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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므로 (삼상 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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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므로 (삼상 18:1-30) 
 
 
17장은 다윗이 백성들 앞에 공적으로 등장한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18장은 다윗이 점차 백성들의 지도자로 부각되는 과정을 사울의 몰락 과정과 대비하여 기술합니다.

1-5절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먼저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1)했습니다. 요나단도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14:6)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골리앗 앞에서는 그도 두려웠는지 가만히 있었는데 다윗을 보고 믿음이 회복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연락”, 즉 영혼이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3), 황태자의 신분을 표시했을 “겉옷”과 군인의 생명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징표로 주었지요(4).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했습니다(2). 사울 개인을 위한 궁중 악사였던 다윗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다시금 왕의 곁에 있게 됩니다. 다윗은 궁중 악사 시절에도 사울에게 “크게 사랑”을 받았습니다(16:21). 이제는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여” 사울이 “군대의 장”을 삼을 만큼 신뢰도 얻게 됩니다. 베들레헴 촌구석의 이름 없는 개인의 신분을 벗어나 백성을 지도하는 공인이 되었지요. 이것에 대해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습니다(5). 다윗은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인도되고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사울 왕을 환영”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6).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거나 비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군중들은 흔히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비교해서 말하곤 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 사울은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했습니다.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넓은 마음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지나치게 확대 해석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8). 곧장 ‘나라’와 연관시키지요. 그만큼 왕권에 관심을 두었고 왕권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크게 사랑스럽던 다윗이 갑자기 크게 위험해 보였습니다.

가인이 아벨 때문에 화를 낼 때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b)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화를 품고 있다가 동생을 살인합니다. 죄는 품고 있으면 자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명합니다(엡 4:26-27). ‘분’이나 ‘시기심’처럼 하찮게 보이는 것도 품고 있으면 마귀가 틈타게 된다는 사실은 사울에게서도 확인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한 불쾌감을 품고 “그 날 후로 … 다윗을 주목”했지요(9). 이날에 죄를 품었기에 다윗을 죽이려는 생각이 그 이튿날 싹트게 됩니다.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렸습니다(10). 처음에 임했던 악신보다 더 강력했습니다(16:14). 다윗은 평소처럼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탔는데, 사울이 갑자기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하고 손에 있던 창을 던졌습니다(11). 갑자기 날아온 비수였지만 다윗은 “두 번” 피합니다. 다윗을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사울의 창으로부터도 구해 주신 것이지요. 사울은 악신이 힘 있게 역사해도 전혀 보호 받지 못하는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12). 그래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았지요(13a).

다윗은 사울로부터 떠나있는 동안 “백성 앞에 출입”(13b)하며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지요(14).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했습니다(15). 곁에 두면 위험하다 생각해서 멀리 보냈는데 더 위험한 인물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그들 앞에서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6). 왕궁에만 머물렀다면 한순간 전쟁 영웅의 추억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백성들과 접촉하므로 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롬 8:28).

해코지 할수록 다윗은 더 형통해졌고, 그만큼 사울은 더 두려워졌습니다. 사울은 다시 다윗을 가까이 불러서 좀 더 교묘하게 죽이려 합니다.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줬어야 할 “맏딸 메랍을 … 아내로” 주겠다며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했지요.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는 속셈이지만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웁니다(17). 막상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가 되자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지요(19).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함을 알자 다시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는 마음을 품습니다(20-21).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이든 딸이든 닥치는 대로 이용합니다. 미갈은 우상을 집에 두는 사람이었는데(19:13), 그녀와의 결혼이 다윗의 신앙에 올무가 될 수도 있겠지요(출 23:33). 또 폐백 대신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요구함으로써 결혼 전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25). 죽은 사람의 양피를 자르는 일은 대단히 모욕적이어서 블레셋 사람들은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다윗을 대항할 것입니다.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서 정적을 감쪽같이 제거하려는 정치적 술수였지요. 그런데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겨서 “만기가 되지 못하여”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양피를 바쳤습니다(26-27).

죽기는커녕 기한 전에 2배의 양피를 마련해온 다윗이 딸을 요청할 때 사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앞뒤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을 대적하는 일은 허사였지요. 올무가 될 줄 알았던 미갈 조차 다윗을 “사랑하므로” 낙담 되었을 것입니다. 이쯤이면 두 손 들고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28-29). 모세를 끝까지 대적했던 애굽의 바로가 걸었던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그의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었습니다(30).

왕이 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되었고(9:16, 16:1),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고(10:1; 16:13),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고(10:10; 16:13),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백성들에게 인정받았지요(11:11-12; 17:51-52). 반면 사울은 외모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었지만 다윗은 중심이 탁월했고(10:24; 16:7), 사울은 간계를 행했지만 다윗은 지혜롭게 행했고(18:21; 18:5), 사울은 여호와와 선지자와 백성과 자녀들로부터 소외되지만 다윗은 사람들을 얻어간다는 차이점들도 있습니다(15:32; 17장 이후). 이런 차이 속에서 사울은 몰락해가고 다윗은 부각됩니다. 다윗은 운 좋게 골리앗을 쓰러뜨린 반짝 스타가 아니었지요.

오히려 사울이 한 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역사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과 말씀에 대한 멸시와 불순종을 거듭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요.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악한 영을 막아주시지 않으면, 누구든지 죄의 종이 됩니다. 마음에 파고드는 죄를 이길 수 없고, 괴롭고 두렵지만 계속해서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게 되지요. 오직 죄에서 더 큰 죄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신 후에 사울의 마음은 죄에 지배를 당했습니다. 죄악들이 통제되지 못한 채 마구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 흑백 논리에 빠지면 ‘누가 사울이고 누가 다윗인지’ 따지려합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때로는 다윗처럼 때로는 사울처럼 행합니다. 사울 같은 사람 따로 있고 다윗 같은 사람 따로 있기 보다는 두 모습이 한 사람 속에 함께 있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는 다윗처럼 함께 하시는 하나님,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은혜가 떨어지면 사울처럼 죄의 소욕에 넘어지고 맙니다. 괴로워하면서도 죄의 세력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지고, 당면한 현실을 분노와 시기심과 교묘한 술수들로 해결해 보려고 하게 되지요.

본문은 다윗의 “지혜”(lk'c;, 사칼)를 유난히 강조하여 5번(5, 14, 15, 30) 언급합니다.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 “형통”(신 29:9; 수 1:8; 왕하 18:7)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대조적으로 본문은 사울의 간계와 형통치 못한 모습도 유난히 많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12)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사울처럼 될 수 있고, 사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윗처럼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도 마귀가 틈탔을 때는 사울보다 훨씬 교묘하게 살인을 저지릅니다(삼하 11장). 그래서 본문은 다윗이나 사울보다 여호와의 함께하심과 떠나심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오늘날 뇌 과학이나 정신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성령님’이나 ‘악령’에 대해 부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두 존재를 분명하게 인정하며, ‘악한 영’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어 심판의 수단이 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악한 영의 영향을 받기가 그만큼 쉬워지는 것이지요. 이제는 다윗이 되었다고 안주하다보면 어느새 내 속에서 숨어있는 사울을 발견합니다. 반면 사울이 되고 말았다고 절망하노라면 내 속에 다윗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최고로 복 받은 삶인 줄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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