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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이 오셨네(1) (요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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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셨네(1) (요 14:25-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곧 성령이 임하실 것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을 받으라(행 1:4-5).”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도행전의 약속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예수 탄생의 사건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육신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 후 영으로 다시 오순절날을 기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종횡무진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가 오시면 너희를 가르치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알게 하고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20세기의 대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 분은 평생 기독론 즉 예수에 대한 연구만 해 왔습니다. 그가 평생에 쓴 원고의 양이 약 3만 페이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중 2만 페이지는 예수에 대해서 쓴 원고입니다. 그는 평생 기독론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게 좀 더 시간이 있으면 성령론을 연구하고 싶다. 

21세기 신학은 성령론이 중심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령론은 신학계에서는 적용이 적습니다. 그런데 목회현장에서는 더 없이 필요합니다. 목회현장에서는 성령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현장에서는 매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600백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매주 2천여개 씩 교회가 개척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라이언트는 미국교회는 매주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그런데 그중에 50%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95%의 신자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의 내용도 모르고 있다고 말하였고 또 미국 신자의 2%만 전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신자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말이고 성령의 역사를 모르면 전도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성령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을 모르듯이 성령의 역사도 눈으로는 보이지도 알지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령은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아주 강하게 그러나 아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활동하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본문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3절을 보면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믿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것은 네가 안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보잘 것이 없고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내가 안다는 것은 아주 보잘 것이 없는 차원의 앎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내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성령이 나로 하여금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하나님을 연구하지만 하나님은 연구해서 만나고 알고 발견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연구해서 얻어지고 알고 발견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고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은혜를 입어야 알고 발견하고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가 너희에게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는 것이 변화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입니다. 내가 변화 받았다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은 내가 변화 받았다는 아주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파이퍼(David Piper)라는 분은 간증하기를 어머니로부터 훌륭한 믿음을 전수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지극히 개념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개념적인 믿음은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전달되지는 못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모태신앙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 차원입니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방탕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사람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몸부림 칠 정도가 되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지점이 복된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한 달간 기도하는 동안 어느 순간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순간 하나님의 불이 뜨거운 액체처럼 내게 흘러 들어왔다. 그 액체가 목구멍과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흘러 들어가더니 내 속에서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했다. 그 순간 나는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났다. 그때 마약에 대한 기억이 내 오감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후 헌신해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할 때 받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성령의 임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말씀이해와 실천하게 

성경은 영감의 책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사람이지만 원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중생하게 하시고 영적성장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을 읽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설교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를 때가 있습니다. 

새신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읽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잠만 쏟아지는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은 수면제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때 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말씀을 읽을 때 주어지는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무슨 능력이냐 하면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나의 내면에서 힘이 솟아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끊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솟아납니다. 옛 생활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용기가 발생합니다. 봉사하게 하되 아주 기쁨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게 합니다. 또 나는 할 수 없는데 내 안에서 자꾸만 나누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하게 합니다. 이것은 모두 내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심 

마태복음16장18절을 보면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6-7절에서는 “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목회현장에서 목회의 주체는 사람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고 성령이 나를 통해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 뿐 입니다. 때로 이 해석이 잘못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때 교회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때로 개중에는 내가 교회를 부흥시킨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나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 뿐 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 도구로 지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오늘도 교회를 부흥하게 하고 변화하게 하고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장의 영이시고 선교의 영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선교의 주체는 사도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전도자로 나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선교하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장하는 교회는 모두 성령을 강조하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들입니다.  


세상 변화 - 하나님 나라 이룸 

성령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세상에서도 역사하여 세상도 변화시키십니다. 성령은 역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단순히 성도들만 회개시키고 전도하게 하는 것만 아니고 성령은 이 세상도 변화하게 하고 그 변혁을 주도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그런 모습이 초대교회 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되니까 모두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살고 구제하고 그 나눔의 삶이 마침내 로마의 지배 하에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왕성하게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기원 165년에 로마전역에 전염병이 만연했습니다. 그 전염병이 15년 동안 로마제국의 인구 12분의 1을 죽게 하였습니다. 그 후 기원 251년에도 또 한 번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그때는 도시가 텅 비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서로 돌보고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돌보았습니다. 

그때 디오니소스 주교가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당시 크리스천 형제들이 자신을 아끼지 않고 서로를 생각하고 끝없이 사랑으로 돌보아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고 기쁘게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다가 병자들로부터 병을 옮겨 받아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성령은 2천 년 전에 다락방에 오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때 강림하신 성령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사역에 권능을 부여하십니다. 교회를 성장하게 하시고 또 세상을 변화하게도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 오셔서 각종 병을 치료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고 능력을 입하시고 성령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왜 충만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내면이 너무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지금 각종 욕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내안에는 온갖 욕망들로 충만해 있습니다. 거기다 불신앙이 또 가득합니다. 그리고 내안에 각종 우상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성령을 속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내가 매일같이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거기다 우리는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이 죄성들이 가득하고 목이 곧고 완고하고 완악하고 의심이 많고 죄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사를 가려면 집을 청소해야 사람이 들어올 수 있듯이 내안을 이렇게 청소하고 청결하게 해야 성령께서 내안에 임하실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영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이 나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에베소서 5장에서 술의 충만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술에 충만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술에 충만하게 되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의지표현이나 발걸음이 모두 술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술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술에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은 그 반대현상을 말합니다. 내가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내 의지가 성령에 의해서 전적으로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의지표현이나 발걸음이나 뜻이나 목적이 모두 성령이 주시는 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에 충만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술에 충만하게 되면 술이 내 의지를 주도하여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게하고 추태를 부리게 하고 싸우게 하고 주정하게 하듯이 내가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내안에 성령이 말을 많이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이 쓸데없는 말이 아니고 생산적인 말을 하고 전도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힘을 주셔서 밤새워 기도해도 피곤이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간증을 하고 고백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는 능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어느 가정에 탈옥 무장 강도가 침입하였습니다. 남편은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침착하게 손님 대하듯이 “그 무거운 총 놔요,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맛있는 아침 식사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하고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행동이 너무나 태연하였습니다. 강도가 생각하니까 너무 이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며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믿어요. 나는 당신이 죽이면 천국에 가니 무서울 것 없어요. 당신도 나의 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하고 의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새벽 3시에 침입한 이 강도와 아침 10시까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침내 이 강도가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과 생각과 용기와 결단력이 성령이 주시는 힘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힘입니다. 지금 이 죄수는 총을 가지고 그 집을 컨트롤하고 있습니다. 그 강도는 지금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다 죽일 수도 다 살릴 수도 힘을 과시할 수도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은 이 컨트롤이 지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나치나 일본이나 공산주의나 국수주의나 독재정권은 이 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가정에서, 국가에서, 회사에서, 직장에서 이 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힘으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이 컨트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또 다른 파워 때문입니다. 그 또 다른 파워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이 민주주의의 힘이 공산주의나 독재 그리고 히틀러나 일본을 무너트렸습니다, 또 하는 햇빛입니다. 비바람이나 태풍은 다 뒤엎을 수 있지만 그때 사람들은 더 단단하게 붙들어 매게 됩니다. 더 두꺼운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햇빛은 다 벗게 합니다. 이것이 햇빛의 힘입니다. 그리고 제일 강한 힘은 성령의 힘입니다. 이 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대 로마제국의 독수리만 보아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성령의 힘과 복음의 힘에 의하여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은 컨트롤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내적 파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8장31절에서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하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비겁하고 용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을 받고 나서 나가 전도하니 3천 명씩 5천 명씩 회심하는 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너희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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