버지, 좋은 아버지입니다. 더구나 인생을 아는 깊은 지혜를 가진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이렇게 좋은 아버지 밑에서 저렇게 못돼 먹은 자녀가 나올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만 그랬으면 이해가 되는데 큰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아들 역시 자기만 챙기는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두 아들 모두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입니다. 

왜 예수 잘 믿는 부모들 아래서 패륜아가 나옵니까? 왜 목사와 장로들의 자녀들 중에도 문제아가 심심찮게 생깁니까? 그럴 때 여러분들은 쉽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별 것 없네! 겉으로 잘 믿는 척해도 실은 문제가 많았던 거야! 저것 보라구. 자식 농사도 제대로 못하면서 교회 일 열심히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 또 반대로 “자녀가 잘 되는 것 보니까 저분들은 믿음 좋은 부모가 틀림없어! 하나님께서 저 분들에게 보상해주신 것이야!”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공식처럼만 됩디까? 생각해 보십시오. 꼭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녀가 나오고 나쁜 부모 밑에서 나쁜 자녀가 나오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어서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 안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속단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한결같이 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불화가 생기고 그래서 아픔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이 문제를 믿음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내할 수 있고 지혜를 얻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맞아도 마땅합니다. 해도 너무 했습니다. 빈털터리로 쫒겨난다 해도 당연합니다. 망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다렸습니다. 돌아올 때 아들로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율법으로 정죄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환영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며 배려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모든 육신의 부모들에게도 심겨져 있다는 것이 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육신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반항과 패역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비유에 나오는 아파하고 있는 한 아버지를 통해서 우리를 보시며 아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 관계에서 아픔이 있습니까?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아픔도 함께 있습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우리의 사랑도 커가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모든 인생으로 인해 이파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항하는 우리에게 매를 때리시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자신이 매를 맞는 쪽을 택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아픔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대낮인데도 하늘이 세 시간동안이나 캄캄해졌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줍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들로 십자가를 지도록 얼굴을 돌려버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장에 못이 박힌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가슴에 못을 박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율법대로라면 인생들은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외아들 예수님께서 대신 그 고통을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범죄한 인생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새 언약의 시대, 은혜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회복의 때, 구원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며 참으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심판하기보다 구원하기를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 아픔을 깨달을 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픔을 깨닫고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때 인생은 다시금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중생했다, 거듭났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중생하셨습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아픔을 이해하십니까? 중생한 자는 달라집니다. 하늘 아버지의 아픔과 사랑이 그 마음에 박힙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오늘 아파하며 기다리고 있는 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픔을 깨닫고 있는 성숙한 아버지입니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가운데도 이러한 성숙한 아버지가 있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는 어떠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아들이 집을 나가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면 왜 아버지는 이 아들의 가출을 말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마도 빤히 보이는 아들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며 아버지는 차근차근 아들을 설득해보았을 것입니다. 왜 그리 안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이미 떠나 있는 아들을 붙잡아 둔다고 해서 아들이 새로워질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억지로 붙잡아 둔다 해도 아버지가 살아 있을 동안만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이 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뛰쳐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실패할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실패한 아들은 돌아올 집이 영원히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 아들을 사랑하며 새롭게 하겠습니까? 아들이 실패할 것이 뻔하다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실패하는 것이 그래도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깊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세상적인 성공은 영원한 인생의 실패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의 실패가 인생의 새 출발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실패하지 않도록 부모가 잘 지도하고 또 자녀들이 아버지의 지도를 그대로 따라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녀들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실패는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고통을 이해하게 될 좋은 기회요, 거기서 인생의 의미, 겸손의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더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가 실패했을 때 여러분의 반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실패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고 품에 안으시는 그 사랑으로 자녀를 대하셔야 합니다. 여기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동구 밖까지 나가 ‘오늘은 돌아올까’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실패한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시는 아버지, 그리고 큰 가슴으로 끌어안고 감격하는 아버지, 과거의 잘못을 한 마디도 묻지 않는 아버지, 잔치를 벌이며 아들의 지위를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다시 회복시켜 주는 아버지, 다시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아들에게 열어주는 아버지입니다. 실패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와 같은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아들을 얻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까지 부모의 품에서 머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들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떠날 때, 그리고 실패할 때, 그 자녀를 향한 부모의 태도입니다. 자녀들이 실패했을 바로 그 때만큼 좋은 기회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유감없이 여러분의 사랑과 인생과 신앙의 큰 의미들을 자녀들의 마음에 깊이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보다, 명예보다, 가문보다 아들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보면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재산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기 명예나 자리 때문에 실패한 자녀를 외면한다면 자녀를 영원히 잃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패하여 면목이 없는 자녀를 끌어안고 다시 용기를 주는 그런 부모를 볼 때 그 자녀는 사랑이 무엇이며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용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 자녀들의 눈에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부모가 되는 것이 빗나가고 실패하는 자녀들을 향한 부모들의 거룩한 책임입니다.
하지만 보다 큰 문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녀가 오히려 더 실패하는 자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큰 아들이 동생의 가출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동생을 붙잡은 흔적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을 헤아려 보거나 아버지를 위로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동구밖에 나가 아들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매몰차게 외면했습니다. 동생을 한 번 찾아 나서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아버지가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너무나도 냉정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작은 아들보다도 더 큰 문제가 바로 이 큰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큰 아들은 쉽게 고칠 수 없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교만하고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큰 아들, 그러나 겉으로는 자기 일에 성실하고 자기 속 내면을 열어보이지 않는 지극히 영악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라 해도 참 무서운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분명히 성공할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아들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나간 탕자였다면 큰 아들은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지만 그는 아버지의 가슴에 큰 못을 박고 있는 더 큰 탕자, 즉 집안의 탕자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같이 한 집에 살고 있지만 아버지와 이 장남과의 간격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최대의 고통이자 숙제였습니다. 이 큰 아들 곁에 작은 아들이 함께 있으면 더 불화의 골은 깊어갈 것이기 때문에 작은 아들이 떠나고자 했을 때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속마음은 작은 아들의 변화를 통해 큰 아들도 변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데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고 큰 잔치를 벌여 환영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큰 아들은 화를 내고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큰 사랑 앞에서 장남은 지금까지 잘도 숨겨 왔던 자기의 속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질투와 원망과 교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비로소 이 큰 아들의 수준이 드러난 것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화를 내고 있는 큰 아들에게로 아버지가 나가서 사정을 합니다. “얘야, 그래도 너는 장손이 아니냐? 내가 네 동생을 이처럼 사랑하여 영접했다면 하물며 네게는 어떠하겠느냐? 

실은 내 마음, 내 사랑이 항상 네게 있었느니라! 지금 내가 네 동생의 잔치자리에 가 있지 않고 이렇게 대문 밖으로 나와 너와 마주하고 있는 이 아비의 심정, 이 사랑, 이 고통, 어찌 그렇게도 모르느냐? 내 아들아, 같이 들어가서 못난 동생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네 동생을 끌어 안아다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끝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라 결말이 없는 미완성 드라마입니다. 이 후의 드라마는 저와 여러분이 써야 합니다. 글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아직 형제와 불화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물론 하늘의 아버지께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화해하십시오. 부모를 둔 자녀들에게 부탁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형제들끼리 화목하세요. 이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길입니다. 자녀들로 인한 부모의 고통이 언제 그치겠습니까? 모든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그 품에 돌아올 때 끝날 것입니다. 아니 함께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찬양을 드리며 예배할 수 있을 때 부모의 고통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서로 화해하고 정말 형제의 우애를 즐길 때 부모의 고통은 끝날 것입니다. 

육신의 형제뿐 아니라 영적인 형제들 사이에도 화해해야 합니다.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지체와 지체들 사이에, 젊은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성령이 주시는 평화로 가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아직 여러분들 중에 큰 아들 같은 분이 계십니까? 오래 전부터 예수를 믿어 자기만큼 의로운 자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굳어져버린 성도들이야말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그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에 사랑이 없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문을 열지 않습니다. 세상 잣대로 인생을 평가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무식한 자들을 차별합니다. 항상 비판하기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에 참예하지 못합니다.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사람들을 여전히 멸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죄악입니다. 

반대로 작은 아들과 같은 분이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이 작은 아들과 같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던 탕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로 살아야 합니까? 여기 동생처럼 그냥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잔치자리에서 즐기고만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대문을 열고 달려나가 형님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애를 써야 되겠습니까? 형님이 집안으로 들어와 함께 즐길 때 비로소 아버지의 고통은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을 돌이키게 하는 데는 동생이 결정적인 키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생이 정말 회개하고 이제 정신을 차렸다면 그는 형에게로 달려나가 이렇게 애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형님, 들어오셔서 저의 절을 받으소서! 이제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버지는 물론 형님께도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가문에 먹칠을 했습니다. 형님, 용서해주세요. 이제 형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형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형님 없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들어오셔서 형님이 이 잔치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살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은혜 받은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형님으로 모십시오!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그가 지금 예수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 없이 우리의 형님으로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이미 돌아왔으므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보다도 아직 문밖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 다시 찾아야만 할 형제들에게로 가 있습니다. 아니 그들을 집 안으로 데려 오려고 벌써 집 밖으로 나가셔서 그들을 만나 대화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하나님을 따라서 그 형제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 뛰어들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시원해질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님들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자녀들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자녀들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자녀들도 자기 자녀처럼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그 사랑 안에서 살고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너무나도 값진 고통입니다. 이 사랑의 고통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 화목하게 잔치할 때까지 우리 주님은 고통하십니다. 집밖에 계십니다. 사랑의 고통을 가득 안고 오늘도 세상의 이곳저곳을 찾아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고통의 길을 함께 가야합니다.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그들의 실패가 나의 실패여야 합니다. 그들의 문제가 내 문제여야 합니다. 그들의 한숨과 눈물이 나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무력함과 사랑 없음에 울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는 우리의 못난 모습 때문에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리 모두는 사랑의 고통을 분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였지만 그 즐거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은 너무나 기뻤지만 그 기쁨을 뒤로 미루어야만 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는 큰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큰 아들이 집으로 들어와 함께 잔치를 즐길 때까지 쓰라린 가슴을 안고 그 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고통이 있는 집밖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더 큰 기쁨을 위해 작은 기쁨을 뒤로 미루고 계십니다. 주님은 더 온전한 기쁨을 위해 오늘도 불화의 현장으로 고통을 안고 달려가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아픔을 품고 동행할 자 누구입니까? 바로 그 동행자가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이야기에 어쩌면 아버지 이상으로 고통을 당했을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까지 단 한 마디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토록 힘들어하고 자녀들이 힘들어할 때 중간에서 조종자의 역할 내지는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했어야 할 어머니는 어디 있으며 아내는 어디 있었던 것일까요? 아버지를 속이도록 아들 야곱을 부추기던 리브가처럼 작은 아들이 떠나도록 하는 역할을 어머니가 했던가요? 아님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큰 아들을 부추겨 화를 내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았나요? 아님 이때 어머니이자 아내는 이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니었던가요? 도대체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어머니의 존재가치가 없었던 걸까요? 아니요 어쩌면 모든 문제의 출발이 어머니였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서로 불화하게 된 것도 그 밑바닥에는 어머니의 편애가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다 귀한 자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데 정말 그렇습니까? 모두를 대하는 태도가 공정한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엄마는 누구만 사랑한다고 하는 불만이 또는 자부심이 자녀들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도 누구처럼 사랑받고 싶다는 그 마음만큼 아픈 마음이 또 있겠습니까? 반대로 더 큰 사랑을 받기에 그렇지 못한 다른 자녀를 알게 모르게 무시해버리는 그런 모습이 내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들의 가정에도 이렇게 잊혀져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그 존재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다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동구밖까지 나가서 서성이는 아버지를 큰 아들이 오히려 외면했던 것도 사실은 어머니가 그런 남편을 외면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날마다 동구밖에 나가 서성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이해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이나 집에서 모른 척하고 있는 큰 아들 모두를 위해서 날마다 숨을 죽이고 울며 기도하고 있는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 어떤 아버지로 기록이 되기를 여러분 원하십니까? 아니 어떤 자녀로 기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이제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길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 뒷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의 끝은 아름다웠더라 그래서 참으로 행복하였노라로 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어떠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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